[Review]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 자신의 영혼을 깜박이며 텍스트를 가로지르는 일

글 입력 2021.12.2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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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경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다


 

단편 소설집의 매력은 앞에서부터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책을 받아 든 나는 목록에서 가장 끌리는 제목을 찾아내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호기심을 따라 책을 뒤죽박죽 들추다 보니 순식간에 책장을 덮게 되었다.

 

처음 내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은 <거짓말하는 사람들>이었다.

 

 

"잭은 자기 사무실을 좋아했고 자기 사무실을 좋아해도 괜찮았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첫 문장이다. 당시 편집장은 평소답지 않게 이 첫 문장만 읽고 원고를 싣기로 결정했다.

 

"딱 보니 알겠어요." 그녀는 읽어보라고 내게 원고를 건네며 말했다.

 

물론 그녀가 옳았다.

 

- 398p

 

 

모나 심슨의 해설에도 나와 있듯이 단편 <거짓말하는 사람들>의 첫 문장은 제목만큼 매력적이다. 재밌는 세계가 펼쳐질 것 같다는 강렬한 직관은 나를 곧장 다음 문장으로 데려갔다. 얼마 안 가 나는 잭의 사무실로, 그리고 잭과 로이 형제의 미묘한 대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궁금증을 자극하는 제목과 첫 문장. 단편은 어떻게 하면 짧은 분량 내에 가장 효과적이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독자를 매료시킬 수 있을지 고민한다.

 

데니스 존슨이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에서 겨우 천 개 남짓의 단어로 개인이 영원에 맞서는 서사를 전달한 것처럼, 작가들은 사소한 순간에 묶여 있는 존재들을 간결하게 그려내면서도 그와 동시에 가장 깊이 있는 에센스를 추출해낸다.

 

단편 소설의 시학은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많은 것을 요구한다. 독자는 알쏭달쏭한 행간의 함의를 추측하고 상상하면서 책과 자신 사이의 깊이를 확장한다. 책 속 세계로 깊숙이 진입하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음미하기 좋아하는 독자라면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를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최대치의, 때로 충격적인 통찰력


 

책에 실린 열다섯 편의 단편에는 그와 관련한 간략한 해설이 수록되어있다. 다양한 필자가 해당 작품을 선정한 이유와 작품이 가진 뛰어난 점에 대해 서술한다.

 

작가이자 성실한 독자이기도 한 이들 고유의 시선과 감상을 통해,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작품의 또 다른 일면을 곱씹어보는 일 또한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가 선사하는 또 하나의 재미이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단락은 아래와 같다.

 

 

카버는 이야기의 형식이 아무리 화려하거나 이리저리 꼬였더라도 그 순수한 뼈대는 언제나 단순하고, 근본적이며, 깊은 인간적 원천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전한다. 감정과 형식과 이야기는 반드시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마음을 써야 하고, 많이 써야 한다. 놀라울 만큼 흥미로운 매너리즘, 신랄한 농담, 기묘한 만화적 미래와 같은 꾸밈이 많은 문장은 그것의 뼈대가 순수하고 솔직하고 인간적인 관심에서 우러나올 때 비로소 세련되고 멋진 글이 된다.

 

- 레이먼드 카버의 <춤추지 않을래> 109p

 

 

<춤추지 않을래>는 기승전결도 주제도 명확하지 않지만 왠지 모를 비감이 강하게 전해져 오는 소설이다. 단순해 보이는 문장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종류의 울림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강렬한 찰나의 느낌과 감정이야말로 단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기쁨 아닐까? 밑줄 친 문장을 다시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며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를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오늘이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_표지.jpg

 

 

++

 

단 몇 페이지의 단편소설이 주는 여운은 때로 장편소설보다 진하다. '작가들의 꿈의 무대'로 통하는 미국의 문학 계간지 <파리 리뷰>는 가장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룬 단편소설을 결산하기 위해 세계적인 명성의 작가들에게 특별한 질문을 했다. <파리 리뷰>가 지난 반세기 동안 발표한 단편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하나를 고르고 왜 그 소설을 탁월하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그중 열다섯 명의 작가들이 선택한 작품을 뽑아 만든 단편 선집이다. 어떤 작가는 고전을 골랐으며, 어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소설을 골랐다.
 
원제 'Object Lessons'는 '실물 교육'이라는 뜻이다. 이 책에는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단편소설의 정수이자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 열다섯 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타임>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문학잡지'라고 부른 <파리 리뷰>는 1953년 창간한 이래 70여 년 동안 젊은 작가의 등용문이자 작가들이 새로운 스타일을 탐구하는 문학의 '실험실' 역할을 맡아왔다. 작가의 경력이나 출신국, 성별,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포괄적이고 과감한 편집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레이먼드 카버, 제임스 설터처럼 국내에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한 작가도 있지만, 나머지는 국내에 번역 출판된 책이 아주 적거나 아예 소개된 적이 없는 작가가 대부분이다.
 
데니스 존슨의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는 "불행 앞에 선 인간은 한낱 인간일 뿐이며 누구도 신이 될 수 없음을" 위태로운 문장으로 보여준다. 조이 윌리엄스의 <어렴풋한 시간>은 불운을 겪은 어느 소년의 쓸쓸한 내면을 "귓가에 내내 속삭이는 듯한" 섬세한 묘사로 들려주며, 제인 볼스의 <에미 무어의 일기>는 "그저 술병을 들고 의자에 앉는 간단한 몸짓의 묘사만으로" 우리를 슬픔에 빠뜨린다. 노먼 러시의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가진 공포가 역사와 사회에 얼마큼 영향을 미쳤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스티븐 밀하우저의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읽고 나면 "누구나 가슴 한쪽에 간직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어느 여름날의 기억을 소환"하게 된다.
 
다채로운 소설들을 읽다 보면 이야기를 쓰는 방식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좋은 이야기에는 규칙도, 한계도, 절대적인 진리도 없다. 뛰어난 작가는 모두 자신만의 규칙과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각 단편에는 세계적인 작가들의 해제가 있어 '공부가 되는 읽기'를 할 수 있다. '사계절 4부작'(《가을》, 《겨울》, 《봄》, 《여름》)으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른 앨리 스미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제프리 유제니디스, 맨부커 국제상 수상자인 리디아 데이비스, 워쇼스키 자매의 영화와 드라마의 각본가이자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꼽히는 알렉산다르 헤몬 등 굵직한 성취를 이룬 작가들이 참여했다. 장르의 대가들이 그 소설을 가장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이유를 서술한 해제를 통해 독자는 문학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탐구할 수 있다.
 
이 책은 젊은 작가들에게,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에게 신선한 영감을 줄 것이다. 소설의 형식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문학이 얼마나 큰 즐거움을 안겨주는지를 느끼게 한다.

 

 

[유여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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