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삶의 밀도 [드라마/예능]

글 입력 2021.10.13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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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글즈(MBN), 환승연애(TVING), 체인지데이즈(카카오TV)는 2021년 5월부터 10월 사이 OTT 플랫폼에서 유통되며 큰 인기를 끈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나는 이 작품들을 모두 챙겨 보았는데 이상하게 ‘몰래’, ‘숨어서’ 보게 되었다. 헤테로 연애지상주의 문화를 답습하는 이런 프로들이 시대착오적이고, 심지어는 이미 끝난 유행의 촌스러운 되풀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20대 여성들 사이에서 ‘4B(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성관계를 뜻하는 신조어)‘가 유행할 만큼 연애와 결혼에 회의적인 사회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대중들의 반응은 싸늘하지 않을까 감히 예측했다. 하지만 아뿔싸, 이 작품들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변 20대 여성, 남성 친구들, 심지어 40대인 우리 엄마와 엄마 친구들 사이에서도 매주 챙겨봐야 할 프로그램으로 등극했다.

 

2021년 하반기를 강타한 본 예능의 매력은 단순히 자극적인 설정일까?

 

2011년 방영을 시작하며 선풍적 인기를 끈 짝(SBS)부터 2017년 방영을 시작해 시즌3까지 제작된 하트시그널(채널A)까지 기존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는 ‘짝을 찾는 것’이 프로그램 각자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다음 세 작품에는 보다 자극적인 설정이 가미된 것이 사실이다. 돌싱글즈는 이혼 남녀의 데이트와 동거를 다룬다. 환승연애는 결별 남녀가 모여 살며 지나간 사랑을 되짚고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체인지데이즈는 헤어질 위기의 세 커플이 기존 연인, 그리고 새로운 사람과 데이트를 한다.

 

그러나 내가 이 작품들을 끝까지 볼 수 있었던 매력 요소는 단순히 ‘자극’이 아니었다. 그럼 무엇이었을까?

 

 

 

편견을 비껴가다


 

앞서 20대 여성 사이 유행하는 ‘4B’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이제 우리 사회에는 결혼도, 연애도 디폴트가 아니다. 결혼하고 잘 사는 것도, 연애하며 싸우지 않고 행복하기만 한 것도 물론 디폴트값이 아니다. 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균열과 이별, 사랑의 실패 혹은 사랑의 결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짝과 하트시그널에서는 남녀가 만나, 이성애적 규범 안에서 사랑을 시작하는 일 자체에 로맨스 서사를 부여하였다. 물론 위의 세 프로그램 또한 로맨스 서사를 백분 활용하지만, 사랑의 시작뿐 아니라 이별도 프로그램의 주요 소재가 된다. 사랑을 로맨스적 개념으로 한정하는 대신 연인 사이의 갈등과 언어화할 수 없는 다층적 감정을 두루 포괄한다. 그것이 일상적 사랑, 연애의 형태다. ‘미끄러짐의 가능성’과 ‘불완전함’을 보여주고, 어떤 관계의 국면도 편견적 시선으로 보지 않고, 긍정한다.

 

그렇다면 이 프로그램들은 어떻게 편견을 비껴나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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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글즈>를 먼저 보자. <돌싱글즈> 1화에서는 “돌싱이라고 하면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출연진들 사이에 오간다. 하지만 돌싱을 대상으로 한 연애 리얼리티가 방영된다는 사실만으로 ‘돌싱’, 싱글맘, 싱글대디가 더 이상 연애, 결혼을 하지 못할 사람들로 치부되던 기존 고정관념에서 탈출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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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은 주로 연애가 끝난 이후, 곧바로 새로운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붙는 꼬리표와 같은 단어였다. 환승을 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오래된 관례다. 하지만 <환승연애>에서 사용되는 ‘환승’이란 단어는 그 의미가 좀 다르다. <환승연애>의 환승은 끝맺음을 위한 선택, 새로운 시작을 위한 선택으로서 그 의미가 확대되고, 긍정적 지점을 내포하게 된다. 연애기간이 길든, 짧았든 연애가 끝난 이후 새로운 사람에게 설렘을 느끼는 것, 탐색하는 것은 자유다. <환승연애>의 ‘보현’은 ‘호민’과 이별한지 삼 개월이 지난 뒤 ‘민재’에게 느끼는 새로운 설렘에 묘한 부채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환승’이란 단어에 숨은 기제가 작동했을 것이다. 프로그램의 결말로서 보현의 환승은 ‘갈아탐’의 의미보다는 ‘새로운 길’의 의미가 부각 된다. 환승은 기존의 부정적 의미를 벗고,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출연진들의 선택 또한 존중받는다.

 

시청자들의 뿌리 깊은 고정관념으로서의 연애와 관계는 그 힘을 잃었다. 디폴트를 넘어선 다양한 관계에 대한 상상력으로 사랑에 대해 보여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는 흐려졌다. 퀴어의 연애, 폴리아모리 연애 등 우리는 다양한 관계의 형태를 일상적으로 접한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연애 행위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들을 쉽게 이해하고, 그들의 연애가 우리의 사랑과 다르지 않음도 쉽게 받아들인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다


 

<짝>과 <하트시그널>의 경우, 시청자들은 출연진의 편집된 방송 속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제한된 시공간 속 출연진 각자의 감정선과 행동들을 따라가다 보면, 시청자 자신들이 출연자들 각자보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로맨스 사건의 양상을 더 잘 파악하고 있다는 착각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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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위 세 작품은 어떠한가. 이전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는 언급조차 금기시되었던 과거 연애 경력, 심지어는 결혼 경력까지 시청자들에게 드러낸다. <환승연애>의 경우 출연진 각자의 속마음 인터뷰 장면이 빈번히 삽입된다. 인터뷰 내용은 현재의 감정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과거에 고여 있는 감정과 사건을 들춰낸다. 시청자들은 파편적인 그들의 과거 정보만 접하게 되고, 그래서 형성된 공백의 공간에 시청자들 스스로 본인, 혹은 주변의 연애 스토리를 삽입해 공백을 메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출연진들의 과거 연애 이력은 이제 출연진들만의 것이 아니라 시청자들의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시청자들도, 방송에 출연하는 출연진들도 인류애적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품어준다. 시청자들에게 출연진들의 과거는 어쩌면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 이들의 과거부터 방송 이후의 시간과 시청자들의 시간은 뗄 수 없는 끈으로 묶여 있다. 아픔과 슬픔을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비난이 향하는 곳은 출연진 개개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거나 과거의 후회스러운 경험이다. 그러니까 비난은 흩어져 버리고, 남는 것은 무한한 응원과 공감 뿐이다. 출연진들 각자의 고민의 흔적과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막을 내릴 때까지의 역경의 시간, 그들이 언어화해준 혼란한 감정들에 심지어 감사함을 느끼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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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연애와 사랑을 경험해온 본 프로그램의 출연진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다투고, 기싸움을 펼치는 대신 위로하고, 안아준다. 이들은 누구보다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는 지지자의 자리에 착석한다. 이들에게는 당장 ‘짝을 찾는 일’보다 과거를 매듭짓고, 현재를 살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이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사랑의 쟁취에 그 중점을 두지 않는다. 사랑하며 사는 일에 대해, 그러니까 결국 삶에 대해 말한다.

 

 

 

사랑에 대해, 삶에 대해


 

사실 이미 시청자들은 친근한 연애 이야기를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에서 발견하길 고대해왔는지 모른다. ‘로맨스가 필요해’, ‘또 오해영’. ‘연애의 발견’ 등의 멜로 드라마가 여러 멜로 드라마 중에서도 유난히 시청자들 사이에서 오래 회자 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네 현실 연애의 단면과 참 닮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나간 연애는 다 비슷비슷하게 기억되는지 모른다. 만나고, 서로가 서로의 삶 전체가 되고, 영원할 거라 생각하고, 근데 서운해하고, 서운해하고, 서운해하다 누구 하나의 마음이 식거나, 누구 하나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겨 끝을 내고, 오래 오래 괴로워하고, 어찌어찌 극복하는 것. 경험 없고, 그래서 미숙하고, 아픈, 그런 게 지난 연애의 전부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사랑에서 오는 방황과 혼란은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패와 성공에 대해 따지는 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실패를 겪어내면서 우리의 삶이 깊어지는 것, 그것이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전부일지 모른다.

 

이제 시청자들은 사랑을 환상 안에 가둬두는 대신 삶 쪽으로 끌어온다. 사랑에서 비롯된 감정의 격동, 그런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을 보고 싶고, 말하고 싶어 한다. 날 것의 감정, 어쩌면 언제까지고 이해되거나 해석될 수 없는 감정이 각각의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기록된다. 시청자들은 지난 연애를 용기 내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 미숙함에, 무한한 설레임과 처음 느껴보는 슬픔과 다층적 감정의 늪 앞에 한참을 멈춰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시청자들이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본 것은 밀도 있는 삶 그 자체였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짙은 마음의 단면이다.

 

 
[최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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