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고래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도서]

글 입력 2021.09.2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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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 속에 숨겨진 생각


 

몇 주 전, 코엑스 아쿠아리움을 갔다. 어린 시절에 가봤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선 처음이었다. 친구와 약속이 잡히고서도 망설였다. 이걸 가는 게 맞을까. 동물원이든 아쿠아리움이든 동물을 좁은 공간에 가두어 놓고 그들의 자유를 인간의 즐거움으로 교환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건 직접 보고서야 얻는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일, 적어도 내 주변의 일처럼 느껴져야 작은 움직임이라도 생길 것을 아니까.


내부는 예상대로였다. 하프 모양 수조에 들어간 두 마리의 물고기를 보았을 때, 그 좁고 불편한 모양새 때문에 어찌나 놀랐던지. 얄팍한 기둥이 전부인 삶. 물고기, 해파리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다람쥐였는데, 짤막한 터널 하나를 쳇바퀴처럼 오가던 모습이 생경하다. 까르륵 웃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한 네 시쯤 되었을 거다. 한 유리창에 사람들이 몰렸다. 찰칵이는 소리와 탄성 따위를 따라가고 보니, 프레리도그의 먹이 시간이었다. 상어, 가오리, 비버 등에 사육사들이 먹이를 주는 것이 일종의 프로그램이었다. 양손에 당근을 쥐고 끊임없이 볼을 우물대는 프레리도그를 보며 나도 어느새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먹이 시간이 끝나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누군가는 거북이를 보러, 누군가는 상어를 보러, 누군가는 가오리를 보러. 그러니까, 사람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이기적이다. 제 눈에 보기 괴로운 것은 나쁘다고 평하면서, `귀여운` 것을 보면 그 동물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별로 개의치 않아 한다.


『고래가 가는 곳』의 저자 리베카 긱스가 기술한 일화에도 비슷한 모습이 나온다. 해안으로 다가온 새끼 돌고래를 사람들이 귀여워하며 올라타고, 만지고, 아껴주는 바람에 그 돌고래가 죽음을 맞이했다. 과연 돌고래를 직접 만진 사람들의 탓일까? 그들의 모습이 일반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길거리에 있는 고양이를 귀여워하며 음식을 주고, 친해지려 하고, 그래서 사람 손을 타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사람 냄새가 묻은 고양이는 더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리베카 긱스는 문화 이론가 시안 나이의 말을 인용한다. 귀여움은 `다정하게 돌봐주고 싶은 감정뿐 아니라 추악한 혹은 공격적인 감정도 유발한다`라고. 즉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지배하고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 것이다. 어떤 생물체가 나를 기다리고, 나를 따르고, 나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자극. 물론 좋은 마음으로 길에 사는 고양이들을 돌본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 `좋음`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혹은 누구를 더 위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싶진 않다. 인간은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생물 아닌가. 세상은 보이지 않는 인터넷망으로 아주 촘촘하게 연결되어있고, SNS가 미치는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온라인과 아예 장벽을 쌓으면 될까. 이미 길가에 나가면 보이는 사람들, 문구, 광고 등은 SNS를 타고 나온 것이다. 선후 관계없이 마구잡이로 밀려오는 생각, 의견, 가치관, 정보, 취향에서 어떻게 나만의 것을 찾겠는가.

 

 

너무나 접촉을 갈구해서 사랑하는 존재를 질식시켜 버린 것이다. 이런 난폭한 사랑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간 속에 있는 동물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 중에서 어느 것이 그런 사랑을 불러일으켰을까?

 

p.193

 

 

인간은 지독히 인간적이다. 그래서 인간을 중심에 두고,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우리의 `경쟁자`는 다른 인간이지 다른 동물은 아니지 않나. 위협이 전혀 되지 않는, 관계없는 생물이니 바운더리 밖으로 내쫓은 것이다. 대신 그 생물들을 귀여워하고, 아끼고, 사랑한다. 그러다가 중요한 사실을 놓친다. 동물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서로 영원히 모를 존재다. 이때 필요한 건 거리다.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의 환경 내에서, 그들이 알아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


 

 

고래 하나의 죽음


 

 

거대한 동물은 즉시 죽지 않는다. 우선 일부만 죽는다.

 

p.16

 

 

고래가 하는 일은 그 크기만큼이나 많다. 고래의 몸은 두꺼운 지방층인 블러버로 이루어졌는데, 이곳에 인간의 모든 흔적이 담긴다. 살충제 원료, 중금속, 독성 물질 등이 말이다. 유해물의 농도가 옅다고 해도 고래가 살아가는 내내 양이 축적된다고 생각하면 가벼이 여기기 어렵다. 리베카 긱스의 말대로 `생명체 자체를 오염원으로 보는 것은 우려스럽고 유례없는 현상이다.`


여기에 고래의 코도 마찬가지다. 고래는 호흡을 하려고 수면 위로 올라와, 코를 내밀고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때 카드뮴, 크롬, 니켈 같은 발암 물질도 함께 들어온다. 웅장한 몸짓으로 헤엄치는 고래가 오염된 덩어리라니. 그나마 다행인 건 평소에는 이 물질들이 블러버 층에서 나오지 않고 비활성 되었다는 점이다. 바다에 있는 먹잇감들이 풍부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듯이 바다 생태계도 붕괴 중이다. 이렇게 먹잇감이 없어진 상황에서는 지방 덩어리인 블러버 층을 분해한다. 이 케토시스 상태로 돌입하면, 오염 물질이 고래의 혈관 속으로 빼곡히 들어찬다.


 

지난 50여 년 동안 지구 온난화의 90퍼센트는 바다에 집중되어 진행되었다.

 


이제 이 커다란 생물이 해변이 아닌 물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바다생물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거대한 몸이 가라앉으며 부패가 시작된다. 이 과정을 `고래 낙하`라고 부른다. 가장 먼저 찾아온 손님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생물이다. 물고기, 꽃게, 바닷새, 상어. `사체 처리반`이라 불리는 스캐빈저들은 고래의 아래쪽, 썩은 부위를 해치운다.


시간이 흐르고, 해저 끝까지 내려간 몸뚱이는 광합성이 가능한 해수 표면 200m 아래 해역으로, 거기서 더 깊이 내려가, 빛 한 점 들지 않는 영역까지 닿는다. 먹장어, 옆새우, 환형동물 등이 모여들어 식사한다. 이렇게 몇백 가지의 생물체들이 고래 덕분에 배를 불린다. 살아서는 나무 1천 그루 이상의 탄소 흡수를, 죽어서는 다른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을 돕는다. 그런데 그 몸뚱이가 인간이 생산한 온갖 오염 물질 덩어리로 전락하는 상황이 애처로울 뿐이다.


귀엽고, 보기 좋고, 편한 것만 취하는 우리 인간들이지만, 분명 다른 방향을 상상하고, 실행하고, 해결할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쳐두던 문제가 이제 바다가 아니라 일상에도 들이닥친다. 인간 중심적 사고가 개인만의 잘못은 아니었듯 다채로운 손길, 그러니까 전체 집단의 움직임이 필요할 것이다.

 

 

고래는 자신의 비극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보라고 충고하고 있지는 않은가?

 

p.34

 

 

고래가가는곳_입체.jpg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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