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600초의 세계: 인디애니페스트2021

연흔/RIPPLE (2021), 0:07:16, 2D Computer, Korea.
글 입력 2021.09.1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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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애니메이션이라고?"


 

소싯적 독립영화와 같은 비상업 영화를 곧잘 보긴 했다. 그런데 '독립Indie애니메이션'이라니. 처음 <인디애니페스트2021> 홍보 포스터를 보았을 때는 다 제쳐두고 우선 의구심이 앞섰다. 그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도 그럴 것이 필자가 봐왔던 모든 애니메이션들은 DVD로 발매 가능한 분량의 2시간짜리 만화 영화였거나 TV 방송국과 함께 제작에 들어가는 시리즈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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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의 서사가 온전하게 전달되려면 최소 60분 이상의 러닝타임 혹은 20분씩 12화 정도의 분량속칭 '1쿨'이 필요하다. 관객들이 인물을 눈에 익히고 작품의 세계관을 충분히 습득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영화 연출팀과 달리, 애니메이션 연출팀은 본인들이 손으로 직접 '그려서' 장면을 연출해야 한다. 따라서 보통 애니메이션은 최소 10명 이상의 작화팀과 음향 감독 등의 각종 기술자들이 수 개월을 매달려 하나의 서사를 완성한다.

 

그런데 이 과정을 상업 자본 없이 진행할 수 있다고? 심지어 내가 예매한 '새벽비행' 부문의 소개글을 살펴보니 대학생 애니메이터들이 경쟁하는 분야였다. 필자는 반신반의하며 영화관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당일 받아본 팸플릿을 보니 출품작들의 러닝타임은 대부분 10분을 넘기지 못했다. 나는 뿌리 깊은 의심을 품고 스크린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600초의 세계


 


도대체 600초 안에 

무슨 서사를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솔직히 필자의 눈이 너무 높았다. 대부분의 출품작들은 밥 먹고 그림만 그리는 일본 프로 작화팀에 길들여진 나의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했다.사실 이것은 연출가들이 잘못한 것이라기보다는 '인디', '아마추어'라는 환경적 요인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나는 단순히 러닝타임이 길다고 해서 서사를 이해하기가 쉬워지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일례로 관람자들이 인물을 파악하기도 전에 세기말 로맨스적 대사와 작붕을 남발하던 한 작품이 러닝타임 10분을 돌파하던 그 순간에, 나는 차라리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벽비행 2 상영작 중 마음에 쏙 드는 한 작품을 만났다. 바로 '연흔(Ripple)'이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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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흔 / RIPPLE (2021), 0:07:16, 2D Computer. ⓒ팀 Yaza


 

요즘 대중 타겟의 애니메이션 시장에서는 디즈니풍 3D 애니메이션이 대세라던데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듯하다. 나는 여전히 얇은 선으로 이루어진 지브리풍 2D 애니메이션이 좋다. 그리고 오세미 감독의 <연흔>은 내 취향을 모두 빼다 박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아무런 언어적 설명 없이도 600초도 안 되는 러닝타임 안에  필자가 주제, 인물, 서사를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

주의!

<연흔 / RIPPLE>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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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흔 / RIPPLE (2021), 0:07:16, 2D Computer. ⓒ팀 Yaza

 

 

<연흔>은 타 출품작들과는 달리 그 도입부에서 작품의 모든 설정을 납득시킨다. 우선 한 소녀가 모노노케 히메를 연상시키는 판초를 입고 등장한다. 소녀는 폐허가 된 사막의 어느 마을을 돌아다니며 벽화를 수집한다. 그녀가 손바닥을 대면 벽화가 스스로 움직여 그녀의 수첩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여러 벽화를 수첩에 담던 소녀는 어느 강아지 그림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첩에 담으려 하는데, 강아지 그림은 쉬이 잡히지 않고 오히려 마을 내부로 그녀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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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흔 / RIPPLE (2021), 0:07:16, 2D Computer. ⓒ팀 Yaza

 

 

강아지 그림을 쫓던 소녀는 시간을 거슬러 폐허가 되기 이전의 마을에 도달하게 되는데, 스틸컷이 없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로 이를 연출해내는 작화팀의 실력이 정말 수준급이다. 태양 아래 유적지의 화사한 색감들을 모두 살리면서 기하학적인 도형들로 이루어진 검은색 돌 거인들이 일렬로 줄을 서 소녀를 안내하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다. 이후 소녀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하울의 과거 씬을 연상케 하는 '검게 처리된 영역'을 넘어간다.


필자는 <연흔>에서 지브리 스튜디오의 여러 애니메이션을 떠올릴 수 있어 즐거웠다. 오세미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필자는 '고대 유적'과 같은 소재 자체도 천공의 성 라퓨타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전쟁'의 유해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그 피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상의 확고한 주제 의식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다.

 

겨우 7분 남짓한 영상에 탄탄한 서사와 수준급의 작화 및 장면 구도, 형형색색의 색감을 모두 담았다는 점은 <연흔>의 매우 큰 매력 포인트다. 하지만 필자가 무엇보다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주인공이 정확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연출가들이 이 작품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가를 그 어떤 작품들보다 명료하게 전달했다는 점이다. 짧은 시간 안에 깊은 세계관을 그리려고 분투하는 인디 애니메이션의 연출이 불친절해서 힘들었던 사람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작품을 권하고 싶다.

 

 


600초,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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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만화와 그림을 좋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랐고, 그들 중 일부는 현재 실제로 미술 계열을 전공하고 있다. 포켓몬스터로 시작해 나루토를 거쳐 하울의 움직이는 성, 진격의 거인까지 참 다양한 장르의 애니메이션을 봤다. 나열한 작품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곰곰이 되짚어보면 일본 애니메이션 그 특유의 판타지 세계관과 평면적 그림체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주식으로 섭취하던 시절은 지나왔으나, 넷플릭스 추천에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등장하면 가끔 구미가 당긴다. 이렇듯 애니메이션에 대한 아련한 순정(?)을 가진 필자가 <인디애니페스트2021> 홍보 포스터에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작품이 대부분이었고, 주제를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작품들도 많았다. 하지만 필자는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그림체는 취향의 영역이기도 하고, 프로 애니메이터 10여 명이 손을 맞대고 몇 개월을 준비해야 만들 수 있는 서사와 완성도를 필자와 같은 대학교 재학생 4~5인 팀에게 바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상영회를 계기로 필자는 인디 애니메이션 연출가들이 앞으로 주어진 600초 안에 본인만의 고유한 세계를 더 '명료하게', 그것이 힘들다면 '확고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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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애니페스타2021 공식 트위터

 

 

** p.s. 글을 마친 후 검색해 보니 <연흔>이 새벽비행부문에서 최종 수상했다고 한다. 이 리뷰를 빌려 오세미 감독과 팀 Yaza 측에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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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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