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기 그리고 지금의 음악 -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공연]

글 입력 2021.09.09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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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기][크기변환]포스터(최종)_람메르무어의루치아.jpg

 

지난주, 세계에 널리 이름을 알린 오케스트라 ‘세종솔로이스츠’를 만나고 왔다. 세종솔로이스츠는 2017년부터 ‘힉엣눙크! 페스티벌’이라는 음악 축제를 선보였다. 나는 그중, 콘서트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관람했다. 세종솔이스츠와 함께 손꼽히는 메트 오페라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유명 솔리스트들까지 화려한 출연진을 자랑했다. 다채롭고, 정교한 연주는 물론이었다.


말 그대로 다양한 매력을 곳곳에 지닌 축제였다. 하지만 미리 밝히자면, 나는 클래식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 거의 아는 게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공연에 호기심이 생기고, 직접 방문해보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축제의 이름이었다.

 


HIT ET NUNC (힉엣눙크)

 

어떤 의미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 낯선 외국어이지만,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졌다. 피로도가 높아진 요즘, 낯선 음악이 주는 좋은 기운을 받고 싶었다. 공연 소개 글을 읽어보니 힉엣눙크는 ‘여기 그리고 지금’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였다. 클래식을 잘 모른다고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한 공연이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축제 이름에 담긴 의미처럼 지금 이 순간의 우리가 즐기기 딱 좋은 음악이지 않을까 기대하며 공연을 기다렸다.


나의 부족함 탓에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관람기는 음악적으로 정확하고, 깊이 있는 후기가 되진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로운 장르를 탐험하는 마음으로 공연을 관람하고, 그 속에서 느낀 점을 되돌아보았다. 나의 감상이 정답은 아니더라도, 또 하나의 클래식 감상법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공연을 복기해 보겠다.

 

 

 

비발디와 두 대의 바이올린


 

[꾸미기][크기변환]힉엣눙크_비발디.jpg

 

 

공연장의 계단을 둥글게 따라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조금 뒤, 천천히 객석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쪽 문에서 연주자들이 차례대로 등장했고, 자리에 앉아 악보와 악기를 가다듬었다. 마침내 연주가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마음이 갔던 건 콘서트홀이라는 공간이었다.


내 자리는 2층에 위치했기 때문에 음악이 들려오는 무대를 편안하게 내려다볼 수 있었고, 전체적인 콘서트홀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주로 밴드 공연이나 록 페스티벌을 좋아하는 나에겐 생경한 광경이었다. 그런 공연에선 스탠딩석으로 가서 최대한 아티스트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최대한 앞으로 나아가고, 잘 보이지 않을 땐 까치발을 들었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서 보거나, 돗자리에 앉아 본적도 있지만 무대를 내려다보는 경험은 새로웠다.

 

그래서인지 정교하게 조각된 오르골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콘서트홀의 높은 천장과 일정한 간격으로 탄탄하게 제작된 벽면, 공간이 주는 웅장함이 그 느낌을 더했다. 오르골을 여러 번 되감듯, 관객들의 호응에 시작된 첫 곡은 비발디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라단조, RV.514’였다.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1악장은 자신 있고 당당하게 걷는 두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다는 듯, 자유롭게 음계를 넘나들면서 길을 활보하는 모습이었다. 중간에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나 당황해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곤, 다시 새로운 길을 찾는 이야기 같았다.


이어진 2악장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이야기를 한참 건너뛴 다음 같았고, 미처 보여주지 않은 중간에 슬프고 거역할 수 없는 사건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 어쩐지 축 처진 어깨와 쓸쓸함, 허전함, 애상이 느껴지는 선율이 이어졌다.


3악장에선 다시 슬픔으로부터 헤어 나온 두 사람을 만났다. 3개의 악장 중에 가장 듣기 편안하고 안정감이 느껴졌다. 어려움을 겪은 뒤에 얻은 보람과 행복이 진짜라는 듯이. 반복되는 멜로디를 찾아보면서 음악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보테시니가 그린 풍경


 

[꾸미기][크기변환]힉엣눙크_숲.jpg

 

 

뜨거운 박수로 비발디와 오케스트라에 인사를 전했다. 다음으로 보테시니가 바이올린과 더블 베이스를 위해 만든 ‘그랑 듀오 콘체르탄테’가 이어졌다. 이 날의 공연에서 만난 음악 중, 가장 마음에 와닿은 곡이었다.


사실 클래식 악기를 잘 모르는 나는 바이올린과 더블 베이스가 어떻게 다른지 잘 알지 못했다. 물론 크기부터 큰 차이가 있었지만, 각자 어떤 소리를 들려주는지 집중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과 꼭 닮은 악기들이 함께 만드는 소리만 들어봤다고,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보테시니의 곡은 바이올린과 더블 베이스가 어떤 목소리를 지녔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바이올린은 뾰족하고 예리한 소리를 만들어 냈고, 그 소리에 맞춰 가늘게 눈을 뜨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더블 베이스가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소리로 누구와 함께해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친구 같았다.


두 악기는 이렇게 다르지만, 부드럽게 교차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귀로 들리는 소리의 조화도 좋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두 연주자, 데이비드 챈과 커트 무로키의 팀플레이가 특히 좋았다. 두 사람은 눈을 맞춰 함께 박자를 타고, 음계 위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끝까지 완벽한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는 집중력과 긴장감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둘과 함께 여러 사람들의 연주가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하나의 풍경이 떠올랐다. 봄이 찾아온 풀빛 숲속, 아침의 이슬이 채 사라지기 전에 햇빛이 스며드는 숲속을 달리는 것 같았다. 달리는 곁으로 숲의 동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길을 이끌 듯 앞장서 달린다. 자연이 주는 맑고 생생한 감각이 느껴졌다.

 

 

 

골리호브와 함께 춤을


 

[꾸미기][크기변환]힉엣눙크_탱고.jpg

 

 

이어서 골리호브가 작곡한 ‘마지막 라운드’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매우 다른 독특함에 눈을 크게 뜨게 되는 곡이었다. 기존에 ‘오케스트라’ 하면 떠오르는 음악과는 달랐다. 클래식 음악에 탱고의 맹렬함이 더해진 곡이었다.


골리호브는 반도네온 연주가이자 탱고 작곡가인 피아졸라의 음악을 듣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피아졸라는 탱고라는 춤의 대범한 정서를 반도네온의 들숨과 날숨으로 표현해냈다. 이렇게 존경하고 사모하는 피아졸라가 뇌졸중을 진단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회복을 기원하며 ‘마지막 라운드’를 헌정했다.


피아졸라에 대한 골리호브의 애틋한 정서가 듬뿍 느껴지는 음악이었다. 먼 타국에서 보았던 탱고 공연을 떠올리면서 음악을 감상했다. 절도 있게 화려한 동작을 이어가는 댄서의 모습, 단호하면서 강렬한 표정과 원색의 의상이 기억났다. 탱고의 카리스마를 클래식 악기로 들어보는 건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도니체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크기변환]오페라.jpg

 

 

잠시 휴식 시간 동안 지난 공연에 대한 감상을 차분히 내려놓았다. 공연 제목을 따온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소프라노 캐슬린 킴의 노래가 함께했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소설가 월터 스콧의 <래머무어의 신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곡이다. 주인공 루치아는 가문을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루치아는 따로 사랑하는 이, 에드가르도가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에드가르도는 루치아의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상처받은 루치아는 결국 미쳐버리고, 정략결혼의 상대인 아르투로를 살해하려 한다.


소설의 줄거리만 보았을 때보다, 캐슬린 킴의 목소리로 들었을 때 루치아의 감정 변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에드가르도에게 사랑을 말하는 루치아, 캐슬린 킴의 목소리엔 간절함이 느껴졌다. 간절한 호소에도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없자 정신이 혼미해져 버리는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광란의 장면(Mad Scene)’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캐슬린 킴은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느껴지는 매우 높은 음역대를 완벽하게 노래했다. 공연 팸플릿에서 윤무진 칼럼니스트가 전한 말이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잘 설명해 준다. ‘여기서 광란은 음습하거나 악마적인 분위기로 묘사되지 않는다. 작곡가가 남긴 음표를 성악가가 훌륭하게 처리했을 때, 청중은 비로소 루치아가 완전히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종솔로이스츠의 ‘힉엣눙크! 페스티벌’을 통해 클래식을 좀 더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또 교과서적인 정답이 아니더라도, 나의 방식으로 감상하며 클래식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롭게 펼쳐진 클래식의 세계를 천천히 음미하며 걸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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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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