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앞날에 대한 기대가 없던 나에게,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다 - 파과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9.02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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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이야기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노인의 모습으로 지하철에 앉아 있는 주인공 '조각(爪角)'의 시선으로부터 시작한다. 조각은 가만히 있던 젊은 여성에게 다짜고짜 폭언을 하고, 심지어는 그를 건드리기까지 하는 중년 남성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 중년 남성은 곧 목숨을 잃는다. 예상했겠지만 조각의 범행은 맞으나, 그 여성을 괴롭힌 것에 대한 보복은 아니다. 그저 조각이 해야 할 일. 방역을 했을 뿐이다.


 

그녀는 행동이나 장신구 하나까지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모든 일의 첫 걸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소란에 끼어들지 않은 것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얼굴을 위로 하여 몸을 돌렸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등 뒤 가죽 재킷에 깨끗하게 그어진 칼자국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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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저자 구병모

 

출판 위즈덤하우스

 

출간 2018.04.16

 

책 소개

40여 년간 날카롭고 냉혹하게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爪角)'. 몸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게 삐걱거리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노화와 쇠잔의 과정을 겪으며 조각은 새삼스레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게 된다.

 

소멸의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허물어지고 있는 모든 것,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연민을 느끼며, 조각의 마음속에 어느새 지키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파과>는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찬사다.

 



 

 

60대 여성 킬러 '조각'의 이야기라고 했을 때, 사실 이런 내용을 상상하며 읽지는 않았다. 기대하는 내용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그저 흔히 볼 수 없는 주인공이 나이와 성별을 극복하고 어떻게 킬러로 살아가는가를 보여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파과>는 조각의 행동보다 조각의 감정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이다. 즉 세월의 흐름으로 맞이하게 된 여러 변화를 어떻게 조각이 받아들이는가를 비춘다.


 
"너도 나도, 지켜야 할 건 이제 만들지 말자."
 


지켜야 할 것. 생에 큰 미련이 없는, 그저 죽지 않기에 살고 나에게 주어지는 일이 있기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지켜야 할 무언가'가 생기면 거기서부터 평화로웠던 삶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어쩌면 클리셰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이 설정이 파과에도 등장한다.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던 류는 조각을 지켜주었고, 류가 떠난 후로도 그 말을 곱씹던 조각은 강 박사의 가족을 지키고자 한다.

 

조각이 강 박사에게 가진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마 성애적 감정까지는 아닌 것 같다. 어찌 보면 호기심을 좋아하는 감정으로 착각한 것도 같다. 그러나 마냥 호기심뿐이라고 하기에는 또 애매한.


명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써는 복잡하게 얽힌 감정들이 결국 사랑으로 나타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왠지 계속 보고 싶고, 궁금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가족까지 마음에 담아버리는 조각의 모습이 그의 인간미를 가장 잘 보여준 부분이 아닌가 싶다.

 

*

 

이쯤에서 조각의 '인간미'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 사실 청부살인을 쥐나 벌레를 잡아내는 '방역'이라 칭하며, 방역 대상의 남은 가족에 대해 그 어떤 느낌도 가져본 적 없다는 킬러에게 인간미 혹은 다정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좀 기이하기는 하다.


그럼에도 조각은 꽤 따뜻한 사람처럼 보였다. 조각 자신은 나이가 들어 이전엔 없던 연민이라는 게 생기나 하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노화의 결과로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우선 조각은 소위 말하는 '꼰대'가 아니다.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그를 다정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건 놀라운 일이지만. 또한, 누군가 선뜻 데려가지 않을 것 같은 외모를 지닌 강아지 '무용'을 거두어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챙긴다. 물론 킬러가 아닌 내 기준에서 조각은 견주로서 꽝이나, 그에게 무용이 지키고 싶은 존재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조각의 이 다정함이 투우와의 기묘한 관계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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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우의 행동 또한 돌이켜보면 무척 인간적이다. 투우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조각에게 적개심이나 복수심 같은 감정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조각에게 보복하기 위해 방역업자가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 또한 있다. 투우는 그냥 '어쩌다 보니' 방역업에 발을 들인 것이다.


어쩌다 보니라고 말하면서도 조각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임을 안 이후로 사사건건 조각에게 시비를 걸고 그를 쫓으며, 종국에는 조각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투우 또한 강 박사에게 조각이 가졌던 마음과 마찬가지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움, 실망, 동경, 분노 그리고 조각의 관심을 갖고 싶었던 마음까지 온데 합쳐져 결국 보복 아닌 보복을 한 셈이다. 앞날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이 그저 오늘도 눈을 떴기에 연장을 잡는다던 조각은 투우와 혈투를 벌일 때 적어도 투우가 죽기 전까지는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조각이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강 박사였던 것처럼 투우 또한 조각을 어찌할 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를 삶의 이유로 삼은 듯했다.


즉 조각에 대한 투우의 기억은 '아버지를 죽인 사람'보다 '알약을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시간, 횟수, 복용량까지 맞춰가며 섬세히 약을 빻아주었던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니 투우는 어릴 적 약을 챙겨주었던 그때처럼, 지금도 여전히 조각의 관심이 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많은 어린아이들 모두가 그녀를 찾아 나서지는 못했을 테고, 그 어린아이들 가운데 그녀 옆에서 삶을 내려놓는 경우도 흔치 않을 테니 '됐어.' 투우는 가까이 있는 그녀의 무릎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건드린다.


"머리 좀"

 

 

문장의 호흡이 무척 길고,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꽤 많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이때까지 쉽게 보기 어려웠던 서사이기에 마음에 들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운 표현이 너무나도 많다. 최근에 읽은 책 중 밑줄 친 부분이 가장 많을 정도로.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내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건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 하자면, 나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은 사람들 대부분이 최고로 뽑는 장면 덕에 여운이 두 배는 더 길게 남을 것 같다.


 

희미해지던 양치식물의 냄새가 사라지고 그녀는 투우의 눈을 감긴 다음, 역시 무심코 중얼거린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유소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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