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울의 동쪽 - 한양도성 순성길 ⑴ [공간]

3일 동안, 서울을 한 바퀴 돌다
글 입력 2021.08.28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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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만 되면 침대와 물아일체가 되어 늘어지고 직립 보행은 거의 없이 배와 등만을 굴려 움직인다. 뒹굴뒹굴... 하루 중 밖에 나가야 하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집 밖에 나가면 고생, 에어컨 바람이 극락이다.


집에서 몇 시간째 게임을 즐기고 있던 필자에게 우연히 브로슈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한양도성 스탬프 투어’였다. 군대 가기 전부터 한다 한다 해 놓고 차일피일 게으름을 부려 거의 몇 년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안내문. 보자마자, 오늘 출발해야겠다 싶었다.

 

단출하게 얼음물과 지도만 챙겨서, 바로 집 밖을 나섰다. 충동, 그것이 한양도성 순성길 완주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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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3일(1일 차)

와룡공원 ~ 혜화문 ~ 낙산 ~ 동대문

6.19km, 1시간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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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져 있는 길의 좋은 점은, 내 마음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출발점을 정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필자는 와룡공원으로 정했다. 비교적 낮은, 그리고 예쁜 건물이 모여 있는 성북동의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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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진 대표적인 부촌이다. 대기업 총수부터 연예인, 정치인의 집, 대사관이 여기에 많다. 아름다운 카페, 경치, 서울 어디에서든 쉽게 올 수 있는 접근성 덕분에 휴일이면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동네다.


조금 더 산 쪽으로 올라오면 강파른 산비탈을 따라 다닥다닥 집이 붙어 있는 달동네가 눈에 들어온다. 그 때문에 와룡공원에서 성벽 너머를 바라보면 가까이에 조그마한 집이, 아스라이 멀리 부잣집이 보인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부잣집이든, 가난한 집이든 나무 속에 폭 안겨 올망졸망하게 보인다. 인간이 여러 형태로 자연을 이용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자연이 인간을 품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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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은 스마트폰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산책로이다. 관광 안내 지도 한 장이면 절대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이정표도 잘 되어 있을뿐더러, 바닥에 돋을새김으로 순성길 안내를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만끽하고 싶다면, 과감히 스마트폰을 끄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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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갈 때마다 ‘내가 만약 이 집에 살았었다면,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하는 공상을 자주 하곤 한다.

 

문화재라서 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편견과 달리, 한양도성은 사진처럼 주택 바로 앞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왼쪽에 있는 주택에서 나오는 사람은 사람 키의 몇 곱절이나 되는 우람한 한양도성을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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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문을 지나 돈암동으로 넘어오면 본격적으로 낙산 공원에 접어들게 된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 말고, 순성길 주위의 집들은 산 중턱에 있어 버스는커녕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가는 크기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한참을 올라야 당도할 수 있다.


집 대문에 ‘택배 기사님, 여기까지 올라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에 시원한 미숫가루 타 놨으니 드시고 내려가세요.’라는 안내문이 정겨웠다. 재화를 지불했으니 서비스를 응당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의 안위를 먼저 고려하는 따뜻한 마음은 조선 시대 정이 넘치던 서민의 그것과 퍽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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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대학교를 넘어가는 길에 삼군부 총무당이 있어 들렀다. 총 6년을 성북구에 있는 학교로 다녔는데 총무당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군사 업무를 넘어 조선 최고의 정치 의결 기구가 된 비변사는 1865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혁파된다. 이윽고 군제를 담당하는 삼군부가 부활하는데, 그때 세워진 건물이라고 한다.


불과 200년 전만 하더라도 건물 앞에서 군복을 갖춰 입은 간부와 병사가 훈련을 받았을 총무당 앞이, 지금은 놀이터로 꾸며져 기구를 타고 노는 어린이와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른들이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은 총무당이 오늘날의 국방부 건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뛰어노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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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낙산 공원을 넘어 동대문으로 와 성벽 안쪽 풍경을 보면 아까와는 조금 다르게 빌딩의 마천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하철을 타고 두더지처럼 땅속을 지나다닐 때는 절대 볼 수 없을, 오늘의 서울이 펼쳐진다. 더 가고 싶었지만, 갑자기 무릎이 아파 걷기 힘들 지경에 이르러 동대문까지로 만족해야 했다.


 

2021년 5월 30일(2일차)

동대문 ~ 장충체육관 ~ 남산 ~ 남대문 ~ 서대문 ~ 사직단

11.72km, 2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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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더워지기 전에 일주를 끝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동대문에 나왔다. 청계천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지나 완만한 오르막이 나오기 전, 장충체육관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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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UFO가 착륙한 듯, 조개껍데기 모양의 지붕이 인상 깊었다. 군 시절, 무기력한 삶에 새로이 활력소를 불어넣어 준 배구팀의 홈구장이 저기다. 전역하면 바로 보러 가리라 벼르고 있었는데... 올해는 꼭 사정이 좋아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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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 중에는 성벽 안쪽과 바깥쪽 모두에 길이 있는 경우가 있어,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다. 남산에 본격적으로 오르기 전 준비 운동과도 같은 길에서 필자는 한양도성 안쪽을 선택했다. (여기 한양도성 안쪽은 호텔이 바로 옆에 있어 저녁부터는 통행이 제한된다)

 

버린 선택지에 미련을 가지면 안 되는데 성벽 바깥으로 언뜻 보이는 약수동의 모습은 또 다른 상쾌함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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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갈걸... 싶다가도 만약 그랬더라면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를 부러워했을 터. 서울에 이렇게 조용하고 고즈넉한 숲길이 있다니. 누구나 쉽게 다닐 법한 산책길인데 사람들이 별로 없는 걸 보니, 아는 사람만 애용하는 길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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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을 지나 본격적으로 남산 등반이 시작되었다. 케이블카 아래로 나 있는 널찍한 길을 따라 올라가는 코스는 자주 다녔는데, 숲 사이로 나 있는 나무 계단을 따라 우두커니 서 있는 한양도성을 이정표 삼아 가는 코스는 처음이었다.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따가운 햇볕은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기어코 필자에게 더위를 안겨주고 있었다. 남산이 높지는 않고 필자는 등산을 좋아하지만, 워낙 짧은 거리에 올라가느라 경사가 아주 급하고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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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중턱에 260개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재미있어서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가 올라가다 지쳐 바닥에 손을 짚고 겨우 썼을 세 자리 숫자. 곧 끝날 거로 생각하며 적었겠지. 하지만 숫자는 안타깝게 800번대에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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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올라 남산 타워가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보이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서울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벽이라고는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과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저 돌을 다 운반했을까? 경이로움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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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정말로, 오르기 위해 노력한 딱 그만큼의 감동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남산 정상에 오르며 시야가 탁 트이자, 나무 사이로 감질나게 보이던 서울 전체가 눈앞에 펼쳐졌다. 뙤약볕을 맞으며 땀을 한 바가지를 흘렸던 힘듦이 싹 가시는 듯했다. 지방에서 나고 자라면서 꼭 살고 싶었던 서울의 모습이었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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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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