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달리고 있습니다 [운동]

관성을 깨지 않는 내딛음
글 입력 2021.07.2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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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잘 쓰고 싶었다. 작가가 되고 싶게끔 만드는 문장들이 대부분 소설책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되려면 소설을 쓸 수 있는 정신과 신체가 있어야 할 텐데 내겐 둘 다 없었다. 우선 소설을 쓸 수 있는 몸이라도 만들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중략) 1년 뒤엔 소설을 쓸 줄 모르는 달리기의 고수가 되어 있었다.

 


작년 겨울, 이슬아 에세이의 달리기에 관한 부분을 읽다가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다. ‘소설을 쓸 줄 모르는 달리기의 고수’라는 말이 왜 그렇게나 우스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이든 에세이든 글을 쓰고 싶었던 나에게도 무언가를 쓸 만한 정신과 신체가 둘 다 없다는 사실 하나만은 자명했다. 달리기의 고수라니, 부럽다... 나는 은둔의 고수인데. 갈수록 추위에 취약해지고 있는 데다 모든 것이 귀찮아지는 겨울이면 겨울잠을 자는 곰 마냥 웅크리고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잦았기에, 달리기의 고수라는 말이라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그 자신감이 부러웠다. 그래, 무엇이라도 할 만한 몸을 만들자. 엉금엉금 책을 덮고 운동복을 꺼내 입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달리기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그 이전에도 아름다운 풍경들을 실컷 누리고 싶거나, 몸이 찌뿌둥할 때면 나이키 러닝 앱을 켜 놓고 종종 달리고는 했지만, 꾸준하게 러닝을 한 적은 없었다. 워낙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 재미를 느끼긴 했으나, 프로 작심삼일러에게는 일단 운동할 채비를 하고 밖을 나서는 순간이 고역이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두 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하루 이틀 정도의 짜릿함이면 족했다. 그런 내가 그래도 꾸준히 하루에 몇 킬로라도 뛰기 위해 나간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달리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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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달리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사랑의 온도>라는 드라마에 푹 빠져 있을 때였다.

 

“중간에 쉬면 더 힘들어요! 관성으로 뛰어야 해요!”

 

후끈하고 습한 공기가 스크린 너머까지 전해지는 여름밤, 소박하고 정겨운 옛 건물들이 즐비한 서울의 오래된 동네,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자처하고, 관성으로 뛰라며 두 팔을 요란하게 흔드는 잘생긴 연하남, 선을 지키되 다정스레 주고받던 한옥 거리에서의 땀에 젖은 두 주인공의 대화. 첫 화부터 마음을 빼앗기기 충분했다. 스토리를 차치하고서도 스크린 너머로 전해지는 아련한 여름밤의 공기는 당장 그곳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언젠가는 러닝 동호회에 가입해야지. 당시 하고 있는 운동이 있었기에, 달리기는 ‘언젠가’라는 말로 먼 미래에 부쳐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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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미뤄두었던 달리기라는 것을 슬금슬금 꺼내 볼 기회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찾아왔다. 영화 <중경삼림>에서 자신의 25번째 생일이 오기 몇 분 전까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몸속의 수분을 모두 내보내는 기분이 좋다고 말하는 금성무. 땀인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을 뚝뚝 흘리며 있는 힘을 다해 뛰는 그를 보며 문득, 뛰고 싶다고 생각했다. 두 다리를 움직이는 그 지루한 반복적인 행위가 주는 어떤 성취감이 있는 걸까?


이후로 달리기를 할 무렵 접한 작품들이 드라마 <런온>과 예능 <달리는 사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 회고록이었다. “달릴 때는 뒤에 놓고 온 것들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거든요. 오로지 앞에 있는 것들만 소중해서." 지난 일들에 대한 후회로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을 때면 <런온>의 대사를 떠올리며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뛰었고,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달리는 하루키를 떠올리며 '소설을 쓰지 못하는 달리기의 고수'라도 되어 보고자 하는 나름의 큰 목표를 세워 보기도 했다. 스크린 너머의 후끈한 열기를 느끼며, 카우아이의 북녘 해안의 풍광과 무역풍에 흩날리는 하루키의 머리칼을 떠올리며, 달리기하고 싶다는 열망을 키워갔다.


가성비 낮은 생각들이 진을 쳐서 지금을 살지 못할 때, 감정이 파도처럼 넘실대다 범람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달리기는 그 파도를 막는 방파제 같은 역할을 했다. 두 귀를 가득 채운 음악에 양팔과 다리를 맡기고, 공기 사이를 가르는 바람을 느낄 때, 나의 호흡에 집중하며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 멈추지 않고 달리는 그 순간에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달짜리 흥밋거리에 불과했다. 지루함을 쉽게 느끼는 나는 두 다리를 움직이는 반복적인 행위에 그 이상의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달린다



달리기가 더 이상 재미가 없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달린다.

 

어떤 일을 지속하는 것에 있어서 재미라는 것이 그 성패를 크게 좌우했던 삶을 살아왔다. 달리기를 하며 깨달은 것이지만, 나는 꾸준함이라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게으른 완벽주의라는 말이 그 자체로 어폐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편이지만, 그 말을 제외하고는 게으름과 완벽주의라는 아름다운 합작으로 만들어진 나란 인간을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글쓰기로 예를 들어보자면, 에디터를 하는 동안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거의 전쟁을 치루듯이 글을 썼다. 시간과의 전쟁이자 게으름과의 전쟁, 완벽주의와의 전쟁이었다. 글쓰기는 항상 내가 좋아하던 것이었고, 재미있어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잘 써야 한다는 생각에 있었다. 매주 쓴 글을 나중에 읽어볼 때면, 아쉬운 부분들과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보였고, 시간에 쫓겨 쓴 흔적이 역력한 글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스스로 클릭해서 읽을 수 있는 글들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예전의 글을 읽다 보면 후회에 휩싸이곤 했으니까. 그 후회들은 다음 글은 잘 쓰자는 마음으로 이어졌고, 그 기대에 부합하는 글을 쓰지 못할 때면 나는 계속해서 자책하며 자신을 꾸짖었다. 그때까지는 이것을 채찍질이라고 믿어왔다. 물론, 적당할 때는 그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강박적이라는 것에 있었다. 부담이 생기니 책상 앞에 앉기까지의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고, 그렇게 게으르니 결과는 항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곧 이것은 자기혐오로 이어졌다.


대체로 나는 최악인 내 모습을 말하기 꺼려질 때, 그 상황에서 행할 수 있는 최선을 이야기하는 편이다. 일기를 쓰듯 글을 쓰자며, 꾸준하게 쓰자며 부족한 내 모습을 그럴듯한 해결방안으로 감추려 애를 썼지만, 그 리듬을 유지해 나가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드디어 나만의 방식과 템포를 찾았나 싶다가도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스스로가 정해 둔 목표에 다다르지 못한 내가 너무 미웠다.


글쓰기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이번 학기 시험공부를 할 때가 이것이 극에 달했고, 나는 내가 왜 그러는지 이유도 모르고 미친 듯이 달리기를 했다. 다행히 벼락치기를 한 것에 비해 성적은 꽤 괜찮았다. 성적이 나오자마자 잔뜩 곤두세우고 있던 예민한 가시들이 자취를 감춘 것을 느꼈고, 달리기도 더는 절박하게 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내가 달리기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삶이 아니라 성실한 완료 주의자의 삶이 너무나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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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러닝은 대단한 운동신경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앞으로 내딛는 한 발 한 발에 힘을 주어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 그뿐이다. 완벽하게 눈앞의 미션을 수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성실하게 완료해내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그 성패를 가른다. “중간에 쉬면 더 힘들어요! 관성으로 뛰어야 해요!”<사랑의 온도>에서 남자주인공의 말이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던 이유는, 나는 매번 최선을 다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느라 관성을 깨는 행위를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한 프로젝트를 위해 온 맘 다해 열정을 다한 시간마저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려는 시도에는 품이 든다. 중대한 일을 벌이기 직전 마음을 먹기 위한 시간, 회복을 위한 시간 등이 필요하다.


러닝은 관성을 유지하게 하며, 나의 페이스에 맞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매일같이 뛰다 보면 어떤 날은 평소처럼 뛰었는데도 유난히 힘들 때가 있다. 그날은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날이다. 아직 나는 나를 잘 모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몸에 열이 나거나 어디 한 군데 고장 나지 않는 이상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주제에 나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해서 어느 날은 활짝 웃고 있다가도 뜬금없이 두 눈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당황할 때가 잦았다. 그리고 그랬던 것들은 대부분 원인이 있었다. 그것들을 나는 글을 쓰며 찾아 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달리기와 꽤 닮은 구석이 많다고 생각한다. 관성적으로 되돌아보며 자신의 호흡에 맞추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그러하고, 그렇게 나를 알아가며 자신과 친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 비슷하다. 참, 둘 다 게으름과 매번 고투를 벌이면서도 지속해 나가고 싶다는 것도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슬프지만, 빨간 불에는 급정거하고, 노란 불에는 쉬어 가지 않고 뛰어가는 삶을 살아왔다. 일찍 출발했다면 괜찮았을 텐데, 게으름뱅이의 조금 늦은 출발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감당도 못 할 일을 벌인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그런 사람들은 자의로 두 다리를 움직이는 기쁨 따위는 모른다. 시간에 쫓겨 움직이느라 바쁘고 정신없을 것이다. 더 이상 부담을 안은 글을 쓰고 싶지 않기에 성실한 완료 주의자가 되겠다는 다짐은 쉽게 하지 못하겠다.


다만, 나의 호흡과 페이스를 조절해 나가며 한 발자국이라도 스스로 내딛음에 기뻐하는 삶은 잊지 않고 싶다. 원치 않는 뜀박질과 종종걸음을 하느라 노란 불에 쉬어 가는 것을 잊은 지 오래되었다면, 자신의 속도에 발맞춰 보는 것이 어떨까. 무겁고 지친 발걸음이 아닌, 활기 넘치는 내딛음 속에서 여유와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을 길 위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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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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