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독한 삶의 밸런스게임 [도서/문학]

이소정 작가 <밸런스 게임> - 2021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글 입력 2021.07.2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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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윤은 잔인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불행의 시작은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그날 윤은 마트에서 일하고 있었다. 블랙데이 기간이라 손님이 몰려들어 일손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윤은 퇴근 시간이 넘어서까지 일을 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릴 동안에도 윤은 자신의 아이들이 얌전히 티브이를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만취한 운전자가 만든 사고였다. 그랜저 승용차가 윤의 두 아이 중 한 아이를 덮쳤다. 운전자가 핸들을 조금만 틀었어도 다른 아이가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윤은 한 아이를 떠나보냈고, 남겨진 아이는 동생을 잃었다.

 

 

 

#1



남겨진 아이의 이름은 건희였다.


건희는 동생을 잃은 후 문제아로 변했다. 건희가 사고를 칠 때마다 담임 선생님은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담임은 윤에게 학교에 오셔야 하는 이유를 말해 주었다. 건희가 다른 아이에게 짓궂은 장난을 했거나 비싼 물건을 훔쳤거나 하는 이유였다. 어느 금요일 오후에도 담임은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엔 윤에게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학교에서 윤이 만난 사람은 담임이 아닌 교장 선생님이었다. 교장은 담임이 급한 용무로 부재중이라는 말을 한 후, 건희가 토끼 사육장에 개를 풀었다는 사실을 윤에게 전한다.


교장은 윤을 토끼 사육장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훈계하듯 말한다. 토끼들이 죽어간 사육장에서 윤은 죽은 자신의 아이를 떠올린다. 윤은 도망치듯 학교를 나오며 건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2


 

집으로 가던 중 윤은 담임과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을 만난다. 여학생은 담임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며 자신이 죽어버릴 것이라 말한다. 담임은 그녀를 말리고, 둘의 실랑이는 계속된다.


실랑이가 끝나자 여학생은 뜬금없이 담임에게 밸런스 게임을 제안한다.

 

 

"우리 밸런스 게임해요."

 

종잡을 수 없는 여자아이. 남자는 못 말리겟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둘은 서로의 눈물을 닦아 주고 웃었다.

 

....

 

"자, 마지막! 뽀뽀하기? 뽀뽀 받기?"

 

"그건..... 둘 다."

 

그 말이 신호처럼 둘은 입을 맞췄다. 윤은 고개를 돌렸다.

 

"우리 조금만 더 용기를 내자."

 

윤은 놀랐다. 용기를 내자는 말에 이토록 반응하는 자신이, 그럼에도 그 말이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누군가에게 던지는 말랑한 위로이자 스스로에게 하는 단단한 다짐 같은 그 말을 윤은 자신의 딱딱한 혀 위에 한동안 올려만 두었다.

 

 

 

#3



집으로 돌아온 윤에게 먼저 말을 건 쪽은 건희였다. 건희는 자신이 죽지 않아서 다행인지 묻는다. 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건희는 질문 하나를 덧붙인다.


 

"만약 둘 중에 누구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를 선택할 거예요?"

 

가장 나쁜 것과 가장 나쁜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지독한 밸런스 게임 같았다. 게임의 공식은 둘 중 어느 것도 쉽게 고를 수 없도록 밸런스를 적절하게 맞추는 것이었다. 윤은 균형을 잃은 것처럼 잠시 어지러웠다.

 

 

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날 이후 윤은 종종 담임과 여학생의 대화를 떠올린다. 자신도 이들처럼 용기를 낼 수 있을지 생각한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고 윤과 건희는 장마를 맞이한다.

 

 

 

#4



지독한 삶의 밸런스 게임 속에서 윤은 선택하기보단 선택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사고가 발생한 것은 물론이고, 살아남은 아이가 건희인 것도 윤의 선택이 아니었다.


둘 중에 살아남을 사람을 선택한다면 자신을 고를 건지 묻는 건희의 질문에 윤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이는 윤의 용기 있는 선택이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선택권을 박탈당한 윤의 체념에 가깝다.

 

 

윤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세게. 누군가 윤의 머리와 턱을 동시에 잡고 흔드는 것처럼. 그래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건희도, 윤 자신에게도 그것은 너무 이상하고 끔찍하지만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용기는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의 특권이다.  용기를 내자는 담임의 말은 그와 여학생의 관계가 둘의 선택으로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가능한 말이다. 하지만 고난을 선택당한 윤에게는 용기를 낼 특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윤은 남겨진 삶에서 어떠한 용기도 내지 않는다. 건희에게 헌신하는 일이 죽은 아이를 배신하는 것이라 느끼며 방치하고, 남편과의 관계 회복에도 힘쓰지 않는다. 그저 비가 오는 동안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모르는 사람같이, 하염없이 고난 속에 서 있을 뿐이다.

 

 

 

#5


 

이처럼, 작가는 용기 낼 수 있는 고난과 그렇지 않은 고난을 분리하고 있다.


용기 낼 엄두가 나지 않는 윤의 고난은 더욱 깊어진다. 담임 또한 용기를 내자는 말만 할 뿐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용기를 내었음에도 극복할 수 없는 일들이 그를 기다릴지 모른다.


누구의 고난이 더 나은가를 따지는 순간, 독자는 최악과 최악 중 하나를 고르는 지독한 밸런스 게임을 하게 된다. 작가는 선택을 강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선택지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서 멍한 표정으로 소설의 마지막 문단만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글을 쓰는 지금도 선택을 미루고 싶다. 그저 비를 맞는 윤의 표정을 상상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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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균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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