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람의 일생 훑기 - 시가 인생을 가르쳐준다 [도서]

글 입력 2021.07.04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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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인생을 가르쳐 준다>는 시인 나태주가 그의 생의 동행이 되었던 125편의 시를 통해 인생이 귀하고,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국민 애송시부터 희귀 시까지 엮어내, 읽으면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뜻밖의 깨우침에 학창 시절 순수 공부로만 통했던 시를 오롯이 시 자체로써, 나만의 감상으로써 풀 수 있던 시간이 되어 너무 좋았다.

 

도서는 청년-장년-노년-유년의 순의 단락으로 시들을 배치했다. ‘책을 읽으시며 부디 맑은 마음을 품어셨으면 좋겠고 고요한 마음을 지니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느낌이 살아나고 생각이 싱싱해질뿐더러 인생에서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하는 책머리 글에, 그 호흡을 따라가 본다.

 

 

 

청년


 

질투는 나의 힘 _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자기에 대한 사랑이 온갖 사랑의 근본이라 말한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나의 삶 가운데서 나는 흔들리고 고민했다. 그 아픔과 고민이 눈 녹듯 사라지게 만들었고, 한 대 맞은 듯 멍하게 그러나 낯부끄러워지지는 않게 한 문장이다.


내 눈이 붙어있는 내 몸, 나 하나 쳐다보지 못하고 내게 집중하지 못했다. 내 눈이 기억하는 사람들과 사물과 생명과 상황과 말 따위에 너무 많은 계산이 들어갔었다. 이제는 가장 가까이 있는 내 얼굴, 내 말, 내 손, ‘나의 사랑 나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리라.

 

세상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세상 반대편의 나의 밀실, 작은 공방에 노크해야지.


 

ㄱㄷ.jpg

 

 

 

중년


 

갈대 _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ㅡ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아직은 울음을 밖으로 쏟아내고 있다. 그리고 점점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게 지겨워지고 있다. 갈대처럼 속으로 울게 되는 날은,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찾아올 것 같다.


학창 시절에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갈대가 애처로웠는데, 이제 보니 갈대는 그 때의 나보다 훨씬, 심지가 굳은 생명이었다. 목 놓아 울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애써 무덤덤한 척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더 ‘솔직한 어른’처럼 느껴졌다.


은어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고나 할까. 속으로 우는 걸 멋지다고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단단함에 난 그저 쳐다볼 밖에.


 

 

노년


 

 _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처럼 살고 싶다. 지혜롭게 살고 싶다.

 

풀 앞에서 나는 그냥 어린애일 뿐이라 느꼈다. 두꺼운 책의 끝부분을 읽는 ‘다 아는’사람이고 싶지만, 그 이는 이제 ‘책을 닫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는 이라, 나는 부러워하는 한편 고민이 된다. 풀이 가진 노련미는 ‘지금의 나’라는 과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과정을 거친 풀처럼 살아가고 있으니, 나도 곧 풀이었구나. 부러워 할 것 없이 조용하고 묵묵하게. 나는 풀처럼 살아간다.

 

 

섬.jpg

 

 

 

유년


  

 _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아장아장, 부모님을 향해 걷는 아이의 시선일까. 크면서 점점 수많은 타인과 가까워지는 유년의 단계일까. 그 안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나 고민일까.


다가가고 싶고, 눈을 돌려 향해가려고 애썼던 유년의 내 모습이 중첩된다. 이에 나는 ‘뭐가 그리 좋았을까. 다가가는 것도 기특하지만, 부디 너무 많-이 애쓰지는 않아도 되더라, 깊게 상처받지는 않아도 되더라.’는 말을 건넨다.


닳아 없어지는 편이 좋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자. 그렇지 않다면야 뒤돌아서도 되더라. 마음이 이끄는 대로, 네 마음이 ‘편한’ 선택으로. 다가가자, 뒤돌아 걷자. 유년의 내가, 지금의 내게 다시 말을 건넨다.

 

*

 

책을 읽으며 유년, 청년, 중년, 노년. 사람의 일대기는 그렇게 흐르나, 실은 그 시간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청년의 삶이 유년의 삶이었고, 유년의 삶이 노년의 삶과 같다고 느낀 시간이었다. 점점 커지거나 작아지는 것도 아닌, ‘한 사람’이라는 공통을 갖고 있다. 시에서 정말 진하게 인생을 배웠고, 글을 기고하며 마음이 편해졌다.

 

사람의 일대기를 훑는 도서 <시가 인생을 가르쳐 준다>를 보며 시의 매력, 시의 내음을 가득 머금어보길 바란다.

 

 

[서지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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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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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리지날
    • 23기 에디터 박대현입니다. 안녕하세요!

      제 인생에서 군 시절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전역까지 남은 날을 헤아리며 하염없음을 느끼고 울적해지곤 했던 밤마다, 일기장에 시집에 나온 시를 손으로 옮겨 적었습니다. 나중에는 기계적으로 필사하는 행위에만 집중하며 의미가 다소 옅어지긴 했지만, 시를 쓰는 순간은 저 나름대로의 결심을 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 좋아지는 글이었습니다.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기로, 그리고 닳아 없어지는 것이 낫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여러 시 중 풀과 갈대가 등장하는 시를 골라주셨는데, 두 식물은 퍽 닮았잖아요. 서지유 에디터 님께서는 비록 흔들리지만 뿌리를 내리고 단단히 자리를 잡은 풀과 갈대를 부러워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디터 님의 글을 통해 시를 읽으며 나태주 시인이 어떤 기준으로 시를 선정했을지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을 소개받았습니다. 앞으로 올리실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보내세요~

      박대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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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2 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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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리지날안녕하세요 대현님! 소중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풀과 갈대를 부러워한다는 말에 잠시동안 멍했습니다. 풀과 갈대같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고, 그런 어른이고 싶다고 느꼈다뿐이지, 이렇게 새로운 관점으로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감사드려요!!

      두개의 시 모두 중년과 노년의 시점으로 본 것이라, 더욱더 그들과 같은 "어른"이고 싶다 느꼈네요. 어른이 되어감을 인정함에서 오는 씁쓸함과 지혜가 쌓이는 자부함이 함께 하는 것 같아요.  생각의 싱싱함을 더해주셔서 감사해요.

      대현님도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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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을 만나실 분들께.

      안녕하세요 컬쳐리스트 서지유입니다.

      이 글은 제가 의도적으로 사설을 뺀,
      짧지만, 요약 · 함축된 문장으로 꾹꾹 눌러담은 글입니다.

      길게 늘여뜨린 글로 썼다가 천천히 압축하고,
      같은 생각에 생각을 거쳐, 채에 남은 생각과 문장만 걸러냈습니다.

      과정은 길었지만, 수월하게 읽히고 깊게 우린 것들이기에
      제가 오래 머무는 기고 글입니다.

      찰나의 공감이던, 깊거나 다른 공감이던 다 좋아요:)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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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라타너스
    • 안녕하세요, 에디터 이수현입니다!

      시는 참 신기해요. 짧고 함축적인 모습이 꼭 글의 작은 조각 같은데, 어떤 긴 글보다도 큰 감정을 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커다란 슬픔, 그리움, 환희를 느꼈을 서지유 에디터님을 상상해보게 됩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때 시를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문학을 교과목의 하나로, 수학처럼 정해진 정답을 골라야 하는 거에 관해 서면 물론 불만이 가득했지만, 이전까지 몰랐던 많은 문학 작품을 매일매일 만나는 건 정말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특히 짧지만 깊게, 오래 남는 시를 좋아했어요. 백석 시인의 '흰 바람 벽이 있어'를 가장 좋아했답니다.

      그때를 떠올리고, 지금의 저를 생각하며 글을 찬찬히 읽으니 '청년의 삶이 유년의 삶이었고, 유년의 삶이 노년의 삶과 같다고 느낀 시간이었다. 점점 커지거나 작아지는 것도 아닌, ‘한 사람’이라는 공통을 갖고 있다.'라는 말이 많이 와닿습니다. 살면서 뜻밖의 사건이나 변화를 무수히 겪지만, 본래의 나라는 사람은 변치 않는 것 같아요. 어쩐지 마음이 놓이면서도 두렵기도 한 사실이네요.

      나에 대한 사랑부터 갈대와 풀, 섬으로 이어지는 감상을 읽으니 서지유님은 결과를 떠나 과정이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 분명히 알고, 이를 소중히 하는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아 슬픈 마음이 들어도 과정을 묵묵히, 성실히 걸어나가고 계신 것 같아요. 과정 또한 유일한 것이니까요.

      앞으로도 그 길을 안전하고, 조금은 더 즐겁게 걸어나갈 수 있도록 응원하겠습니다.
      글을 통해 그 길을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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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2 23:3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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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라타너스안녕하세요 수현님! 문단문단 깊이 음미하신 댓글, 감사합니다.

      "'한사람'이라는 공통"에 대해서는, 자기에 대한 사랑(청년), 조용한 울음(중년), 지혜로움(노년), 세상 밖으로 향하는 걸음(유년)이 실은 굳이 나이에 종속되지 않는, 모든 나이에서 다 겪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에서 나온 생각이었어요. 여러감정을 한데 묶는 건 곧 '한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수현님의 두려움이 좀 가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누군가의 결과에 부러워하다, 결국 과정이 결과를 만들었다 느낀 것을 글에 녹여냈는데, 알아봐 주시고 예쁜 말로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현님도 내딛는 걸음걸음에 즐거움이 함께하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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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세희
    • 안녕하세요. 컬쳐리스트 송세희입니다 !
      인사가 늦어지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고 싶어요.

      지유님의 글이 흐르듯 매끄럽게 읽혔어요. 시집을 읽으며 자유롭게 기억과 감상을 적어 내리는 지유님의 곁에 가까이 앉아 함께 감상을 나누는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문장을 짜내거나 고뇌한 흔적이 느껴진다기 보다는, 정말 '나 이거 읽으며 이런 생각했어. 너희는 어때?' 라고 묻는 느낌이었달까요 :)
      그래서 지유님의 댓글을 보고 놀랐습니다. 원래는 길-게 늘어뜨린 문장이었다는 게 신기하고, 또 원래의 문장도 너무나 궁금해지네요. 지유님의 생각을 거쳐 걸러진 지금의 문장들은 그래서 촘촘하면서도 자유롭게 느껴져요.

      저는 도서가 시를 배치한 순서의 마지막에 유년이 있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습니다. 유년은 사실 인생의 시작점에 위치해 있잖아요. 그래서 나태주 시인이 유년을 마지막으로 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사회와 사람들의 시선에 가장 물들지 않은 순수한 시절로 우리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시인과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쓰고 만들고 또 이야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닳아 없어지는 편이 좋다면 - 뒤돌아서도 되더라.'라고 언급해주신 부분을 읽으며 애틋하면서도 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어느 정도 닳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짧은 글이지만, 문장 사이로 지유님의 모습을 설핏 본 기분이 듭니다. 닳은 손을 잡고 우리가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이 조금씩 서늘해지고 있지만 더운 기는 다 가시지 않았네요. 늘 건강하시고, 오늘도 편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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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3 20: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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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세희안녕하세요 세희님! 마음 따뜻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문장들이 자유롭게 느껴진다는 말이 제 마음을 울립니다. 자유한다는 말을 참 좋아해서 더 마음에 들어오네요. 세희님의 댓글을 보며 생각해보니 채에서 걸러진 문장들은, 저의 무의식중에 있는 깊고 어두운 생각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층 가볍고, 자유하는 문장들만 담겨나왔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다른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신기하네요 ㅎㅎ

      감정을 쏟지 않고 담아두기 보다는, 쏟고 싶다면/그게 편하다면, 뱉어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더라..  저에게 보내는 문장이었어요. (유년의 어린아이처럼 )감정에 충실하고, 그러기 싫다면 용쓰지 않아도 된다는 용기의 문장이라고 할까요?

      세희님의 댓글로 제 글을 다시금 되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해요. 세희님도 평안한 하루 보내시고, 아이같은 감정이 불쑥 찾아오더라도 겁내지 않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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