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잘 산다는 것

무용지용 네 글자를 위안 삼아
글 입력 2021.06.22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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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양혜규: O2&H20 展>이 진행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단연 “소리 나는 가물 家物” 시리즈가 아니었을까 싶다. 일상적인 사물과 토템적 기운을 내뿜는 제의용 방울이 결합되며 제공하는 일종의 혼종성이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연작처럼 ‘살림’에 관심을 두고 여러 작품 활동을 해온 양작가가 주목하여 전시 안의 전시로 끌고 들어온 것이 있으니, 바로 ‘목우공방’의 숟가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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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공방과 김우희 목수


 

양혜규 작가의 모친의 지인인 김우희 목수는 경남 마산 지역의 목우공방에서 활동한다. 동네에 마음 나눌 동년배가 없어 혼자 작업장을 지키는 시간이 길다. 외롭지만, 때로는 가을빛에 누렇게 물든 벼가 출렁이는 모습이라든가 가끔 뭐 하는 사람인가 싶어 공방을 찾아온 촌로들과의 대화를 기록하며 일상을 보낸다. 그대로 캡션에 들어간 그녀의 에세이들은 잠시 잊고 살았던 공동체의 근면함과 소박함, 또 서로 돕고 사는 미풍양속을 담아낸다. 많은 것이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고, 시간이 차근차근 쌓이는 이곳에서도 먹고사는 것은 영 쉬운 일이 아니다. 흐르는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 결을 다듬는 것은 오롯이 스스로의 몫이다. 판로를 구하고 매일매일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곳에서 김 목수는 숟가락 하나를 깎는데 두세 시간, 어떤 것은 하루 종일을 투자한다.

이런 김 목수에게 지나가는 동네 어르신들은 애정 어린 잔소리를 건넨다.

 

“거 그래 가꼬 밥은 무꼬 살겠나”

 

 

 

한국인의 밥상


 

밥은 먹고살겠나. 한국인에게 포슬포슬 적당한 윤기가 도는 쌀밥은 물만큼이나 필수적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밥’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니는 상징성은 너무도 크다. 얼마 전에 영화 <미나리>를 보러 갔다가, 배달의 민족 광고 하나를 보고 획기적인 카피에 감탄을 한 적이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1분 남짓의 광고는 <너에게 밥을 보낸다>였다. ‘선물하기' 기능을 선보이기 위해 기획된 것인데,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다소 어색해 보이는 사이의 두 사람, 황급히 버스를 타며 “다음에 밥 한번 먹자~”라며 인사한다. 어머니는 학업을 위해 혼자 사는 다 큰 아들이 늘 걱정되지만, “밥 잘 챙겨 먹어"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또 풋내가 나는 학생들은 썸을 탈 모양새다. “같이 밥 먹을래?”라며 수줍은 연락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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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법한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재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새삼 ‘밥'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어색한 사이의 헤어짐을 정겹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멀리 떨어진 가족이 걱정을 숨기고 안부를 물을 수 있게끔 해주고, 호감있는 상대에게 말 걸기 딱 좋은 핑계 거리가 되어주기도하니 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떼어낼래야 뗄 수 없는 밥을 위해 존재하는 숟가락은 과연 우리 일상 속 가장 깊이 스민 가물이 아닐 수 없다. 양작가는 이 광고처럼 공예품이 지니는 상징성을 통해 먹고사는 것이 반복되는 우리네 삶을 그린다. 또한, 대량생산이 반복되는 현대사회에서 공예적 수행의 중요성을 포착하고, 더불어 사는 것의 따뜻함을 은근히 환기시켜 준다.


 

 

108 나무 숟가락


 

다시 목우공방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작업장에는 무수한 숟가락들이 있다. 그런데, 이 숟가락들.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매끈하게 다듬어낸 다름나무 도마들과는 달리 좀 볼품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떤 숟가락은 손잡이가 너무 짧고, 움켜쥐기 힘들 정도로 뚱뚱하거나, 또 어떤 것들에는 구멍이 뚫려있기도 하다. 과연 제 기능을 할 수 있나 의문이 드는 이 숟가락들은 어떻게 미술관에 들어오게 되었나? 이것들은 작품으로 탄생한 것도, 작품이 되기 위해 거창한 알레고리를 부여받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언젠가 누군가의 변기와 다리미로 쓰였을 뒤샹과 만 레이의 작품처럼, 숟가락의 기능을 수행한 적도 없다. 이 숟가락들은 목공의 손에서 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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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미', 만 레이 (1921)

 

 

우리는 흔히 “장인 정신"이라는 단어와 함께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자신의 도자기를 모두 깨 버리는 한 노인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이 숟가락 장인은 완벽하지 않다 못해 쓸모없기까지 한 숟가락들을 태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무용지용 숟가락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들의 탄생 과정을 곱씹는다. 이 숟가락들은 본래 아궁이의 나무 땔감이 될 운명이었다. 느티나무 피죽, 향나무 뿌리, 소나무 옹이, 아까시나무 가지 등 출신도 다양했다. 그리고 김 목수는 그 땔감들을 건져내 각자의 나무가 가진 결을 온전히 따라 숟가락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그해 겨울 다듬은 숟가락들 중 어느 하나 제 모양새를 갖춘 놈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잠시 밀란 쿤데라의 책 중 한 구절이 생각났다.


 

석공과 망치의 게임. 세상은 망치와 같다. 그리고 우리는 망치를 다루는 석공이다. (...중략) 석공은 망치의 주인이지만 망치 쪽이 석공보다 더 우위에 선다. 왜냐하면 도구는 자신이 어떻게 다루어져야만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데, 도구를 다루는 자는 그 대강만 알고 있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망치의 불손한 눈길을 참으면서 힘센 손길로 다시 휘둘러야 한다.


- 밀란 쿤데라의 <지혜> 中

 

 

그제서야 단순히 숟가락의 개수라고 생각했던 ‘108’이라는 숫자와 함께 불교의 백팔번뇌 百八煩惱 가 떠올랐다. 김 목수 덕에 기사회생한 이 숟가락들은 분명 깎아지고 다듬어지며 참회문을 외우고, 백팔배로 수행하는 과정을 거쳤으리라. 수행으로 쓸모없음을 얻은 이들은, 설거지통에 들어가는 대신 전시관 아크릴 속에 고고한 모습으로 자리하였다.

 

이처럼 인생과 먹고사는 삶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날이 더워졌다. 또 이따금 스스로가 쓸모없다고 느껴지며 무기력함이 찾아온다. 겨울에는 두터운 잠바의 무게를 탓했는데, 이제는 무슨 핑계를 대야 하려나. 하다가도 그냥 대추 두 알 얼렁뚱땅 넣고 푹 익힌 삼계탕이나 한 그릇 먹는 상상을 하며 입맛을 다시는 요즘이다. 무용지용 네 글자를 위안 삼아.

 

 

[이지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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