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갖기에 충분한 나이, 영화 <69세>

임선애 감독, 2019년
글 입력 2021.06.22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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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매일 벌어지는 수많은 범죄 중에서 그 원인을 피해자에게 찾거나 묻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런데 왜 여성 피해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성범죄는 그 원인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일까? 2019년 전 충남도지사였던 안희정의 위계에 의한 성범죄 유죄 판결 이후, 2020년에도 역시 전 서울시장이었던 고 박원순과 전 부산시장인 오거돈의 권력형 성범죄 사건이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목소리 덕분에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이 사건들의 진상 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피해자들을 향한 2차 가해성 발언이 무차별적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우리 사회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에 리트머스지를 대는 계기가 되었다. 매년 보고되는 성범죄 발생현황을 살펴보면, 여성 피해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그 중에서도 사회. 경제, 문화적 지위가 취약한 위치에 처해 있는 여성은 더욱 자신의 피해를 말하기 힘들다. 이는 피해자 여성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이미 형성되었고, 이러한 ‘ 피해자다움’에서 피해자가 조금이라도 벗어난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 여성의 목소리는 지워진다. 임선애 감독의 <69세(2019)>는 바로 ‘피해자다움’이라는 차별적 시선에 문제제기를 하는 영화이다.

 

69세의 요양 보호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노년 여성, 심효정은 오랜 돌봄노동으로 오십견 증상을 겪게 되고, 29세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물리 치료를 받는 도중에 성폭행을 당한다. 그리고 경찰에게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알리고, 가해자를 고발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흔히 노년여성은 가임기의 여성이 아니라 무성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심효정의 피해사실은 주변 사람들에게 왜곡되고, 다른 의도가 있다고 의심을 산다. 피해자다움에 기인한 주변인들의 가해는 심효정이 가해자를 고소하기 위해 경찰서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심효정이 69세의 노년여성이기 때문에 경찰관은 심효정을 피해자일 가능성을 배제하고 아마도 지인의 피해사실을 대신 알리려고 경찰서에 방문했을거라 의례 짐작한다. 그리고, 강간 치사 사건 ‘고소장’을 작성해 온 심효정에게 ‘고발장’을 작성하여 오라고 지시한다. 게다가 사건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29세의 젊은 남성이 노년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접근하여 폭행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며 강간치사피해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또한 가해자 남성이 병원에서 ‘친절 담당’이라는 평판을 듣고, 가해사실을 ‘과한 친절’ 이라 칭하며 2차가해성 발언을 남발한다. 흔히 가해자 주변인들에 의한 호의적인 평판에 기댄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라는 말은 가해 행위를 부인하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지우는 2차 가해성 발언이다. 사건담당 고형사는 문제 상황과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피해자와 남동인 과의 사적인 관계를 묻는 등 성범죄 관련 사건 처리 불필요한 질문을하기도 하고, 심효정의 동의 없이 가해자와의 대질조사를 진행시키고, 대리인 동반 없이 심효정이 이에 응할 것을 요구한다.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증명해 내기 위한 일련의 모든 과정에서 마주치는 거의 모든 일이 2차 가해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본인들의 사회적 통념에 따라 무심코 던지는 말이지만, 그 말은 효정에게 무겁게 와 닿고 피해자를 점차 사회의 주변부로 밀어낼 뿐이다.

 

무엇보다도 성범죄를 소재로 다룬 이전의 영화들과 구분되는 차별점은 성폭행 장면에 대한 재현방식이다. 기존 한국영화에서 성폭력 장면 자체를 그대로 재연하는 것 자체가 관객에게 폭력적인 장면을 환기시키는 트리거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고려가 전무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해자 시점에서 강간이나 폭력적인 장면을 그대로 재연하는 것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포르노적 상상력에 기인한 재현방식이라는 인식이 없었기에 다수의 한국 영화들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재현하고 재생산 시키느 촬영방식이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69세 >에서는 성폭력을 당하는 상황 조차도 감독은 재연하지 않는다. 그저 성폭행 상황에 처하기 직전, 심효정이 다가올 폭력적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있는 생존자의 모습에 집중한다. 이마저도 감독은 2분 30초 동안의 암전 속에서 두 인물의 목소리만 연출되는 대화를 통해서 관객이 어떠한 상황에 심효정이라는 인물이 처해 있는지 상황적 맥락을 통해서 알아 채게 한다 . 폭력적 상황을 그대로 재연 하는 것만이 우리가 처한 사회적 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1차적이고 평면적인 기존의 재현방식을 뛰어넘는 연출이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는 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희망적인 이유는 심효정이라는 인물이 ‘피해자다움’ 이라는 편견 때문에 무기력해지지 않고, 의연하게 자신의 피해사실을 용기 있게 세상에 드러내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 속에 한 인간이 자신의 자존감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용기 있게 지켜나가는 모습을 관객으로 하여금 보여줄 때 이를 보는 관객들도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사회적인 편견과 피해에 목소리를 내는 주인공과 연대하고자 하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도 나의 편이 되어주지 않을 것 같은 외로운 세상에서도 심효정은 굳은 의지로 자신의 뜻을 포기 하지 않고, 힘겹지만 고단한 발자국을 내딛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이다. 그가 지금껏 걸어 온 삶의 궤적과 그리고 앞으로 보여주게 될 행보가 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고단한 삶일지라도 이어나갈 수 있는 용기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수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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