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엄마의 옷장

셔츠를 입은 엄마는 '아저씨'
글 입력 2021.04.29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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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하루종일 운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유일한 취미임과 동시에 가족 외에 유일하게 소속되어 있는 사회라서 그런지 엄마는 항상 집에서 입을 옷, 운동하면서 입을 옷, 딱 두 종류의 옷만 산다.


한 번은 엄마가 쇼핑을 가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랑 단 둘이 여행을 가기 전날이었다. SPA브랜드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익숙한 매장으로 엄마를 데리고 갔다. 처음에는 골라주는 옷만 입어보다가 머지않아 옷을 수선할 계획까지 세운 모습을 보고 웃었다. 많이 웃었고, 또 놀렸다.


그 전에, 매장으로 쇼핑을 오라는 말을 안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부분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오히려 화를 냈다. 평년이면 평년대로, 명절이면 명절대로, 직원이 받을 수 있는 할인혜택이 꽤나 큰 브랜드였고, 기본 티셔츠는 물론 속옷까지 없는 게 없는 곳에 당최 오질 않으니까.


심지어 급한 서류를 매장에 가져다 준 적이 있었는데도 휑하니 가버리곤 했다. ‘딸내미의 근무지’ 외에 다른 수식어구는 상상도 못하는 사람처럼.


1여 년이 지난 오늘은 엄마가 내 셔츠를 입고 어색해하면서 “아저씨같다”라고 말했다. 남동생이 전역을 했고,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 번의 쇼핑으로는 운동복을 걷어낼 수 없었으므로 엄마의 옷장에는 여전히 단정하다고 부를 수 있는 옷이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 어색할 성 싶은 흰색 셔츠에 통이 넉넉한 검은색 바지였을 뿐이다. 세상에 제일 많은 색일지도 모르는 하얀색과 검은색이 연상시키는 것이 ‘아저씨’라는 말을 곱씹었다. (정작 우리집 아저씨는 추리닝을 입고 출근하기 일쑤다.)


엄마는 최대한 일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대기업에서 근무했다 한들 상고를 전교 1등으로 졸업했지만 결혼하고 애가 둘 씩이나 있는 여자에게 업무를 맡기지는 않았다. 그 뒤로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고 동네 병원에서 일을 했던 엄마는 몸이 안좋은 나를 여러 번 살릴 수 있었던 경력이라고 종종 회상한다.


어쩌면, 고대를 나왔던 삼촌이 일반고 진학을 말리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가정이 과분하게도, 여느 집이나 그렇듯 나와 내 동생이 라면을 좋아하는 건 일을 하는 엄마를 둔 탓이었기 때문에 이제 자격증은 오갈데가 없어졌다.


사람들이 조금 더 나은 건 하얀 상의에 검은 하의를 아무렇지 않게 입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입지도 못하는 그 옷을 다림질할 수 있는 기회가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에 익숙한 왼쪽 가슴의 주머니와 정갈한 단추 예닐곱개가 달린 옷을 새하얗고 깔끔하게 매만질 수 있다. 엄마에게 분명 셔츠의 모양새는 익숙하다.


상투를 내보이면 수치로 여겼던 사람들과 갓을 쓸 자격이 없던 사람들, 비단으로 만든 도포자락을 휘날리던 사람들과 비단이 품에 들어오면 당장 팔아서 음식을 마련하던 사람들을 놓고 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모습이 의복에 촘촘히 쌓여 있다.


이 세상에서 중산층인 우리집이 앓는 소리를 내면 ‘배가 부른 소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저씨’가 앓는 소리를 ‘배가 부른 소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검은 바지 위에 흰색 셔츠를 입을 자격시험의 기회조차 없었던 우리 엄마. 비단옷을 재단할 생각조차 못 해봤던 사람들. 차이점을 기술해 보시오 (5점). 현대판 서자가 따로없다.


불가침 영역의 셔츠는 우상화되어 인지하지 못하는 계급을 만들어내면서 ‘가방끈이 긴 사람’,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과 낙담을 담아 ‘아저씨의 셔츠’라는 단어를 토해냈다.


그러면, 엄마는 셔츠를 입는 사람이 되었어야만 했나? 엄마는 테니스 대회를 휩쓸고 다니고 있다. 제일 잘 맞는 옷이 운동복인데 내가 ‘셔츠’에 의미를 과다부여 했을 수도 있다.


얼마나 결과론적이고, 낙관적인 사담인가? “내가 너 잘될 줄 알았어.”, 그럼 미리 말 좀 해줬으면 될 일 아닌가? 엄마가 아둥바둥 직업을 바꿀 때, 결국 가장 잘 어울리는 운동복을 입게 될 거니까, 여유있게 살라고, 누가 말 좀 해주지. 그랬더라면.


우리집 아저씨 세대에는 셔츠가, 정장이 아저씨의 전유물이었고, 수입을 가져오는 일을 할 수 있는 권리의 상징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입이 권력이기 때문에 셔츠가 그렇게 됐다.


그래서 가족사진에서 엄마가 셔츠를 입었으면 좋겠다. 충분히 엄마는 노력했으나, 이 한껏 멍청함에 취해 있는 사회는 누구의 노력에는 가치를 매길 줄 모르는 무식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여기, 많은 레이어에 속해 있는 내가 있다. 너무 많아서, 각각에 맞는 옷을 매번 고르기가 힘들어서 무채색만을 고집하는 내가 있다. 반면 엄마의 레이어는 단 두 개의 층이다. 한 때, 더 다채롭게 섞이고, 더 빛날 뻔했던 층이 단 두 개에 수렴했다.


너무 작은 반경이라, 한 층이 늘어나는 모습에 엄마의 세상은 뒤집힌다. 여행이 그랬고, 가족사진이 그랬다. 조금씩 늘려 놓았다면, 이런 지진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나는 자꾸만 그 세상을 더 흔들어내고 싶다. 셔츠를 입고 자꾸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엄마의 모습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엄마도 한 때 무지개를 꿈꿨다는 걸 마주하는 순간마다 지금의 나는 과분한 듯하다.


남동생이 아빠의 등을 보고 따라갔을 때, 나는 엄마의 눈을 보고 자랐다. 그래서 자꾸만 세상이 흔들린다는 걸 모를 때까지 흔들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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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옷을 사고 갔던 코타키나발루에서,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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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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