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섹스돌 제작 과정 전시' 논의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것들

'2020 올해의 작가상' 정윤석 작가의 창작물 ‘내일’에 관하여.
글 입력 2021.04.08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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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된 칼럼을 몇 개의 질의응답으로 짧게 요약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짧은 질의응답에 흥미가 생기신 독자분께서는 꼭 제 글을 모두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건강한 반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겨움을 주기 위한 예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

 

-'섹스돌'은 '인간 소외' 및 ‘인간 모순’을 다룬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

 

-정윤석 작가는 '섹스돌'을 전시하고 있는가?

아니다.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폭력이 될 수 없다.

 

-일어났던 일을 재현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폭력이 될 수 있다.

 

-현실의 형상을 흉내 낸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모르겠다.

 

-일어난 일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은 폭력인가?

모르겠다.

 

-2020 올해의 작가상은 ‘모두를 위한’ 올해의 작가상이었는가?

아니다.

 

-필자는 ‘절대적 진리’에 기반하여 글을 썼는가?

전혀 아니다.

 

 

 

1. 역겨움을 주기 위한 예술은 존재하는가?


 

역겹다..JPG

 

역겹다. 역정이 나거나 속에 거슬리게 싫다.

 

역겹다. 그 단어가 가장 적절하다. 그것이 필자가 국립현대미술관 ‘2020 올해의 작가상’ 전시실 중 ‘정윤석 작가’의 전시실에 들어섰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그리고 전시실에 있는 내내 필자는 끊임없이 역겨움을 느꼈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필자는 ‘작가’가 역겹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작품'이 역겹다고 느낀 것이었다.

 

역겨움을 주기 위한 예술은 항상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 방법이 적절했는가, 결과물이 작가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반영했는가 등에 따라 그것은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될 수도 있고, 다양한 사항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창작의 산물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역겨움을 안겨준 것'은 '최고의 작품'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그렇고 수잔 발라동의 여성 누드 그림들이 그렇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 그렇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리듬 0’이 그렇다. 각각의 작품이 관객에게 안겨준 감정의 결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작품들은 동시대 관객들에게 역겨움을 안겨줬다. 그러나 그 역겨움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었으며, 작품이 역겨웠던 이유는 그것이 당시 사회의 치부를 비추는 거울이었기 때문이었다.

 


[크기변환]Edouard_Manet_-_Luncheon_on_the_Grass_-_Google_Art_Project.jpg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마네는 잘 차려입은 부르주아 남성 두 명과 (거의) 나체인 여성 둘을 한 작품에 담아내었다. 당시 주된 미술 감상자는 그림 속에 있는 부르주아 남성들과 같은 이들이었다. 마네의 사실주의 회화 속 감상자와 눈을 맞추는 나체의 여성은 ‘당신들 고상한 척하지만, 사실은 그거 다 위선이잖아.’라고 말하기라도 하려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기득 사회가 애써 숨기려 했던 더러운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작품은 부르주아 남성 관객들에게 분노라는 역겨움을 안겨주었다.


발라동은 ‘여성이 여성 누드를 그렸음’이라는 새로운 행위를 통해 ‘동시대’ 대중에게 거부감으로 인한 역겨움을 안겨주었다. '여성의 신체는 죄악이다'라는, 왜곡된 그리스도교적 관념에서 비롯한 당대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끄집어내어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보인 역겨움은 효과적이었다. 그는 최초의 여성 아카데미 회원이 된다. 그리고 발라동의 예술은 현재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전혀 역겹지 않다.

 

뒤샹의 ‘샘’은 ‘예술의 고고한 지위’라는 불문율을 건드림으로써, 아브라모비치의 ‘리듬 0’*은 허가된 욕망의 비윤리성을 보여주며 감상자에게 역겨움을 선사한다. 마지막 작품의 경우에는 '작품'이 역겹다기보다는 '일부 관객'이 역겨웠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관객의 행동마저도 작가의 의도였으며, 참여예술의 경우 관객 역시 작품의 일부이므로 작품이 역겨웠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위 예술가들의 ‘감상자에게 역겨움 안겨주기는’ 적절했다. 그렇다면 정윤석 작가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었던 역겨움은 적절했을까?


현재 대중이 정윤석 작가에 보이는 반응과 마네와 뒤샹이 처음 작품을 공개했을 때의 반응이 비슷하다고 여기며, 정윤석 작가가 그들만큼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몇 차례 목격하였다. 그러나 정윤석 작가의 창작물이 ‘제2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될 수 있는가를 필자에게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리듬 0'은 긴 테이블 위에 장미, 빵, 포도, 가위, 칼, 장전된 총 등의 72가지의 물건을 올려두고, 관객들에게 그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들을 마음껏 사용하도록 한 행위예술 작품이다. 작가는 스스로 6시간 동안 관객이 물건을 사용하는 '대상'이 되었다. 검색을 통해 세부적인 행위예술의 경과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앞서 제시한 많은 ‘효과적으로 역겨움을 주는 데에 성공한 작품들’ 중 굳이 마네를 집어 비교하는 이유는, 두 작가 모두 남성이고, 어찌 되었든 작가가 그의 창작물에 담아낸 것은 ‘여성 나체 이미지’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2. '섹스돌'은 '인간 소외' 및 ‘인간 모순’을 다룬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윤석 작가의 창작물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작가의 작품 창작 의도와 반영물이 담아내는 것을 비교하면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우선 마네는 ‘기득권의 위선’을 그림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것이 마네의 작품 창작 의도였다. 당시 사회의 ‘기득권’은 '부르주아 남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잘 차려입은 고상한’ 기득권 부르주아 남성들이,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비윤리적인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위선. 피지배계급(여성, 빈민 등)에게는 그리스도교 윤리와 가부장제를 엄격히 따를 것을 요구했지만 정작 그들은 매춘을 일삼았다. 마네는 그것을 숨김없이 보여주고자 했다.


심지어 마네도 돈 많은 남성 즉, 기득권이었다. 그의 행위는 일종의 ‘내부고발’이었고, 효과는 굉장했다. 관객은 역겨움을 느꼈고, 그의 그림은 일종의 ‘언론’의 역할을 했다. 심지어 작품이 담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떠나 내재적 작품성만 보더라도 훌륭하다. 그가 대중에게 선사한 역겨움은 그의 창작 의도를 효과적으로 반영했고, 따라서 그의 그림은 훌륭한 작품으로 남았다.


이제 정윤석 작가의 ‘내일’을 살펴보자. 정윤석 작가는 작품 설명, 작품 자체 그리고 작가 인터뷰에서 그가 다루고자 했던 것이 ‘인간 소외’ 및 ‘인간 모순’이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필자는 ‘내일’은 ‘인간 소외’ 및 ‘인간 모순’을 온전히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내일’(전시공간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작품을 총칭하여)은 크게 세 이야기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입구와 가까운 쪽(후면)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중국의 섹스돌 제조 공장의 모습을 담았다. 맞은편(정면)에서는 ‘AI로 정치를 하겠다’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한 정치가 ‘마츠다’의 이야기와 섹스돌과 ‘함께 사는’ 인물 ‘센지’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상영된다. 측면에는 섹스돌 제조 공정의 순간순간이 포착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섹스돌 제조 공장’ 이야기는 3번 질문에서 다루도록 한다. 2번 질문에서 다룰 이야기는 ‘AI 정치가’와 ‘섹스돌과 함께 사는 인물’의 이야기, 즉 정면의 다큐멘터리이다.


일본의 정치가 마츠다는 시의원 선거에 나가며 자신이 시의원이 되면 ‘무조건 AI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라고 이야기한다. 정치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AI가 정치를 하게 되면 인간을 위한 행위를 비인간에게 맡기는 것이 된다. 주제는 인간인데, 인간이 없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소외’ 및 ‘인간 모순’의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공’적인 ‘지능’이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물론 인간이 ‘이루다 AI’에게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입힌 것처럼, 인간이 그것에 인위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입히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섹스돌과 ‘함께 사는’ 사람의 모습이 ‘인간 소외’를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결코 그럴 수 없다’라고 답할 것이다. 섹스돌과 ‘함께 사는’ 것은 ‘일방적인’ 욕망 해소를 위해 자유만을 누리고 책임은 회피하려 하는 것이다.


섹스돌과 함께 사는 것이 ‘시체’와 함께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인간의 외형을 하긴 하였으나 그뿐이다. 시체와 다른 점은 시체를 구성하는 것은 단백질이고 섹스돌을 구성하는 것은 실리콘이라는 것뿐이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인간은 믿을 것이 못 되고, 그러므로 섹스돌과 함께 사는 것이 차라리 낫다’라고 말한다. 정말 무책임한 말이다. 섹스돌 사용은 무책임한 욕망의 발현이다.

 

다른 인간과 함께할 자유에 대한 책임은 '체온'이다. 그 체온은 감정을 만들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체온을 책임질 자신이 없다면, 인간을 욕망하지 않는 것이 윤리적이다.


정윤석 작가는 인터뷰 중 애초에 작가가 섹스돌과 ‘함께 사는’ 사람을 담아 다큐멘터리를 만들려 했던 계기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주인공은 섹스돌과 ‘함께 산다’라고 주장하지만, 작가의 인터뷰 중 말마따나 그의 집에는 숟가락도 한 개, 젓가락도 한 쌍이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얼마나 무책임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설명이 여기에서 멈춘다면, '그렇다면 정말 이것이야말로 인간 소외를 다룬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렇다. 작가가 작품과 작품 설명에서 보여준 것이 여기까지이다. 그래서 작품 감상자들에게 그러한 ‘오해’를 심어줄 수 있었다.


섹스돌은 100%에 가까이 여성 신체의 형상만을 한다. 섹스돌은 인간의 문제에 인간이 없는 상황이 아니다. ‘여성 상품화’의 문제에 ‘여성’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내일’에서 ‘섹스돌과 함께 사는 사람’ 부분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욕망’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여성 신체에 대한 욕망’을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을 깊이 있게 관찰하지 않으면 ‘인간 소외’와 ‘여성 소외’가 비슷해 보이는 것도 같다. 왜냐하면 다큐멘터리 ‘내일’에서 ‘섹스돌 아저씨’ 부분은, 확실히 ‘인간 소외’를 다룬다고 볼 수 있는 ‘AI 정치인’ 장면과 번갈아가며 보여지게끔 편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깊이 고민하며 보지 않으면 충분히 헷갈릴 만하다.


작가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작가의 의도가 교묘하게 엇갈려 있어 감상자에게 오해를 심어줄 수 있는 작품은 건강한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겨운 작품도 건강해야 한다. 그것이 필자가 정윤석 작가의 ‘내일’이 좋은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유이다.

 

 

 

3. 정윤석 작가는 '섹스돌'을 전시하고 있는가?



대답부터 하자면,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아니다.’ 2번 질문에서는 작품이 건강하지 못한 이유를 다루었다. 3번 질문에서는 작품에 대한 비난이 건강하지 못했던 이유를 다루어보고 싶다.


정윤석 작가가 전시한 것은 ‘섹스돌 제작 과정’이지 ‘섹스돌’이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하는 개념이 있는데, 바로 ‘재현’과 ‘현실 담기’, '모방' 그리고 ‘실물’이다. 앞서 제시했던 질문 중 일부를 다시 떠올려보자.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폭력이 될 수 없다.

 

-일어났던 일을 재현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폭력이 될 수 있다.

 

-현실을 흉내낸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모르겠다.

 

-일어난 일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은 폭력인가?

모르겠다.

 

물론 여기에 반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위의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변을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자도 모르는 불변의 진리를 필자가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필자는 위와 같은 관점에서 글을 썼음을 밝힌다.


필자가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목격한 대중의 정윤석 작가에 대한 비난의 이유는 ‘섹스돌을 전시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개의 섹스돌도 전시하지 않았다. 그가 전시한 것은 오직 ‘섹스돌 제작 과정’이었다. 그는 단 한 개의 섹스돌 ‘실물’도 가져오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섹스돌 제작 과정을 ‘재현’하지 않았다. 말장난하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으나 셋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수월한 이해를 위하여 필자는 본 사안을 현재 활발히 진행 중인 동물해방운동과 비교하여 살펴보려 한다.

 

동물해방론자들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비윤리적인 것으로 여긴다. 이 문장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면, 그래서 동물해방론자들은 공장식 축산, 상업적 어업 등을 모두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서부터는 반대가 많아진다. 반대가 더 많다. 그러나 앞의 문장에는 찬성하고 뒤의 문장에는 반대하는 것은 사실 상당히 모순적인 일인데, 가장 많은 ‘동물학대’가 이루어지는 곳은 ‘개 도축장’이나 ‘펫샵’이 아니라 소/돼지/양/닭 등의 도축장(공장식 축산)과 바다 및 양식장(상업적 어업)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육류 소비를 줄일 것을 주장하기 위해 도살장의 ‘풍경’을 담아 대중에게 보여줌으로써 공장식 축산 과정에서의 동물학대 실상을 알린다. 동물을 학대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동물이 학대당하는 장면을 담는 것이다. 그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지언정 ‘재현’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이 공장식 축산과 상업적 어업으로 인한 동물 학대 실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동물 한 개체를 더 살해하도록 유도한다면(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부정하는 모순적인 일일 것이며, 새로운 폭력을 생산하는 데에 가담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건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저 벌어지고 있는 일을, 현실을 ‘담을’ 뿐이다.


그렇다면, 새로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폭력이 행사되고 있는 장면을 담는 것도 폭력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그것마저도 폭력이라면, 모든 언론을 폭력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언론의 역할이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필자는 ‘재현’은 폭력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 담기’는 폭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섹스돌 공장이 운영되는 것에는 작가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저 일어나는 일이다. 공장과 작가 간 상호동의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담는 것, 그 행위 자체는 차라리 언론이었을지언정 폭력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폭력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애초에 작가는 섹스돌을 전시한 것이 아니므로 ‘섹스돌을 전시했음’이 비난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다음은 현실의 모방에 관한 고민을 할 차례이다. 분명 실리콘인 것을 아는데도, 작가가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하듯 섹스돌 공정 과정에서는 '인간이 물성을 이기려 하는 작업'이 반복되는데, 이것은 정말 역겹게 보인다. 상상 이상으로 역겨웠다. 헛구역질이 났다. 다시 한 번, 작가가 역겨운 것이 아니라, 장면이 역겨운 것이다. 그 장면은 마치 제조자가 여성의 신체를 학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정윤석 작가의 전시실에서 무엇을 전시하고 있는지에 관하여 대략적으로는 인지한 채로 전시실에 입장했다. 따라서 영상과 사진에 나오는 ‘살점 같은 것’은 ‘실리콘’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리콘을 누르고, 자르고, 찢고, 주무르는 과정은 필자의 속을 메스껍게 했다. 붉은 색소가 발린 실리콘이 그라인딩되는 장면은 특히 역겨웠다. ‘살점 같이 생긴 실리콘’이 ‘피 같이 생긴 붉은 색소’와 함께 갈려 나간다. 생김새가 비슷하기에 살점이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따라서 역겨웠다.


비슷한 이유로, 제조 공정이 포착된 사진들이 여성의 신체에 폭력을 가하는 것과 유사하기에 그것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합리적인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진들이 ‘여성 신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섹스돌 사용을 옹호한다’와 같은 비난 역시 있는데, 그 의견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전시실에 전시된 사진은 섹스돌 제조 과정이 얼마나 흉측한지를 보여준다. 인류 보편적 윤리 규범이 내재된 사람이라면, 심지어 섹스돌 구매 의사가 있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섹스돌 사용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게 할 공간일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필자의 생각일 뿐이다. 비슷한 장면을 보임으로써 트라우마를 일으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의견 역시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결코 실제는 아니나 실제와 유사한 장면이 줄 수 있는 폭력성'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생명 윤리에 기반한 비거니즘과 관련된 논의와 엮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대체육(식물성 단백질)'의 문제와 아주 유사한 결을 보인다고 생각하였다.


대체육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고기와 아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대체육도 먹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는 비건 역시 존재한다. 생명 윤리를 이유로 비건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고기의 ‘모양’만 보아도 도살장의 모습이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면, 결코 고기는 아니지만 고기 모양을 한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분명 '고기 모양'이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육을 고기의 모양으로 만든 것은, 결국에는 어쩌면 ‘고기는 좋은 것’이라는 소수자를 존중하지 못하는 흔한 실수를 다시 범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인스타그램에 ‘비건’을 해시태그 하고 대체육 사진을 올리는 것도 폭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필자만 하더라도 대체육을 포함한 고기 모양을 보면 머릿속에 도살장의 풍경이 떠오른다. 다만 대체육임을 확인하면 안심하는 편이고 대체육은 좋아하며 잘 먹는다.


비슷하게 생각해보자. 본 작품 속에 담은 것은 분명 여성의 신체가 아니라 여성의 신체 모양을 한 실리콘이다.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결코 단백질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여성의 신체와 아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섹스돌을 사용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필자를 포함하여) 존재한다. 결국에 섹스돌은 여성 신체의 상품화가 극단에 이른 결과물이며,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것이 ‘진짜 여성의 신체이길 바라며/상상하며’ 사용하기 때문이다.


대체육 사진을 비건에게 보이는 것과 섹스돌 사진을 여성에게 보이는 것. 두 사안은 논리적으로는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심지어 동물해방론을 지지하는 비건 지향인인 필자만 하더라도 위의 두 사안을 동일선상에 올려두고 관찰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필자도 지금 정윤석 작가와 비슷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모르겠다. 그래서 필자에게 ‘현실을 흉내내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모르겠다’라고 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은 폭력인가?’에 관한 고민을 할 차례이다. 물론 언급하였듯, 정윤석 작가는 섹스돌을 전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정윤석 작가가 섹스돌 자체를 전시하였다면, 그것은 폭력이 될 수 있었을까?

 

우선 전시를 위해 '새로운' 섹스돌을 주문을 한다면, 더 깊게 생각할 여지가 없이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재현’이 폭력이 될 수 있음과 마찬가지의 논리이다. 만약 작가가 ‘전시를 위한 새로운 섹스돌’을 주문한다면, 불필요한 새로운 폭력이 생산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버려진 것들을 주워와 작품을 만드는 데에 사용한다면? 그때도 폭력이 될 수 있을까?


이 고민을 시작하였을 때 필자는 데미안 허스트의 ‘분리된 엄마와 아이’ 작품이 생각났다. 해당 작품은 문자 그대로 엄마 소와 아기 소를 수직으로 잘라 박제시켜둔 작품이다. 소의 장기가 MRI사진과 같이 (다만 실물으로) 다 드러나 있으니 비위가 좋지 않으면 찾아보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몇 차례 찾아본 필자 역시 볼 때마다 메스꺼움을 느낀다.

 

허스트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소를 죽였는지, 아니면 죽은 소를 사용한 것인지 모르겠다. 열심히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필자의 자료 탐색 능력은 허스트가 ‘죽은’ 동물을 사용한 것인지 동물을 ‘새로이 죽여’ 작품을 만든 것인지 정확히 확인시켜주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허스트는 ‘육식 지향인’의 이중 잣대를 효과적으로 비판하였다. 그가 보기에는 햄버거의 패티 역시 소의 시체였고, 그가 전시한 것 역시 소의 시체였다. 어떤 소의 사체는 ‘맛있는 것’,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어떤 소의 사체는 ‘역겨운 것’으로 여기는 대중의 이중성을 비판한 것이다. 물론 윤리적인 문제는 있지만 그의 비판은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위대한 작품'으로 남았다.


만약 허스트가 동물을 새로이 죽여 '재료'로 쓰기 위해 가져왔다면, 정윤석 작가(혹은 다른 작가)가 섹스돌을 새로이 생산해 '재료'로 쓰기 위해 가져온다면 차원이 다른 비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허스트가 죽은 동물을 ‘주워’왔다면, 정윤석 작가(혹은 다른 작가)가 버려진 섹스돌을 ‘주워’온다면. 물론 완성품이 허스트의 것과 같이 사회에 대한 효과적인 비판을 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여기에서 필자의 사고에 과부하가 왔고 필자의 뇌는 백기를 들었다. 무책임한 일이지만 이것에 관한 윤리성을 고민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다시 한 번 필자가 갈 길이 멂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보다 더 나아가는 고민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좋은 의견이 있으면 필자에게 공유해주길 바란다.

 

 

 

4. 2020 올해의 작가상은 ‘모두를 위한’ 올해의 작가상이었는가?


 

이러나저러나 확실한 것은, 올해의 작가상은 ‘모두를 위한’ 올해의 작가상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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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도의 올해의 작가상은 만 19세 미만은 배제한, '일부'를 위한 작가상이었다. ‘올해의 작가상’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수상 제도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런 거대한 '공공'의 수상제도가 분명히 대한민국 국민(한국 국적 아동의 경우)이자 세계의 시민인, 아동(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른 아동의 범위로 지칭)을 배제한 것은 본 '2020 올해의 작가상'이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부분에 관한 논의도 있어야 하지는 않은가를 질문하고 싶었다. 올해의 작가상이 진행되는 동안 아동은 전시실에 입장조차 못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정윤석 작가의 ‘섹스돌 제작 과정 전시’를 보며, 그것을 본 대중들의 반응을 보며, 그리고 그것을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선정한 국립현대미술관을 보며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만약 필자의 논리에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반론해 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완벽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그것만 기억한다면 언제나 건강한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최호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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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내용 흥미롭게 잘 읽어보았습니다. 본인은 여성이라 그런지 다른 시각으로만 저 전시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직접 보러가진 않아 위 내용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를 나눌 순 없겠지만 마지막 작가상 부분에 대해 생각이 들어 댓글 남깁니다. 물론 공공의 상이고 아동이 제외되었지만 필자께서 말한 폭력적임 을 보여주는 전시라면 성인으로서 미성년자인 아동에게 이를 보여주지 않음이 확실히 맞는 판단이겠지요. 아마 허용했다면 새로운 트라우마가 미성숙한 아이에게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성년자는 아닌 아이도 있겠지만 확실히 성인보다는 경험한것이 적어 미숙하다는 것을 성인 되고서야 느꼈거든요. 다시 내용으로 돌아가서, 그런 좋은 취지를 담고있는 전시가 아동은 볼 수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작가상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만큼 예술계에 슬픈일은 없을겁니다. 조금 폭력적이고 과감한 내용을 담는 순간, 나의 생각이 좋은 내용을 담고있다는 심사조차 받지 못할테니까요. 모두를 위하지는 못했다기보다 아이들이 자라 저런 좋은 내용의 전시가 있었다며 기록을 남겨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물론 에디터님의 말이 틀렸다는게 아닙니다! 저도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정성스러운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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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름
    • 사람안녕하세요, 글쓴이입니다. 우선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또, 독자님의 소중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 사실 저도 그 부분에 관하여 많이 고민하였어요! 독자님 말씀이 맞아요. 만약 이번 전시를 아동이 볼 수 있도록 허용했다면 아동에게 새로운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전시 자체는 미성년자가 볼 수 없게끔 하는 것이 더 적절했겠죠. 저도 독자님과 정말 비슷한 것을 느꼈는데, 어렸을 때는 욕설이 들어간 음악이라는 이유로 미성년자 청취불가 처리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어요.(물론 지금도 부분적으로는 반대하지만요.) 그렇지만 그저 그렇게 생각한 것 역시,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조금은 미성숙한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1. 이번 전시는 아동이 관람할 수 없다. 그렇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전시가 특정 집단을 배제하고 진행되어도 되는 것인가?
      2. 그렇지만, (독자님께서 말씀해 주셨듯) 정말 좋은 내용의 전시인데, 특정 집단이 접근할 수 없다고 하여 수상 대상에서 제외되어도 되는 것인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어느 쪽으로 무게를 기울여야 하는지 모르겠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번과 2번 사이의 고민은 충분히 비판적으로 고려해볼 거리라고 생각하였는데, 거의 아무도 이것에 관하여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만 같았거든요.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 이 전시에 관해 의미있게 대화할 수 있는 대화 주체는 기본적으로 '성인'이었으니까요. 아동은 전시를 볼 수 없었고, 볼 수 없었으니 의미있게 대화할 수 없었죠. 그리고 의미있게 대화할 수 없었으니 다시 한 번 배제되었고요.

      논리에 의해 또 의아했던 점은 심지어 정윤석 작가의 '내일'이 비판을 받은 큰 이유 중 하나가 '여성'이라는 사회 집단을 배제했다고 볼 수 있을 창작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아동'이라는 사회 집단을 배제한 것에 관하여서는,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는 것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랄까요...! -> 물론 이것은 제 자신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논리적인 계산으로 도출된 것이에요. 이 생각이 들었을 때 저는 제 자신에게 반박하였는데, 이는 '여성'에게 더 무거운 윤리성을 요구하는 흔한 실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채식주의자에게 '그럼 채소는 고통을 안 느껴?'라고 묻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달까요.

      여기에 관하여 더 깊게 고민하게 되었던 것은 제 개인적인 일화(?)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적어도 이번 전시가 있기 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미술관이었고, '올해의 작가상'은 제가 15살부터 18살까지 매년 갔던 전시였거든요. 만약 제가 17살이었을 때 '2020 올해의 작가상'이 열렸는데, 제가 17살이라는 이유로 작품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조치를 당했다면 정말 억울했을 것 같아서요.

      그렇지만 다시 한 번 2번을 고민하며, 아동이 볼 수 없다는 이유로 후보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는 더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 같아요. 독자님 말씀처럼, 어쩌면 아동이 성장하여 '저런 좋은 내용의 전시가 있었다'를 알려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하지만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그 어떤 전시보다도 '동시대성'이라는 것을 강력한 정체성으로 가지는 전시를 '동시대성'이 사라진 시기에 접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새롭게 조금 들었어요. 어쩌면 그 전시의 주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성인'만 있기에 쉬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아동은 '부족한 시민'이라는 '보편적으로 내재된 잘못된 인식(적어도 제 생각에는)'을, 국가 기관에서 인정한 것이 되지 않을까요?

      혹여나 저의 질문이 '따지려 드는 것' 같이 보일까봐 걱정이 되네요. 그러나 제 추가적인 질문들은, 독자님의 건강한 질문에 대한 반가움이었을 뿐이라는 것 역시 알아주신다면 감사드릴 것 같습니다...! 글에도 기재하였듯, 이런 건강한 대화를 저는 몹시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정성스러운 댓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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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
    • 푸름필자님의 말이 공격성이나 다른 비난적인 글이 아니기 때문에 따지려 드는 것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세상은 넓고 의견은 다양하니까요.

      확실히 아동에 참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죠. 생각을 좀 더 해봐야 할 부분도 맞는듯 합니다. 하지만 뭐랄까, 제가 이 주제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한다면 역시 아동은 제외될 듯 싶어요. 이것저것 하나하나 고려해본다면 물론 아동이 참여하는 것도 남들이 막을 이유가 없고, 자유를 억압하는 느낌이 들긴 하겠죠. 제가 학생때도 왜 학생이라는 이유로 제한되는게 많지? 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음,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아동의 정의에 대해 보편적으로 내재된 잘못된 인식 이라는 부분은 저와 생각이 조금 다르네요. 잘못된 인식이라기 보다는 많은 경험을 하지 못해서 판단이 미숙하다 의 느낌이에요. 물론 제 생각이 그렇다는 거에요! 사실, 아동의 자유, 그러니까 학생이라는 이유로 제한되는 것이 억울하여 그 자유를 하나 인정해주기 시작하면 모든것은 한 아동의 자유니까 담배도 술도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을 담고있는 모든것도 허용되기 시작할거라는 생각이 있거든요.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성숙한 아동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그 개인들을 위해 허용하기 시작한다면 충격을 받을 아이들이 더 많다고 느껴요. 실제로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고 나서 각종 유해매체들을 쉽게 접하기 시작한 청소년층이 (물론 전부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수가 그렇지 않나, 라는 의견이에요.) 정말 덜 자란 초등학생도 화장을 하고, 안좋은 단어와 폭력적인 행동을 따라하는 등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요. 저는 이부분을 학생의 자유이니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고 단정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필자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는 비건 또한 아닌 사람이라 채식주의자 예시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얹기 조심스럽네요. 육식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는 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어느 부분에선가 비건분들을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할까봐 조금 두려워서요. 짤막하게 남기자면 저는 생물학적 관점(?) 에서 식물과 동물이 크게 어떻게 다른가 생각해보게 된답니다.

      아동을 조금 부족하게 생각하는걸 국가에서 인정한 것이 아닌가 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사실 음. 저는 이미 어느정도 국가에서는 아동을 조금 덜 성장한 인격체로 보는게 맞다고 느껴요. 애초에 아동과 성인의 자유도는 너무 다르고 조금 더 아동의 건강한 정신적 성장을 위해 막는 부분이 많으니까요. 물론 원하지 않은 보호를 받는 아동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억울하다고 느낄 수 있겠습니다만... 신체도 정신도 확실히 성인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생물학적으로도 맞는 결과니까요. 제가 이쪽과 관련된 사람인지라 너무 이쪽 방면으로만 이야기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국립' 이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생겨난 것이라고 느껴요. 올해의 작가상이지만 어찌되었던 아동에게는 유해할 수 있다는게 우선됐달까요.

      사실 아동의 범주에는 거의 성인과 다름없는 고등학생도 포함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 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요. 지금도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야하고, 그들도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바뀌고 있는 권리들도 있지요. 선거권 처럼요! 의견을 총체적으로 이야기 해보자면 학생들의 좋은 이야기를 위해 좋지 않은 큰 결과가 예상된다면 사회는 이를 막는걸 택할거라는 거에요. 그 학생들은 억울하겠지만 보호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결과다.. 같은. 슬픈 이야기지만요.

      제가 너무 두서없이 작성한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을 작성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담다보니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고, 조금 앞뒤 맞지않는 비논리적인 이야기가 담겨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짧은 글에 이렇게나 긴 대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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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강
    •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폭력이 될 수 없다.

      -일어났던 일을 재현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폭력이 될 수 있다.

      처음 이 질문을 봤을 때, 질문 자체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말씀해주시는 부분을 읽어보니 바로 질문이 와닿더라구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기에 순간 멍했습니다. 그렇네요. 그렇네요. 이런 말만 반복했을 뿐입니다.
      워낙 의견이 많은 말이기에 제가 에디터님의 의견에 동의/비동의를 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워낙 부족한 사람이라 저의 의견에 확신이 없어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맞구요. 하지만... 에디터님께서 설명해주신 저 부분이 너무 인상깊어 댓글 달고 싶었습니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해주신 점에 감사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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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름
    • 백강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 글이 독자님을 설득할 수 있었다니 더더욱 영광이네요:)

      맞아요. 옳고 그름이 없는 문제이기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것 모두 어렵지요. 이렇게나 깊이 고민하며 읽어주셨는데 부족하다니요!

      성심성의껏 건강한 감상평 남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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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te95
    • 안녕하세요. 재밌게 읽어 이렇게 덧글 남깁니다. "섹스돌과 ‘함께 사는’ 것은 ‘일방적인’ 욕망 해소를 위해 자유만을 누리고 책임은 회피하려 하는 것이다." 라는 문장을 읽으니, 에디터님이 생각하는 '인간의 욕망'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에디터님 말씀의 전제는 '욕망의 표현은 권력과 결부되어있으며, 욕망은 컨트롤될 수 있고, 나아가 컨트롤 해야하는 것'인 것 같아요. (이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기득권 남자의 성적 욕망으로 정의하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전시회가 일종의 폭력인가 아닌가에 대한 고민을 하신 것이겠죠?). 그렇다면 에디터님이 정의하는 욕망은 무엇이고, 표현할 수 있는 욕망은 무엇인가요? 나아가 권력자의 욕망과 피해자의 욕망은 차이가 있나요?(예를들어 여성용 자위기구를 재현했다면 그건 용납이 될까요?)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면, 어느 영역에 있는걸까요? 저의 가치관이 들어간 질문이고, 에디터님의 가치관이 들어간 답변이니 새로운 사고를 접한 관심의 질문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흥미로운 주제에 먼저 대화의 문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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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름
    • gate95안녕하세요 소중한 독자님! 우선 재밌게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히도 질문해 주신 것이 많아서, 두 개의 댓글로 나누어서 답변드리겠습니다.

      흠, 제가 정의하는 욕망이란 무엇인가라... 표현할 수 있는 욕망은 무엇인가라...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 질문이네요! 좋은 질문 감사드려요:)

      우선 제가 욕망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욕망'을 '자유'혹은 '자유의 추구'로 보는 것 같아요. 식욕도 배고픔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고, 물욕도 그 사물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자유에의 추구이니까요.

      다음으로, 독자님께서 여쭈어 보신 '표현할 수 있는 욕망'은, 음 조금 더 제 스타일(?)로 말씀드리자면 표현'해도 되는' 욕망은, '책임 질 수 있는 자유' 그러니까 '책임 질 수 있는 욕망'입니다.

      표현할 수 '없는' 욕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떻게 해서든지 '책임 질 방법이 없는' 욕구가 있을 뿐이지요. 책임 질 수 없기에 표현'해서는 안 될' 뿐입니다.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달까요?

      예를 들어 설명드려 보고 싶네요. 어떤 사람의 '욕구'가 '아동성애'라면 그건 그 생각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러한 욕구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정말 비윤리적인 일일 것입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욕구이죠.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뉴스에서 확인하듯, 분명히 소수의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욕구이고요. 그러나 웬만한 경우 그 사람이 "나는 아동 성애자이다."라고 말할 리는 없고(고백), 따라서 '아동 성애'라는 비윤리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러한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려면 그 사람이 '표현'하기 전까지는 모르잖아요. 욕구가 표현되어 '현실'이 될 수 있죠' 다만 그 욕구는 표현되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생길 것이고, 욕구표현자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 욕구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덧붙이자면 '아동성애'를 가진 이를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타인이나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교화되어야'하는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는 동물이고, 억제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타인의 이익을 훼손할 욕구'라면 교화하는 것이 맞겠지요.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럼 '타인의 이익을 훼손하는 욕구'는 누가 정하는 것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이지?라는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여러 사상, 특히 특정 정치 이념을 '타인(사회 전체)의 이익을 훼손한다'라는 이유로 '몰살'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너무 어려운 고민이지만, 꼭 해봐야 하는 고민이겠군요.

      아무쪼록, 예시를 통한 제 설명의 요지는,
      1. 표현할 수 '없는' 욕망은 없다.
      2. 하지만 표현 '해서는 안 되는' 욕망은 있다.
      3. 그러므로 표현 '해도 되는' 욕망은, 욕망표현자가 '책임 질 수 있는' 욕망이다.
      4. '책임 질 수 있는' 욕망은 '타인의 이익을 훼손하지 않는 욕구이다.
      5. 그러나 어떤 욕망이 '타인의 이익을 훼손하는 것'인지 선을 긋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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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름
    • gate95권력자의 욕망과 피해자의 욕망 사이의 차이라... 우선 예시 자체에 관한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사실 독자님께서 제시해 주신 예시는 제가 칼럼을 쓰며 자료를 수집할 때 많이 목격한 반론이기도 했지요. 물론 건강한 토론이 목적이신 존중을 곁들여주신 독자님과, 비꼬기가 목적이었던 분들을 동일선상에 놓으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러한 예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부터 던져보고 싶습니다. 저는 '섹스돌'과 '여성용 자위기구'가 '치환' 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섹스돌'은 단순한 '자위기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독자님께서 '여성용 자위기구'라고 말씀하시며 떠올리신 것은 아마도 남성 성기 모양을 한 물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주제의 문제이지만, 한 가지 더 메타적으로 고민해보자면 과연 '남성 성기 모양을 한 물건'이 '여성용 자위기구'인가에 관해서는 또 한 번 고민해 보아야겠죠?)

      아무쪼록, '남성 성기 모양을 한 것'은 '자위기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섹스돌'은 '단순한' 자위기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자위를 할 때 사용할 텐데 왜 '자위기구'가 될 수 없느냐를 여쭈어 보신다면요.

      섹스돌은 '전체'입니다. 섹스돌을 보면 '여성 신체 전체의 모양이네'라는 생각이 들지, '여성 성기의 모양이네'라는 생각이 들진 않잖아요...?! 따라서 섹스돌은 한 여성 전체의 모방입니다. 여성이 떠오르게끔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떠오를 수밖에 없게끔 합니다. 따라서 섹스돌은 '자위'기구라기보다는 '성 기능(자위 기능)을 특화시킨 여성 신체 모방품'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죠.

      반면 남성 성기 모양을 한 물체는 '부분입니다. 전체가 아니지요. 남성 성기 모양을 한 물체를 보면 '남성 성기 모양이네'라는 생각이 들지, '남성 신체 전체의 모양이네'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잖아요..?! 따라서 남성 성기 모형은 남성 성기 모양의 모방입니다.

      전체는 그저 일부의 합일까요? 적어도 저는 전체는 일부의 합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전체'인 섹스돌과 '일부'인 '남성 성기 모형'이 치환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권력자의 욕망과 피해자의 욕망의 차이'에 대한 예시로 '섹스돌'이 아니라 '남성성기모형이었다면'을 드는 것은 논리적으로 결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독자님의 의견이 '나빴다'거나 '틀렸다'라고 말씀드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전시된 것이 그저 '여성 성기 모형'이었다면, 그때에는 '남성 성기 모형'으로 대체되는 것을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흠, 지금에 있어서는 남성 성기 모형이든 여성 성기 모형이든, 그것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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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름
    • gate95두 댓글이면 될 줄 알았는데, 더 필요하겠군요! 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야말로 이렇게 흥미로운 주제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건강한 대화를 이어나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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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름
    • gate95흠 권력자의 욕망과 피해자의 욕망의 차이라! 음, 우선은 '권력자'와 '피해자'라는 단어를, '기득권(혹은 다수)'과 '소수'라는 말로 바꾸어 본 후 설명해 드리고 싶네요! 저는 기득권의 욕망은 '어쩌면 폭력'이 될 수 있고, 소수의 욕망은 '어쩌면 마땅한 것'이 될 수 있음이 차이라고 생각해요.

       글에서도 한 번 언급했던 수잔 발라동이 다시 떠올랐어요. 수잔 발라동은 여성 누드를 그려서 논란이 되었죠. 그렇다면 발라동 이전에는 여성 누드를 그린 사람이 없었을까요? 아니죠 많았죠. 수잔 발라동은 '평범한' 여성의 누드를 그렸는데, '평범한' 여성의 누드를 그린 것이 그가 최초였기에 논란이 된 것이었을까요? 이것도 아니죠. 발라동은 여성이었는데,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이 여성을 그렸음이 논란이 된 것이었죠. 만약 소수의 욕망 표현과 다수의 욕망 표현이 '동등한' 것이라면, 발라동의 행위 역시 기득 사회에 대한 '폭력'이다고 봐야겠죠.(제 생각이 아니라 논리적 계산을 따르자면요) 비록 '여성의 신체는 죄악'이라는 관념이 왜곡된 그리스도교적 관념에서 비롯한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다수가 굳게 믿고 있던 것이었는데, 발라동이 깨뜨려부순 것이잖아요. 그런데 적어도 그 부분에 관하여서는, 윤리적으로 성장한 지금에는 그것은 '어쩌면 마땅한' 것의 수준도 아니고 '아무런 문제가 될 것도 없었던' 것으로 보이잖아요...!

      비슷한 예시로 동양의 전통적이고 지배적인 사상은 유교 사상이죠! 유가적 사고에서는 '나의 신체'는 '오로지 내 것'이라고 말 할 수 없고, 부모님께서 주신 소중한 것이므로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되잖아요. 이게 유교의 욕망이고 기득권의 욕망인데, 따라서 현재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는 '타투' 역시 기득권에 반하는 욕망일 수 있겠죠. 그렇지만 저는 자신의 신체는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는데, 그러한 관점에서 타투를 바라보면 그건 다수에 대한 폭력이라기보다는 그저 '마땅한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하지만 반대로, 기득 논리인 유가적 사고가 타투하는 것은 그들의 욕망에 반하는 일이므로, 그들의 욕망의 성취를 위해 타투를 금기시킨다면, 그건 어쩌면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요새 계속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제 친구가 "한국에서 남자를 차별하는 건 불가능하지. 미국에서 백인을 차별하는 게 불가능하듯이 말이야."라고 말했던 게 계기였어요.

      애초에 '소수의 다수에 대한 폭력'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소수자는 '마땅한 것'인 그들의 욕망을 외치고 있을 뿐인데, 만약 그것이 기득권의 욕망과 같이 폭력으로 보인다면, 발라동 떄 그랬듯, 그저 우리는 아직 윤리적으로 덜 성장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욕망의 표현이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면 어느 영역에 있는 것일까라..! 정말 어려운 고민이네요. 그래서 사실 저도 잘 모르겠다는 답변밖에 드릴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그러나 덧붙이자면, 폭력과 예술은 한끗차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폭력인 줄 알았는데 예술이고. 예술인 줄 알았는데 폭력이고. 전자를 효과적으로 해내는 사람이야말로 위대한 예술가라고 불릴 수 있는 것 같아요.

      부족한 제가 더 많은 고민을 해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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