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제주에 불씨를 피우는 작은 서점 [공간]

세화리의 따뜻한 책방, 제주풀무질
글 입력 2021.03.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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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물고-싶은-공간을-씁니다 ① 

 

 

여행을 즐기는 방법



혼자 하는 여행에 즐거움을 불어넣어 주는 장치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특별한 소품을 이용하거나 일정한 구도로 사진을 찍기, 여행을 위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만들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적함을 달래줄 책을 여행 메이트로 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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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어느 날, 서울보다 조금 더 일찍 봄이 찾아온 제주도에 혼자 다녀왔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느릿느릿한 휴식이었기에 도착한 당일에도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제주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오늘은 어디에 가볼까- 하며 가장 먼저 찾은 공간은 '서점' 이었다. 3박 4일을 나와 함께해 줄 책을, 기왕이면 여행지의 동네 책방에서 찾고 싶었다.

 

지도 앱을 켜고 '서점', '책방' 등을 검색하던 와중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세화에 있는 '제주 풀무질'. 서울에도 '풀무질'이라는 이름의 서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관련이 있는 걸까? 호기심을 품으며, 그날의 일정은 제주 풀무질에 들러 책을 한 권 사는 것으로 시작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대학가를 지키던 서점들


 

서울 풀무질에 직접 방문한 적은 없지만,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때는 서점의 역사를 주제로 한 과제를 위해 자료조사를 하던 시기, 1980년대부터 2000년까지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문사회과학서점'이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생운동이 성행하던 시기에 등장한 이러한 서점들은 학생들에게는 지식 창구이자 아지트 같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대형 서점, 온라인 서점이 발달하고 사회 분위기도 변화함에 따라 많은 대학가 서점들이 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성균관대 앞에 위치한 '풀무질'은 지금까지도 인문사회과학서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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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질 역시 폐업 위기에 처한 때가 있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26년간 책방지기로 자리를 지켜오던 은종복 사장님은 서점을 정리하기 전, 마지막으로 옛 정신을 이어받을 사람을 찾았고, 출판사를 운영하는 젊은 청년들이 손을 내밀었다.

 

이후 '책방 풀무질 살리기'라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서도 많은 사람이 응원의 힘을 보탰고, 현재 풀무질은 여전히 성균관대 앞을 지키는 대표 서점으로 남아 있다.

 

 

 

여전히 책이 좋아서, 제주 풀무질의 탄생


 

그렇게 풀무질을 젊은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사장님은 제주로 내려오셨다. 오랜 시간 책방을 운영하느라 누리지 못했던 쉼을 선물하러 찾은 곳이었지만, 우연히 또다시 책방을 열 기회가 생기셨단다.

 

그렇게 제주 동쪽,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세화에 제주 풀무질이 문을 열었다. 그날도 사장님께서 아침 일찍 나와 책방을 쓸고 닦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얼마나 책과 이 공간을 사랑하시는지 느낄 수 있었다.

 

 

누구나 저마다 아픈 삶을 산다

시를 쓰는 것도 좋지만

삶이 시인 것이 더 좋다 

 

- 제주 풀무질 은종복 씀

 



풀무질에 더해진 새로운 색깔


 

제주 풀무질 곳곳을 둘러보면 책방 지기님의 취향과 손길을 발견할 수 있다.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추천 책 100선이 붙어있는 벽면, 책방 한구석 마련된 서울 풀무질과 사장님의 옛이야기가 담긴 섹션, 중간중간 편하게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자리도 눈에 띄었고, 또 다른 책방 지기인 사장님 아내분이 손수 만든 책갈피도 만날 수 있었다.

 

해가 드는 위치에서 곤히 낮잠을 자다가 사장님이 밖으로 나가자 쪼르르 달려가서 지켜보는 귀여운 반려견 광복이도 이 서점에서 놓칠 수 없는 포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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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의 핵심인 책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여행하다가 편하게 읽기 좋은 에세이나 소설류, 세상에 필요한 목소리를 더하는 책들, 우리 삶을 더 풍족하게 해줄 쓰기에 관한 책들 등 풀무질만의 큐레이션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책과 읽기 모임 등을 통해 사회적인 담론을 나누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여전했지만 '여행지'와 '동네 책방'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만나 새로운 풀무질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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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지키는 공간


 

사장님과 실컷 수다를 떨고, 풀무질의 구석구석을 눈에 담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번 여행을 함께 할 책을 고르려는 목적을 잠시 잊고 공간에 푹 빠지고 만 것이다. 구경하다 보니 눈에 밟히는 책들이 많아 양손 무겁게 떠나고 싶었지만, 이미 짐으로 꽉 찬 나의 배낭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제목이 마음에 드는 단편 소설집 한 권을 골랐다.

 

계산을 마치고 사장님께서 제주 제2공항 건설 반대에 관한 소책자를 읽어봐달라며 함께 건네주셨다. 제주에 관광객이 늘어나면 책방에 손님이 많아지겠지만 그것보다 제주가 가진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말이다. 그렇게 풀무질은 오버 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제주를 지키는 작은 손길을 내밀며,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불씨를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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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내가 방문한 풀무질의 모습은 올해 7월까지만 만날 수 있다.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지금의 공간에서 계속 서점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같은 동네 안에서 서점을 지속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하셨으니 금방 새로운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지금의 제주풀무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후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 여행하면 자기 사진을 담기도 쉽지 않느냐면서 사장님께서 먼저 제안해주셨다. 여행의 시작부터 따스한 공간과 사람을 만나고 남은 일정을 함께할 새 책도 생겼다. 조금 더 무거워진 가방만큼 왠지 모를 든든함을 얻은 기분이다.

앞으로도 이곳이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공간으로 남았으면 한다. 나에게 잔잔하지만 기분좋은 바람을 선사한 이 작은 서점이 계속해서 해나갈 '풀무질'역시 기대가 된다.

 

다시 제주에 가면 안부를 전하러 들르고 싶은 공간이 하나 더 생겼다.

 

 

[박혜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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