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가 너무 멀리 떠날 필요 없기를 - 정말 먼 곳

글 입력 2021.03.14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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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틀린 게 아니라는 오랜 가르침을 참 오래도록 받아왔지만,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건, 이 세상이 여전히 그것을 배우지 못한 세상이기 때문이라는 걸.

 

그렇기에 이 세상에는 세상과 멀어지는 식으로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상식이라 칭하는 고정관념 안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렇기에 다른 존재라고 인식되는 사람들.


‘다름’을 들키는 순간 틀린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걸 알고 있는 그들은, 그렇기에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아 떠난다. 편견, 고정관념, 수군거림, 시선…그 모든 것들이 북적이는 세상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정말 먼 곳’을. 진우(강길우)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화천의 한 시골 목장에 정착하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의 진우는 과연 평화로워 보인다. 어린 딸 설(김시하)이는 다행히 양을 좋아하고, 목장주인 부녀 중만(기주봉)과 문경(기도영)은 가족처럼 매 끼니를 함께할 정도로 화목하다.

 

마을 사람들과도 무난하게 지내고 있고 무엇보다 이 마을에는 그가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외딴 무인도(그는 이 섬을 소개할 때, “정말 먼 곳”이라고 말한다)가 있다. 그는 그곳에서 홀로 낚시도 하고 야영도 하면서 정말이지 먼 곳에 와있는,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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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방감이 그에게 어떤 희망을 준 것일까. 진우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사랑하는 연인인 현민(홍경)을 마을로 부른다. 문제는 없어 보였다. 사교성 좋고 젊은 시인인 현민은 주민 센터에서 시 쓰기 강좌를 하나 맡게 됐고, 천성이 착한 마을 사람들은 이 낯선 외지인을 텃세 한 번 부리지 않고 반갑게 맞아줬다.

 

물론 둘의 관계는 비밀로 할 생각이었지만 어쩌면 진우는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된 후에도 이 평화가 깨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런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이 마을이라면, 이 사람들이라면. 자신은 그저 조금 다른 사람인 정도로만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보다 더 먼 곳을 찾아 떠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고.


그러나, 쌍둥이 여동생이자 설이의 친모인 은영(이상희)의 방문을 시작으로 그 희망은 그저 착각이었음이 드러나 버리고 만다. 은영이 진우로부터 설이를 되찾아가기 위해 다툼을 벌이다가 진우와 현민의 관계를 마을 주민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폭로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와 동시에 진우는 깨닫는다. 이 마을도 다를 바 없는 세상이었다는 걸. 곧바로 시작된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경멸 어린 눈빛에 둘러싸인 채로. 그는 그렇게 또 한 번 다름으로서 틀린 존재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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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장에서 진우가 누렸던 평화는 사실 처음부터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현민과 은영이 찾아오기 전까지 그 마을에서의 진우 스스로가 반쪽에 불과했으니까.

 

반쪽만으로 일군 평화는 결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그렇기에 진우는 처음부터 온전한 하나로서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았어야 했지만, 그리고 그 마을이 그런 곳이 되어주리라 믿고 싶었지만, 그는 이번에도 충분히 멀리 오지 못했다는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 야속한 현실을 다시 한번 통감한 진우는 겨우 합쳐진 반쪽을 다시금 밀어내며 떠나갈 채비를 한다. 자신을 늘 엄마라고 불러왔던 설이에게, 이제부턴 아빠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진우의 모습은 그래서 애달프다. 그것은 결국 ‘여자는 엄마, 남자는 아빠’라는 세상의 규격에 맞춰 자신을 정정하고 그에 맞지 않는 나머지 반쪽에 스스로 사망 선고를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진우는 그렇게 이번에도 반쪽의 죽음을 발판으로 나머지 반쪽의 살 길을 찾는다. 마치 목장에서 가축들을 지키기 위해 구제역에 걸린 소, 돼지들을 살처분하는 것처럼(극 초반에 진우와 중만은 지나가듯 구제역에 대한 대화를 나눈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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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그렇게 도망치는 것만이 방법일까. 남들과 다른 온전한 나로서 뿌리를 내리고 싶은 진우의 마음은 현민의 말처럼 정말 ‘욕심’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그는 앞으로도 자신을 죽이고, 세상과 멀어지는 식으로만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일까.

 

영화는 이에 대해 한 줌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진우의 다름을 알게 된 후에도 계속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중만과 문경은 그러한 희망의 대변인이다. 다른 걸 틀린 것이라 매도하는 이런 세상 속에도,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어쩌면 진우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다녔던 ‘정말 먼 곳’은 장소가 아닌, 그런 이들과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떠나려는 진우에게 마지막으로 새끼 양의 출산을 보여준다. 이는 죽은 양의 털을 묵묵히 깎는 진우의 모습으로 시작됐던 첫 장면과 명확한 대비를 이룬다. 첫 장면이 진우를 덮쳐올 반쪽의 죽음에 대한 암시였다면, 마지막 장면은 영화가 그런 진우의 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여 주고 싶은 한 줌의 희망일 것이다. 죽음으로 만연한 이 세상에도, 희망은 생명처럼 태어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새끼 양을 묵묵히 바라보며 진우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리고 진우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어느 쪽이든 이번엔 그가 너무 멀리 떠날 필요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으로부터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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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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