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I can't hear you, I can hear you. [영화]

글 입력 2021.03.04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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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을 볼 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이 사람에 대해 정말 많은 걸 알게 됐구나. 타인에 대해 이렇게까지 깊이 알아도 될까?
 
물론 오만이자 착각이다. 내가 그 사람을 완벽하게 통찰하고 있다는 치명적인 착각. 그러나 어느 정도는 분명 사실일 테다. 서로가 함께 공유한 시간과 대화는 큰 산을 이루어 가며 그의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고 때로는 예측까지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다 보면 가끔,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알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이 목격되는 순간이 있다. 영화 <맬컴과 마리>에는 바로 그러한 순간이 담겨 있다.

함께 집에 도착한 커플은 각자 다른 목적지로 향한다. 어딘가 밝지 않은 표정의 마리는 화장실에 박혀 있는데, 흥분이 가시지 않은 맬컴이 거실에 크게 틀어 둔 음악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마리는 소리친다. "I can't hear you!"이 다소 상징적인 시퀀스에 관객은 앞으로 흘러갈 두 사람의 싸움을 대충 짐작해볼 수 있다. 음, 한 쪽이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 소통의 부재가 발생하겠군.
 
그러나 결말을 향해 점차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 순간 알 수 있다. 이들의 다툼은 상대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역으로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발생하는 문제임을. 정작 마리는 아니라 부정하지만 그녀가 잔뜩 화가 나있다는 것도, 생각 없이 내뱉는 맬컴의 말과 행동의 바탕에 악취가 나는 오만한 자의식이 깔려있다는 것도 그들은 알고 싶지 않았을 테지만 빤히 보여 꼬집어 낼 수밖에 없었다. 즉 'can't'보단 'can'이 문제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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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컴과 마리> 스틸컷

 


러닝타임 내내 폭풍 같은 싸움이 몰아닥친다. 그들은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서로의 감정을 쏟아내며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기를 반복한다. 랩 디스전을 떠올리게 하는 그 폭발적인 다툼에는 지극히 잔인하고도 사실적인 언어폭력이 가감 없이 담겨 있다. 보는 사람이 지쳐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지독한 그 다툼은 끝날 듯 보이지만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전쟁은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았다'라는 표면적인 부분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수면 속 깊은 곳으로까지 그 범위를 확장해 나아간다.

끝내 건드려서는 안 될 곳을 후벼팠던, 맬컴의 경악스러운 언행이 마리를 완전히 짓눌렀던 욕조에서의 다툼이 끝나자 둘의 전쟁 역시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처럼 보인다. 대화의 마지막에서 건넨 진정 어린 말에 마리의 심기는 어느 정도 누그러뜨려졌고, 그녀는 맬컴에게 넌지시 화해의 제스처를 던진다. 마치 큰 산을 넘은 것 같은 안도감이다. 그때까지의 싸움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게 격렬하고 드라마틱 했기에 순간 영화가 이렇게 마무리되나? 싶어 스크롤바를 확인하는데, 맙소사. 딱 반 왔다. 잊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하루가, 아니 러닝타임 두 시간이 멀다 하고 싸우고 키스하고 싸우고 섹스하고를 반복하는 게 연애라는걸. 스크롤 바는 그들에게 더 싸울 시간이 충분함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다음 순간 맬컴의 소리가 고요를 깬다. "FUCK!"

쌈닭들도 아니고, 철천지 간의 원수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이면서 왜 이렇게까지 계속 싸우나. 그냥 좀 자면 안 되나. 보는 내가 피곤하다. <맬컴과 마리>의 리뷰 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람평들이다. 물론 보는 이의 감정을 탈곡기 마냥 털어 소모시키는 영화이기에 이러한 반응 또한 이해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난 전적으로 그들의 전쟁 같은 연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향하는 연애이자 내가 주로 따르는 스타일이므로.
 
터뜨릴까 말까 고민하다가도 결국에는 격렬하게 싸우며 모든 걸 쏟아붓는 연애, 그건 서로를 상처 주고 싶어서 안달 난 두 사람이 끼리끼리 잘 만난 게 아니다. 그 전쟁이 발발하는 이유는 반드시 입 밖으로 내뱉어 전해야 어떤 방식으로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말들에 베여 피를 볼 걸 알면서도 내가 싸움을 거는 까닭은 당신을 상처 주고 아프게 하려는 게 아니라 한순간이라도 빨리 원래의 우리로 돌아가고 싶어서다. 많이 부딪히고, 또 많이 대화를 나눔으로써 더 나은 우리가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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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컴과 마리> 스틸컷

 


그러나 끝날 듯하면서도 절대 끝나지 않았던 건 그들의 싸움뿐만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욕조 시퀀스에서 맬컴이 전에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을 때, 난 이로써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부서졌다고 생각했다. 이 대화가 끝난다고, 이 싸움이 마무리된다고 해서 과연 모든 갈등이 사라질까? 패인 자국은 남기 마련이기에, 설사 이 사건으로 인해 당장 종결되지 않는다 해도 언제든 상처가 벌어질 수 있는 살얼음판 같은 관계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점차 잔인한 이야기가 등장하며 싸움이 심화될 때마다 이들의 관계는 회생 불가의 단계에 다다랐다고 확신하곤 했으나, 두 사람은 매번 나의 예상을 뒤집었다. 서로가 증오스러워 미치겠다며 대결이라도 하듯 번갈아가며 소리를 지른 후에도, 넌 정말 구제불능이고 더러운 돼지 XX라 욕을 한 뒤에도.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든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엔딩 시퀀스에서 그간 유리에 의해, 거울에 의해 끊임없이 각자의 프레임으로 나누어졌던 두 사람이 마침내 액자를 연상시키는 하나의 프레임에 함께 담기자 길고 길었던 영화가 드디어 끝난다. 멀찌감치 거리를 두는 카메라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뒷모습만으로는 마치 그들의 침실에 걸려있던 그림처럼 평범한 여느 연인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왜 말도 않고 나왔냐며 다시금 싸움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는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싸움 또한 언젠가는 사그라들 것이고, 그들의 관계는 계속해서 유지될 것임을. 어쩌면 이게 바로 연애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미칠 것 같은 증오심에 불탈지라도, 이제 꼼짝없이 이별 말고는 답이 없겠다고 짐작할지라도 며칠 뒤면 서로의 배를 베고 누워 '그날은 그랬지' 함께 돌이키며 깔깔 웃어넘기곤 하게 되는 그 미스터리가 말이다.

이 커플의 미스터리에는 마리의 기여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일부러 여러 번 마리의 자취를 감추며 그녀가 떠나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칼로 장난을 치는 모습도, 또 마지막 싸움에서 사랑한다는 맬컴을 두고 침대를 벗어나는 모습도 그녀가 홧김에 그를 영영 떠나버릴까 마음을 졸이게 한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여기서 마리는 오히려 단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자신이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자신의 힘과 필요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슨 일이 있어도 꾸준히 너를 위해 이 자리에 남아있을 것임을 말한다. 오히려 긴장감의 부재로 인해 그녀의 존재가 당연시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러한 비폭력적인 방식을 취하는 모습은 비폭력적적이지만 오히려 그녀가 맬컴보다 더욱 단단하고 강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가 더 강한 이유는, 마리가 직접 말했듯 자신을 바라볼 줄 알기 때문일 테다. 영화는 두 사람이 다툼 후 각자의 방식으로 분을 삭이는 모습을 비추어주는데, 마리는 목욕을 통해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생각을 곱씹어 보는 시간을 갖는 반면 맬컴은 그들의 싸우던 집이라는 공간에서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계속해서 허공에 폭력을 행사한다. 그 순간마저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마리가 지적했듯, 그는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부분을 직시하는 걸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녀가 필요하다. 외면하고픈 그의 내면을 끄집어내어 그와 대면시키는 역할을 해주는 마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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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컴과 마리> 스틸컷

 


맬컴 본인조차 알지 못했던 그의 본성을 마리는 꿰뚫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 드는 마리의 자기혐오 근성 역시 맬컴에게 포착되었다. 우리는 애인에 대해 그가 본인의 어떤 점을 사랑하고 있고 또 어떤 점을 끔찍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다. 그에게 가장 커다란 상처를 안겨줄 수 있는 한 마디를 쥐고 있는 것이다. 영화 <맬컴과 마리>에는 연인 사이에서 오가는 그 긴밀한 권한이 담겨 있다. 보고 싶지 않아도 속속들이 보이는 서로의 모습에 어떠한 시선을 취하고 어떤 태도로 마주할 것인지 우리는 고민함으로써 더 나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테다.

내가 그를 들여다보는 만큼 그 또한 나를 통찰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가끔은 두렵게 느껴지지만, 감히 어렴풋 정의를 내려 보자면 사랑이란 서로에게 그럴 수 있는 권한을 주고받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에게 내 삶을 결정지을 수 있는 많은 부분을 내어주는 것. 나를 하늘 위로 높이 띄울 수도 있고 한순간 짓밟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는 막강한 힘을 주는 것.

 

 

[김수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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