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티파니 보석상 앞에 서 있는 오드리 헵번, 그 시간은 그녀의 빨간불 신호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1962
글 입력 2021.02.2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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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급변해도 여전히 명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잔상이 남는 영화들을 마주할 때면 그 영화의 분위기와 줄거리를 미리 짐작해본다. 짐작할 수 있는 요소로는 영화의 얼굴인 포스터, 배우들의 스타일을 대략 파악해 초두효과로서 역할을 관객의 입장에서 최대한 수렴하는 편이다.

 

생각해놓은 청사진에 일치했던 영화가 더 많지만,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은 내 예상에 백이면 백 전부 빗겨나 홀리 고라이틀리(오드리 헵번)의 안쓰러운 감정을 넘치듯 받고, 보듬어 주고 싶은 영화로 남겨졌다. 세기의 미인이자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불린 오드리 헵번이 풍기는 모든 ‘美’와 티파니 매장의 반짝반짝 빛나는 주얼리가 여성들에게 주는 부러움과 한 번쯤 꿈꾸는 환상들을 대신 이뤄주는 일차원적인 영화가 아니었다.

 

이는 홀리 고라이틀리(오드리 헵번)가 전 남편 닥터 고라이틀리에게 던진 말에서 보석함에 가득 찬 주얼리같이 환상적인 삶과는 반대로 흘러가는 그녀의 삶을 들을 수 있었다. “길들지 않을 걸 사랑하셨어요. 늘 야생짐승을 집으로 가져오셨죠. 날개가 부러진 독수리를 가져오셨고, 다리가 부러진 살쾡이를 갖고 오셨지요. 야생동물에 정주지 마세요, 그러면 그럴수록 강해져서 언젠가 굴속이나 나무 위로 날라 가요. 그리고 더 높은 나무로 가선 하늘로 날아가 버려요.”

 

여기서 홀리가 말한 야생동물은 자신을 뜻한다.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그녀를 소유하려는 남성의 간절함이 보이면, 그에게 종속되는 것을 강하게 거부한다.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큰 오산이다. 현시대에서의 관점에선 연인 관계에 독립적으로 서로에게 속하지 않는 그림이 일반적이고 현명한 관계의 어떤 형태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 영화가 나온 1960년대 시대적 배경에서 보이는 보편적인 남녀관계는 아니었다.

 

위에 보이는 대사만 따로 보면 강단 있고, 독립적인 여성처럼 보이지만 이는 홀리를 단단히 잘못 짚었다고 할 수 있다. 스폰을 받으면서 하루살이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에겐 그 누구보다 자신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하고 틀 밖을 비집어 어떻게든 나오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이 명작의 줄거리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한 인물이 달리기를 할 때 의도적으로 하얀 선을 이탈하려는 행위에 대해 어떤 사연과 이유가 있었는지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룰라 메이 반즈


 

홀리에게는 첫 번째 이름, 두 번째 이름, 세 번째 이름이 있다. 우선 첫 번째 이름 룰라 메이 반즈부터 알아보자. 홀리는 미국 남부 텍사스 주의 댈러스에 위치한 작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영화 내에서는 14살 이전까지 살았던 이 동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망쳤다는 사실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이유이자 원인이 되었던 비극이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녀의 전 남편이었던 닥터 고라이틀리가 변명을 하듯 룰라 메이가 불행했다고 생각하지는 말라고 당부하고, 집안일은 자신의 딸들이 도맡아 했으며 룰라 메이는 포동포동 살찌기만 하면 됐다고 말한다. 더 특이한 점은 나이들대로 나이 든 중년 남성이 고작 열네 살의 딸 같은 여자아이에게 프로포즈를 했다는 점이다.

 

어른이 되면 보지 않아도, 몇몇의 사연만 듣고 퍼즐처럼 맞춰지는 눈이 생기다고 말하지 않는가. 고작 파편 같은 일부의 단서지만 홀리가 열네 살에 남동생과 함께 할리우드로 떠나기를 결심한 사실을 보자면, 자립을 해야만 했던 본능적인 탈출이 필요했던 걸로 보인다. 이때부터 홀리는 종속과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했던 여자였지만 그녀의 겉모습으로는 티 나지 않았던, 아픈 사연이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다.

 

누구는 그럴 수 있겠다. 힘들어도,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어도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눈치인 것이 더 낫지 않냐고. 조금만 치장해도 외관은 배로 화려해지는 타고난 탤런트를 가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사연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면 예측조차 할 수 없어 곧바로 홀리의 삶에 이입이 안 될 수 있다.(영화에서 그녀가 입고 있는 옷, 액세서리, 환경으로는 힌트조차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적으로 보이는 화려한 감정 안에 홀리 내면의 감정이 일관성 있게 일치하고 있지 않았기에, 홀리는 더더욱 큰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녀에게는 물질적 하나만으로도 안 되고, 또 정신적 하나로도 안 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을 갈망하는 사연을 알려주는 첫 원인인 이름 ‘룰라 메이 반즈’다.

 

 

문리버.jpg

 

 

Two drifters, off too see the world

두 명의 떠돌이, 세상을 보러 떠나요

There's such a lot of world to see

세상에는 볼 것이 너무나도 많답니다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우리는 똑같은 무지개의 끝을 찾고 있어요

Waiting around the bend

모퉁이를 돌기를 기다리면서

My huckleberry friend, moon river, and me

내 허클베리 친구, 달이 비추는 강, 그리고 나

 

 

어쩌면 문리버를 부른 홀리는 벗어나고 싶지만, 그럼에도 몸 어딘가 안에는 룰라 메이 반즈의 삶이 기억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보여준다. 가사에 나온 두 명의 떠돌이는 남동생과 그녀를 지칭하기에 어색하지 않고, 더 큰 세상을 보기 위해 잘 알지 못하는 지역으로 넘어와 모퉁이를 돌고 돌아 어떻게든 살고 있다. 또한 티파니 매장의 투명한 문에서 커피와 크루아상을 들고 볼 것이 많은 세상을 하나씩 쳐다보는 홀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홀리 고라이틀리


 

티파니샵.jpg

 

 

아무도 없는 고요한 새벽, 검은색 롱 드레스를 입고 한적한 거리를 우아하게 걷는다. 이어 티파니 매장 앞에서 보기만 해도 흐뭇한 액세서리를 천천히 보며 아침을 해결한다. 언젠가 꼭 따라 해보고 싶은 낭만적인 장면이지만, 이는 사실 홀리의 기분이 다운되어 견딜 수 없을 때 꼭 보석 매장 앞으로 가는 빨간불 신호를 의미하는 바이다.

 

룰라 메이 반즈에서 홀리 고라이틀리로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사람의 정체성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듯하다. 그전의 이름 룰라 메이 반즈 시절엔 남편과 튤립의 동부에서 인심 사나운 사람들에게 피하기 위해 살았다면 지금은 매일 눈앞에 일어나는 현실 앞에서 도망치기 급급하다. 부자들을 만나면서 하루살이용 돈을 해결하지만, 여전히 통장에는 숫자가 올라가지 않는다. 남성들과 만나 돈을 받지만, 그 돈으로 드레스를 수선하고 치장품을 사면 또 여전히 제자리에서 머문다.

 

이렇게 사는 것을 원치 않아 하면서도, 늘 목표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를 희망하고 갈망한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여성상을 원하지만, 다른 사람의 그늘로 들어가 원하는 현실과 전혀 반대로 걸어 계속 도망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한곳에 오래 정착해 사는 것 또한 자신 없어한다. 그렇게 홀리 고라이틀리는 갈피를 찾지 못하는 경계를 넘나들며 이도 저도 아닌 삶을 영위하는 답답함을 보여준다.

 

 

 

이름 없는 고양이


 

고양이.jpg

 

 

홀리에게 어울리는 진짜 이름은 대체 무엇일까. 이름을 바꿔도 왜 정착하지 못하는 불안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그저 돈이 넉넉지 않아서 떠돌이로 살아가는 것일까. 그러나 홀리의 떠돌아다니는 하루를 그저 돈으로 단순하게 엮어서 보면 안 된다. 그저, 아직 홀리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못해 스스로가 누군지 정체성 확립이 안 되는 듯하다. 이로써 우리는 평생을 달고 살아야 하는 이름이 그저 단순한 수식어 마냥 간단하지는 않음을 인지시켜준다.

 

작가인 폴은 홀리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한다. 그 책의 제목은 ‘9개의 삶’으로, 이는 서양의 속담으로 고양이가 목숨을 9개 가진다는 것을 떠오르게 만든다. 이처럼 고유의 이름 하나로 진득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9개나 되는 수많은 이름으로 정착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바를 내포한다. 즉 고양이는 홀리와 동일시된다는 것을 암시로, 영화에서 고양이는 은근히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러나 더 슬픈 건 이름 없는 고양이임을 홀리 스스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진짜 집을 구하면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줄 것이라고 말했던 홀리였는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고양이는 잃어버렸다 다시 찾는 존재였고 이름은 여전히 부여되지 못했다. 이처럼 홀리도 마지막에 폴의 진심 어린 고백에 그의 품에 안기지만, 정착되지 못하고 또 떠날 수 있다는 불안함을 실어주는 것을 또 암시하는 듯하다.

 

**

 

화자는 이름을 바꿔본 적은 없으나, 이사를 해 전학을 가본 경험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데, 그 당시를 생각하면 급변했던 환경 속에 적응하기 너무도 힘들어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안락한 부모님과 든든한 형제와 좋은 친구들이 옆에 있다고 해도, 순식간에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라는 미션을 던져준 혼란스러움은 그들로 넉넉하게 치유되지 않을 때가 분명 있었다.

 

이는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자신의 감정을 안정적으로 당길 수 있어야 하는 노하우가 생겨야 한다. 또한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버거워 벅차오르는 환경에 그저 몸을 맡겨야 할 때가 있다. 누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홀리 고라이틀리는 이를 간과하고 누구에게 기대려는 의지를 보이는 듯했는데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내게 주어진 무게감을 견뎌야 할 때는 비로소 나만이 그 무게를 줄여나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바이다. 사실 홀리의 굴곡 선의 정도가 심한 인생 앞에 비벼볼 수 있는 약간의 경험이라곤 전학밖에 없지만 그녀의 요동치는 감정선과 갈피를 잡지 못하는 방황은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개인적인 사연으로 어렸을 때 잠시 분리된 자아는 다시 정착되기까지 다른 역사를 만들어야 덮어지는데 <티파니와 아침을>은 남은 시간 동안 홀리에게 주어진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주진 않았다. 화려한 삶으로 어두운 삶들이 조금은 무마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관계의 감정에는 불안한 점만 강조되었다. 화자처럼 곧이어 그녀를 만나게 되는 또 다른 관객은 홀리를 그저 통통 튀는 사랑스러움과 귀여움 곁에 깊이감은 따로 없는 인물로만 기억될 수 있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삶을 완성시켜주는 것은 관객의 몫 아니겠는가. 3개로 분리되었던 그녀의 이름에 영화가 만들어준 서사로 설명되는 인생이 아니라, 관객이 개인적으로 부과하고 싶은 감정과 역사를 넣어, 그녀의 인생을 홀리의 아름다운 외모처럼 입체적으로 입혀주었으면 좋겠다.

 

 

[조우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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