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두터운 장벽을 뚫은 Wi,Fi - 연극 '와이바이'

글 입력 2021.02.1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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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공연 동이문 - 2.jpg

 

 

옛날 옛적 잼민 & 잼순이들이 1,000원으로 컵볶이에 피카츄 돈가스까지 사 먹던 시절, 인터넷은 소통의 도구라기보다 인간적인 소통을 막는 비인간적인 기계였다. 내가 잼민이일 때에는 영화 매트릭스나 소설 1984의 세기말 감성이 기술 매개 소통이 가져올 미래상의 표준이었다.

 

두 콘텐츠가 정확히 소통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이해했으리라고 믿는다. 좌우간 그때는 많은 사람이 컴퓨터를 매개로 한 소통은 필시 비인간적이며, 실제 인간 소통의 주요 수단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2021년, 그 믿음은 쓸데없는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사람들은 인터넷 선을 타고 더 활발히 소통한다. 인터넷은 모든 만남의 시발점이자, 중요한 업무와 가십의 중심이자 작별의 장소가 되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대면 만남이 차단되었을 때, 일상과 업무를 빠르게 전이시킬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인터넷 매개 소통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대면 만남이 아니라 비대면 만남이 차단되었다면 상황은 정 반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인터넷 연결의 기술적 구심점인 와이파이는 현대 권력의 중심이다. 와이파이를 쉽게 연결할 수 없는 농촌은 특히 그렇다. 실제로 남미 콜롬비아의 한 마을에서 와이파이 때문에 폭동이 발생한 적 있다. 피해자는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유출되면서 이웃들이 저마다 접속을 하는 바람에 속도가 느려져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변경했다.

 

그러자 그간 무단으로 와이파이를 사용하던 주민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새로 설정한 비밀번호를 알려달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주민은 피해자의 자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몰려들어 돌팔매질을 벌인 가운데 일부는 마체테(주로 밀림에서 길을 낼 때 사용되는 외날의 큰 칼)까지 들고 나타나 씩씩거렸다.

 

층간소음으로 칼부림이 나는 분노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이라면 이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사례를 볼 때마다 '영국의 동물들'을 부르는 조지 오웰의 동물들이 생각난다. 와이파이를 둘러싼 분쟁은 빼앗긴 권리에 대한 투쟁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충분한 건초의 형태는 인터넷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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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와이바이>도 와이파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물론 내가 앞서 기술했던 기술 혁명에 따른 권력투쟁이 주요 초점인 것은 아니다. <와이바이>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욕구와 가족주의(혹은 이기주의)의 조화 점을 찾는 작품이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투쟁을 갈등요소로 제시한다. 자본과 와이파이를 가지고 있는 용일, 그들에게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표적이다. 용일은 와이파이조차 노동력을 제공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스마트폰 하나 개통하지 못해 고군분투한다.

 

두 집단의 대결은 '고향'이라는 키워드로 해결된다. 고향은 부족하고 모난 자신을 관대하게 맞이하는 마음의 안식처, 혹은 온갖 고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지켜내려는 나의 뿌리로 묘사된다. 두 집단의 화해는 마리아와 용일의 마지막 딸 베이비, 용일과 나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화해는 일반적으로 갑의 자리에 있는 등장인물이 갑을 관계가 상대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일방적으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베이비와 용일은 어느 시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을'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이 고향뿐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의 고향을 지키기 위한 마리아와 나일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마침내 이들은 마음의 고향을 함께 지키는 동료로 거듭나게 된다.

 

<와이바이>에서 와이파이는 독점적 자본이자 소통 욕구에 대한 비유로서 기능한다. 독점적 자본으로써의 와이파이가 갈등의 시발점으로 제시된다면, 소통 도구로써의 와이파이는 갈등의 해결도구로 제시된다. 연극이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와이파이는 후자로 보인다.

 

와이파이 공유기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이는 배우들의 모습은 마음속 고향을 그리는 사람들과 닮은 면모가 있다. 연극의 제목이 '와이바이(Why, bye)'가 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와이파이 앞에서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이 이토록 닮았다면, 왜 서로 내쫓고 떠나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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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도구로서의 와이파이를 중심소재로 다루는 <와이바이> 답게, 와이파이가 잘 통하는 영역을 그린 동그라미 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연극 중 바뀌는 무대는 공사장 일을 병행하는 나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서울 농장의 주인 가족과 외국인 노동자의 공통점을 드러내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들의 가족과 친구와 이야기할 때는 또렷한 표준말을 쓰도록 연출했다. 직관적인 연출과 배우들의 맛깔나는 연기는 연극의 완성도를 높였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마리아를 연기한 배우의 맑고 또렷한 음성과 분위기를 홀린 듯이 감상했다.

 

이토록 나무랄 것 없는 완성도를 보인 작품이지만, 초반 전개와 등장인물의 사용에서는 아쉬운 느낌이 든다. 우선 주요 소재로 내세우고 있는 와이파이에 관한 내용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와이파이에 옹기종기 모이고, 와이파이의 독점으로 갈등이 일어나지만, 와이파이가 가진 소통의 기능은 연극 속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와이파이 선을 중심으로 무대를 설치한 것을 생각하면 다소 아쉬운 사용이다.

 

사실 작품에서 더 드러나는 소재는 스마트폰이다. 연극은 초중반까지 외국인 노동자인 칸과 이리띤은 스마트폰을 가지기 위해 고군분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관람객으로서 초중반 전개를 통해 외국인 노동자의 고충- 향수와 불합리한 처사-를 이해하지만, 작품에서 내세우고 있는 소통이라는 메시지는 알아채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두 외국인 노동자의 역할이 외국인 노동자의 고충을 표현하는 데 너무 충실한 나머지, 작품의 메시지를 이끌어가는 것은 용일 가족과 마리아 부부와 비교하면 존재감이 매우 옅어졌다. 작품 내 존재감이 옅어진 것은 다른 농장을 경영하는 용일의 친구도 마찬가지다. 앞서 기술한 인물들이 작품의 엔딩을 장식하는 데 제외된 점을 고려해보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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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와이바이>의 메시지는 현대사회에서 분명한 가치를 가진다. 기술발달로 모든 사람은 점점 닮아가고, 닮아간 탓에 서로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코로나 19 바이러스 이후 세계 정책은 소통보다는 장벽을 권하고 있다. 하지만 빽빽한 장벽은 늘 최선의 선택이 아닌 차악의 선택이다.

 

이럴 때일수록 작품의 제목인 'WHY,BYE?'는 더 자주 꺼내야 하는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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