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숨바꼭질의 재미 [도서]

글 입력 2021.01.16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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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 여행, 그리고 모험의 공통점은 반복적인 인상에서 동떨어진 새로운 경험이라는 점이며, 이 부분이 매력으로 작용한다. 변하지 않고 안정적인 생활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어쩌다 한 번 쯤은 색다른 경험이 필요하다.

 

고여있는 물은 썩고 환기하지 않는 방은 갑갑하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지 못 하는 사람의 세계도 겉으로는 안정적일지언정 그 아래는 썩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변화가 한 번 쯤은 필요하다. 어쩌다 한 번이라면 여행이나 일탈보다는 모험이 더 매력적이다.

 

 

 

Alice On The Land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이 저마다 다른 분장을 하고 숨어있다. 책을 펼치는 순간 어릴 적 즐겼던 숨바꼭질의 술래가 되어 숨어있는 것들을 찾게 된다. 이야기 자체부터 루이스 캐럴이 앨리스 플래젼스 리들이라는 아이에게 들려줬던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낸 것이니 숨바꼭질의 진수라고도 할 수 있다.

 

캐럴이 오르내렸던 옥스퍼드 예수 교회의 계단을 찾으면 토끼굴을 따라 앨리스처럼 하염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땅에 발을 딛고 일어서 숨어있는 아이들을 찾노라면 리펀 대성당의 벽에 새겨진 토끼가 보인다. 자기가 가장 먼저 들킨 것이 억울한지 토끼는 곧이어 우리를 다른 것들이 숨어있는 장소로 차례차례 안내한다.

 

리폰 대성당에 함께 있던 그리폰도 만나고, 채셔 캣은 언제나 그렇듯 웃음을 잃지 않았다.

 


13.jpg


 

카드 병정 셋이 붉게 칠하던 세 송이 장미 속에서 30년 전쟁의 흔적을 찾아내면 흰 장미와 붉은 장미 사이에서 벌어졌던 다툼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민다. 역사를 배움과 동시에 반짝거리는 차를 마시는 티타임의 반짝거림과 차, 티 타임은 전부 t로 시작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복습한다.

 

차를 즐겨 마시던 모자 장수의 모자를 벗겨내면 그 속에 숨어있던 카터를 찾을 수 있다. 나는 수학을 싫어하기에 수학에 정통한 캐럴이 숨겨 둔 수학적 숨바꼭질은 찾을 수 없었지만 나와 취향이 정반대인 사람이라면 그것들마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등은 모두 픽션(Fiction)입니다.' 작품 시작 전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문구다. 재밌는 점은 보통 이런 문구의 뒤편에는 실제를 바탕으로 삼았지만 참고 정도만 한 것처럼 꾸며서 써먹겠다는 의미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작품은 상당히 재밌다는 것을 증명하는 보증서 역할도 한다. 아마 루이스 캐럴은 이 보증서를 깜빡했거나 그 당시에는 이런 보증서 양식이 없었던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작품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재밌는 점 중 하나를 빼먹을 이유가 없다.

 

캐럴이 걷던 교회, 만났던 아이들, 티타임을 즐기던 강가, 그의 친우 또는 교회 사람들을 비롯하여 그가 살아가던 세계의 것들로부터 태어나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 것들을 하나씩 잡아 내다보면 내 손은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실제의 것들을 바라보던 캐럴의 눈에는 세상의 것들이 이런 모습으로 비추어졌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이런 재미를 더욱 풍미 가득하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조미료가 된다.

 

 

 

Lost Adventure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원제는 Alice’s Adventure in Wonderland다. 책 속에서 앨리스가 겪는 일들은 하나같이 단어 그대로 모험이라고 할 것들밖에 없다. 말 하는 토끼나 도도새, 크로켓 치는 카드, 사라지는 고양이 등등 신기하지 않은 게 없다. 이런 것들을 모험이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하겠는가. 앨리스를 따라가는 우리도 다양한 모험을 할 수 있으니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에서의 모험이라고 해 주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

 

루이스 캐럴이 바라보던 주변 사람들과 장소, 그리고 시간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내던 풍경 속으로의 모험, 앨리스 플래젼스 리들이 듣고 즐거워하던 세계 속으로의 모험, 앨리스라는 캐릭터로 태어난 그녀의 모험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모험을 선택적으로 즐길 수 있다.


애나 본드의 삽화는 모험이라는 특징을 더욱 부각한다. 어린 소녀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만든 동화 같은 소설에 아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져줄 것 같은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그림체는 어딘가 어드밴처 타임(Adventure Time)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한다. 원본의 삽화가 아닌 그녀의 그림이 들어간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Carrolls-Alice-2.jpg
Photo via Open Culture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원래 앨리스 플래젼스 리들에게 개인적으로 들려주기 위해서 만든 작품이라 처음에는 캐럴이 직접 손으로 필사를 하고 삽화까지 그려서 만든 책 한 권이 전부였다.

 

사진, 수학, 소설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가진 그였으나 그림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던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의 시선에 맞는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없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캐럴의 삽화가 아이들이 보기에는 그리 적절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다. 그 시대의 아이들은 존 테니얼의 삽화로 예술적 감각을 어루만지고 지금 시대의 아이들은 애나 본드의 삽화로 좀 더 현대적이고 동글동글한 방식으로 감수성을 어루만질 수 있으니 다행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작품이 가진 독특하고도 방대한 세계관은 심리, 과학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쳤으며 ‘in to the rabbit hole’이라는 관용적 표현까지 남길 만큼 대단한 작품이었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나에게는 세상에 대한 갑갑한 마음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어 주는 환기구가 됐을 것이다.

 

하루마다 반복되는 무료하고 틀에 박힌 일상에 찌들어 있었기에 내 감수성의 바이털 사인은 사망 선고가 내려진 지 오래였다. 현실에서는 벌어질 리 없지만 한 번 쯤은 겪어보고 싶어지는 이 신선한 세계는 바이털 사인이 다시 요동치게 만드는 심장 제세동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앨리스의 돌발적이고 무례하다고도 볼 수 있는 규칙성 없는 그 행동에서부터 느낀 횡격막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울화통이 전압을 확실하게 올려준 것도 한몫했다.

 

 

 

Grin like a Cheshire Cat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를 꼽자면 그건 단연코 채셔 고양이다. 채셔 지방의 고양이 조각상에서 따 온 캐릭터인 채셔 고양이는 작중에서 관조자의 태도를 보인다. 언제나 미소짓는 얼굴로 조용히 나타나 상황을 지켜보고 이따금 의문만을 던지다 조용히 사라진다.

 

무시할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만 본인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사라진 자리에는 그 미소의 여운이 진하게 남는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내가 만들어내는 것들은 오래도록 남아 기억되기를 바라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로 향하는 관심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채셔 고양이는 모순의 극치이자 패러독스의 실체화라고 할 수 있다. 근육 구조상 웃는 얼굴이 불가능한 것이 고양이지만 채셔 고양이는 언제나 웃고 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고양이가 던지는 말들은 무엇 하나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것들이 없다. 몸통이 있으면 머리를 자를 수 없고 머리만 있으면 머리를 자를 수 있다는 모순적인 논쟁 속에서도 채셔 고양이는 역설적으로 존재한다.

 

가장 흐릿하게 등장해 흐릿하게 사라지면서도 가장 강렬하게 각인되는 그 인상마저도 역설적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역설적인 채셔 고양이는 가능한 모든 것이 정돈되고 공통점을 지녀 질서정연하게 관리하기 쉽도록 변하길 바라는 세상에 반항하는 나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일 수 없다.


세상이 점점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태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은 부족한 게 현실이다. 덕분에 이곳저곳에서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누가 보기에는 병들었고, 누가 보기에는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고, 누가 보기에는 미쳐있는 세상이지만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에 정답이 있다면 그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는 것 하나뿐이다. 단조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것도 자유다. 언제나 격동적인 세상을 추구하는 것도 자유다. 자신에게 맞는 세상을 찾아가면 될 뿐이다. 앨리스처럼 언제나 호기심을 따라 모험을 추구하는 것도 이상할 것 없다. 기분 좋을 때 그르렁거리고 화가 날 때 꼬리를 흔드는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by 애나 본드_표지커버.jpg


 

[김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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