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게 우리의 잘못은 아닐거야

나비효과 : 2020년의 괴물영화
글 입력 2020.12.31 18:4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혼란스러운 1년이었다.


하고자 했던 모든 일들은 수정을 거듭하다 못해 다량 취소의 사태를 맞았다. 대학 수업이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장소나 이동시간에 받는 구애가 많은 연사분들과 대화하는 장이 많아졌다.


틈만 나면, 집, 학교, 약속 장소 근처에 있는 미술관으로 빠지곤 했던 나는 실물을 접하지 못하는 온라인 전시회에 흥미를 잃었다. ‘이동하는 김에’ 갈 수도 없었고, 지금 이 순간 눈 앞에 띄는 미술관에 들어가는 맛을 잃었다.


그래서 내 다이어리는 더더욱 특강 일정으로 빼곡해졌다. 그러다가 만난 연사분으로 인해 대학원 입시기간에 급하게 과를 전향하면서 수많은 교수님들께 연락을 돌려야 했다.


친구가 나오라고 불러도 멀어서 절대 가지 않던 곳으로 대학원을 다니게 됐다. (약속 시간을 조절했으면 했지, 만남을 거절하는 일은 거의 없는 편이다.) 지금으로부터 세달 전까지만 해도 5년동안 다녔던 30분이면 도착하는 학교를 조금 더 다니게 될 것에 아주 만족스러워 했었다.


동시에 지난 일들이 우후죽순으로 떠올랐다. 로봇공학부에 들어갔던 고등학교 시절, 이과 교과서를 배부받고 2학년 반 배정 직전에 문과로 돌렸고, 수학 점수로 사회과학대학으로 진학 했던, 학사과정을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그 때. 결국 문이과 통합계열로 석사과정까지 밟게 될 것을 몰랐겠지.


대학원 입시가 끝나고 나서는 한창 사회활동을 할 이 나이에 집에서 쉬는 시간이 늘어났고, 대중교통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었다. 즉, 꼼짝없이 넷플릭스 신작과 서비스 종료작을 외우는 신세가 됐다. 할 일로 꽉 찼던 곳들에 공백이 생긴거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가 한심해지기 시작했다가, 수많은 약속과 이동시간이 비어버린 것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해 나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다.


BC라고 해도 못했을 것들을 구태여 하지 않기로 했다(BC:Before Corona, 인문학 특강 중에 연사님께서 언급하신 단어로, 새로운 BC/AC가 정의됐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시대의 기점에 있다는 점이 신기해서 써보고 싶었던 말.). 물론 학업과 일 한정으로.


그 때의 나도 결코 느슨하게 살지 않았었는데, 더 열심히 살고 싶지는 않다고 종종 생각했다. 밀도가 낮아진 것일 뿐, 절대수에는 변화가 없으므로 나를 압박하지 않기로 했다. 손이 가는대로 넷플릭스를 섭렵했다는 소리다.


나는 나비효과나 도교인지 불교인지 모를 순환론적 관점에 무척 빠져있는 편인데, 내 고등학교 시절부터, 또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어진 인과관계들로 나는 계속 결제중이었던 넷플릭스에 지금 빠졌다는 말이다.


1번 주자 - 킹덤2, 김은희 작가님의 좀비물이라니. 좀비 사극이라니. 2번 주자 - 보건교사 안은영, 1화만 볼 생각으로 틀었다. 3번 주자 – 스위트홈, 저렇게 그래픽이 섬세하지 않은 괴물을 끝까지 보게 만드는 박진감. 이 세가지의 오리지널 넷플릭스 시리즈 중에서 내가 끝까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1화를 시작한 건 킹덤, 딱 하나였다.


혼란스러운 1년이었다.


그래서 더 괴물 소재에 눈길이 가지 않았나. 무엇이건간에 지금보다는 심한 것 같아서. 무엇을 보더라도 오히려 지금은 좀 살만한 세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환경 속 인간의 행동거지를 공감할 수 있어서.


역시 올해 개봉한 영화 <반도>. 영화 <부산행>의 후속편이며, 부산행의 4년뒤를 그렸다.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에서 그리는 인간의 지배욕구와 잔혹성(혹은 본능)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반도>였다.


생존 목적 그 이상으로 가혹행위를 서슴치 않는 사람들. 법을 개정해(각자 상황에 맞게 규칙을 새로 제정하는 행위를 개정이라고 명명하겠다.) 커뮤니티를 조직하는 사람들. 본래 사회에 대한 신뢰이거나, 현실 부정형의 구출을 기대하는 사람들. 이제 정형화되기 시작하는 디스토피아 내 인간상.


‘괴물화’라고 한다, <스위트홈>에서는. 인간의 욕망이 인간의 모습을 파괴한다. 긍정/부정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필사적 욕망은 괴물을 만든다는 이 컨셉이 기존의 좀비물에서 정형화되었던 인간들까지 재정의한다. 그리고 현재 사회의 인간들까지도.

 

 

2040682757_SvlhT271_netflix_EAB3B5EC8B9D_EC82ACEC9DB4ED8AB8.jpg

 

 

한편 좀비와 괴물이 주는 어감은 확연하게 다르다. 좀비가 시체의 이미지가 강하다면, 괴물은 그 정의 자체가 ‘괴상하게 생긴 물체 혹은 괴상한 사람’, 즉 사람에게도 쓰이는 단어다. <스위트홈>에서 인간이 아닌 이는 없다고 볼 수 있겠다. – 구별짓기의 무의미성.


인간과 괴물 사이의 선긋기가, 그리고 올해 주요 키워드로 떠오른 가지각색의 ‘차별’ 사이 그려져 있던 바닥의 선들 위에 천 한조각 덮어버리면 그 누가 알겠는가. 누가 괴물인지.


또 한편, 이 선을 무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 일명 ‘유리천장’. <스위트홈>에서는 ‘착한’ 괴물이 손을 먼저 내밀어도 괴물은 사살의 존재이고,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 노인, 여성은 일자리를 요청해도 묵살받는 존재인 것을. 선의 무게가 주는 상대성.


또는 내 스스로 지울 수 없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구분선들.


나는 나비효과나 도교인지 불교인지 모를 순환론적 관점에 무척 빠져있는 편인데, 괴물영화들에서 이어진 상념들이, 1년간의 혼란에서 이어진 상념들이 불러일으킨 혼란 속에 혼란을 더하고 있다. 아직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따져볼 자신이 없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불확실성에서 자기방어적 선긋기는 심화된다. 나는 점점 이성 찾기를 거부하고 있다.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니다. 큰 시야에서 보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올해의 내가 무엇을 성취했다는 것을 자주 잊는다. 천이 덮여버리는 쪽은 이 쪽이다. 나는 천쪼가리를 어디에 써야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나를 압박하지 않기로 했으나, 느껴지는 이 압박이 내 탓이 아니다. 매일매일 나에게도, 내 주변에 힘든 (모든) 이들에게도 끊임없이 말해준다. 당신 때문이 아니다. 당신이 느끼는 이 짐은 나비효과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시간이니까.

 

 

 

Tag.jpg

 

 

[박나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