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구분의 시대에서 소통을 말하다

양혜규 《O2 & H2O》 展
글 입력 2020.12.0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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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이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건 올해를 지나며 얻은 교훈 중 하나일 것이다. 통로가 가로막히고 말의 형태도 제한된 세상에서 우리는 일상을 지속해야만 했다. 하지만 가장 절실히 느꼈던 변화는 그동안은 저절로 이루어졌던 소통의 이유를 이제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왜 소통해야 하는가. 계속해서 누군가를 고립시키고 고립되기를 반복하면서 단단해진 경계선은 서로를 배제했고 그것은 어쩌면 이 시대에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잠시 멈춰 선 지금, 쉽지 않더라도 두려움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소통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누구도 낙오되지 않고 모두가 더 나은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공기와 물을 소재로 소통을 말한 작가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양혜규 작가의 전시, 《O2 & H2O》는 물의 응결에서 소통의 과정을 본 작가의 고민이 담긴 결과물로, 몇 해에 걸쳐 준비한 전시이나 공교롭게도 시대가 요청하는 질문에 대한 시의적절한 대답을 제시한다. 물방울이 병이라는 벽을 투과할 수 있는 이유를 온도 차에서 나오는 ‘차이와 다름을 인내’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작가는 소통의 핵심을 ‘다름’에서 찾는다. 그 자체로 소통의 거대한 은유인 이 전시는 익히 소통의 수단으로 명명하던 ‘언어’의 차원을 넘어서, 그것으로도 매개되지 않는 소통의 무한한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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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전시실을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작품으로 전시와의 소통은 시작되었다. <침묵의 저장고 – 클릭된 속심>은 전시실 내부가 아닌 로비 한가운데 커다랗게 위치해있는데, 관객에게 움직임을 멈출 것을 요구함으로써 능동적 관람을 유도하는 동시에 스스로 시선의 대상이 아닌 소통의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말을 걸 것이라는 것을 모든 작품을 대변하여 선언하는 듯하다.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이 구조물은 관객의 신체 움직임을 통해 작품과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인식을 제안하는 작가의 방법론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그리하여 자세를 고쳐 잡고 전시실에 들어가게 된다. 이 전시에서 견지해야 할 태도는 작품이라는 대상물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는 바를 가만히 듣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소통을 위해 먼저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다. 관객이 보기 편하고 눈이 즐거운 작품보다 관객을 움직이고 감각을 일깨우는 주어로서의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시에서 관객 역시 수동적으로 위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에 접근하고자 한다. 털이 달리고 온갖 재료가 혼합되어 있는 정체불명의 조형물들이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전시실에 들어가자마자 선뜻 겁이 났지만, 예상치 못한 만남이 주는 또 한 번의 새로운 소통을 기대하며 작품에 다가가 보았다.


<소리 나는 동아줄>은 방울로 이루어진 기다란 줄의 형태를 띤 채 천장에 매달려 있다. 높게 쭉 뻗은 조형물은 끝이 향하는 전시장 바깥으로까지 시선을 던지게 하며 관객의 시야를 확장하고, 흔들면 소리가 나는 방울의 속성을 통해 청각적인 경험을 유도한다. 전시실에 배치되어 있는 ‘소리 나는 조각’ 연작은 이렇듯 방울이라는 소재로 작품에 내재해 있는 목소리를 번역한다. <소리 나는 백설 어수선 블록>은 방울에 짚이나 실 등 여러 오브제를 더하여 마치 머리카락이 달린 동물의 형태를 띠는데, 이 또한 작품에 생명감을 부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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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나는 가물> 역시 방울과 여러 오브제를 이용해 가정에서 쓰는 일상적 도구인 다리미, 마우스, 헤어드라이어, 냄비를 생명체의 형태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인간의 효용을 위해 도구적으로 만들어진 이들이지만 방울을 통해 새로운 언어를 얻은 그들은 요구받던 기능을 제거하고 자기 자신의 소리를 내는 생명체로 재탄생한다. 이 과정을 탈바꿈으로 봐야 할지, 거듭남으로 봐야 할지 알 수 없다. 인간과의 위계를 무너뜨린 사물들은 다만 낯선 듯 친숙한 형태로 인간을 위해 내재한 목소리를 번역할 뿐이다.


방울이라는 오브제는 이렇듯 소통에 대한 파격적인 관점의 전환을 뒷받침하는데, 한국의 무속이나 유럽의 이도교적 전통에 쓰였듯이 모든 문화권 속 의례에 등장하는 사물로서 세속적 세계와 초월적 세계를 매개해왔기 때문이다. 초월적이고 이상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전제함으로써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이분법을 무력화하는 무속의 전통을 방울을 통해 구현한 작가는, 그러나 그것이 또한 전통적인 것인지 되물으며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회를 분할하는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에 대한 의문으로 또다시 논의를 확장한다.


<중간 유형>은 짚을 수년 동안 엮어서 만든 조형물로, 본래 한국적인 조각을 제작하려고 했던 작가의 의도와 달리 해를 거치며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작품이 처한 환경이 달라지면서 점차 다른 오브제가 더해진 결과로 탄생한 혼종의 기물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전통적인 것인가, 현대적인 것인가? 가장 쉽게 변하는 '시대'라는 기준은 모순적이게도 사회를 가장 단단히 옭아매고 날카롭게 구분하는 경계선이 된다. 그러나 작가는 시간은 흘러가며 존재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흔적으로서 축적된다는 것을 규명하고 아무도 축적물 속에서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명쾌하게 구분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이분법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시종 이분법을 경계하는 작가의 태도는 복도를 아울러 넓게 설치된 작품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오행비행>은 궁서체와 오방색, 다섯 가지 원소(물, 불, 흙, 금속, 나무)처럼 동양적이고 제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요소를 각 원소와 관련한 현대 기술과 접목한 포스터인데, 여기서도 동·서양과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은 무너진다. 포스터의 사이사이엔 남북 정상회담에서 소리 없이 송출된 정상 간 대화 장면에 작가의 목소리로 가상의 대화를 삽입한 <진정성 있는 복제>의 ‘소리 열매’가 설치되어 있어, 이분법이 무너진 자리에 피어나는 소통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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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품은 무엇인가로 명쾌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두 개로 간단하게 나뉘지 않는 작가의 세상은 복잡하며 몸을 움직이고 감각을 일깨울 정도의 적극적인 접근을 통해서만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소통은 결코 쉽지 않다. 작가가 물의 응결에서 발견한 소통의 핵심인 ‘차이와 다름의 인내’에서 중요한 것은 차이와 다름이기도 하지만, 소통을 완성하는 것은 그것을 인내하는 태도이다. 작품을 통해서 그러했듯 원하지 않았고 예상치 못했던 만남을 참고 견딤으로써 태어나는 새로운 생각과 대화의 기쁨은 쉽지 않은 소통을 그럼에도 지속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거대한 전시실의 벽에 문손잡이를 붙임으로써 문을 연다는 기능을 제거한 듯 보이지만 넓게 보면 벽을 넘어선 더욱 큰 차원으로의 이동을 상상하게 하는 <구각형 문열림>이나, 전시실 안에 통로를 만들어 내부를 외부로 뒤집어버리는 <크로마키 벽체 통로>처럼 발상의 전환과 확장을 통해 소통의 다양한 형태를 시각화하는 작가의 발견은 전시 속의 전시, <목우공방>에서 소통이 드러내는 새로운 이야기를 제시하며 마무리된다.

 

목수 김우희가 만든 나무 숟가락과 이에 담긴 사연을 풀어낸 글로 이뤄진 전시로, 같은 모양이 거의 없는 숟가락들은 부여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미완으로 남아도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는다. 목수의 고립과 소통의 결과물이기도 한 이 전시는 대상의 재인식에서 나오는 새로운 가능성을 피력하는 작가의 일관된 메시지를 숟가락이라는 친근한 오브제를 통해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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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을 말하는 전시는 처음과 끝에서 대상의 재인식을 요하고, 그 과정에서 이분법의 제거를 논한다. 이는 지금의 상황을 인간의 실수로 빚어진 사태가 아닌 인과관계에 따른 자명하고 필연적인 재앙으로 보는 겸허한 관점의 전환의 근거가 됨과 동시에 서로를 구획하고 배제하는 디스토피아로부터 탈피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말하는 줄 몰랐던 이의 새로운 목소리를 듣고 이를 위해 감각을 일깨우는 지난한 과정을 지나며 얻어지는 소통은 그렇기에 거칠고 단단하게 세상을 확장시킨다. 좌절의 연속 끝에 더 나은 세상이 오기만을 하릴없이 바라는 마음은 이렇게 구체화된다.


소통이 어려운 시대를 지나면 오는 것은 소통이 쉬운 시대가 아니다. 소통의 어려움을 모두가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고 투쟁하며 ‘차이와 다름을 인내’하면서까지 모두가 소통을 소망할 수 있는 시대여야 한다. 우리는 그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과정을 더 나은 시대를 위한 역사의 과도기로 남기기 위해서, 그리고 아무런 낙오자 없이 더 나은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디뎌야 할 발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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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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