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새 식구 만들기 -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

글 입력 2020.11.30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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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가지는 일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는 만나 엄마를 낳았고, 엄마는 아빠를 만나 나를 낳았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삶에 이음매 없이 매끈하게 자리 잡았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늘 강제적인 관계는 그렇게 우리를 연결했다.

 

나는 종종 같이 산다는 것만으로, 이름 한 구석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가족으로 묶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얼마나 행복할지 헤아려본다.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지 내 의지대로 고를 수 없다는 건 내가 가정할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을 마침내 찾는다고 해도, 가족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꼭 같이 산다고 가족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이쯤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질문은, 대체 무엇이 ‘가족’이고 ‘식구’냐, 하는 것이다. 뮤지컬 ‘식구를 찾아서’는 개성 넘치는 두 할머니를 통해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따스하게 말을 건넨다.


 

뮤지컬식구를찾아서_사진제공더줌아트센터 (6).JPG

 

 

주인공 ‘박복녀’는 ‘몽’, ‘냥’, ‘꼬’라는 이름의 강아지, 고양이, 닭을 가족 삼아 살고 있다. 그들의 변함없이 잔잔한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것은 어느 날 ‘지화자’라는 이름의 낯선 할머니가 박복녀의 집에 불쑥 찾아오고 나서부터이다. 아들이 자신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주소로 무턱대고 찾아온 지화자는 이곳은 틀림없이 아들의 집이니 여기서 지내야겠다며 막무가내로 박복녀의 집에 눌러앉으려 하고, 박복녀는 그런 지화자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지화자의 아들을 함께 찾아봐 주기로 한다.

 

처음 지화자가 등장할 때, 너무 천진해서 뻔뻔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매력을 느낀 사람도 있었겠지만, 나는 지화자가 얄미웠다. 나만의 공간과 질서가 깨지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박복녀의 입장에 더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온 배경도, 출신도, 성격마저도 완전히 다른 두 할머니가 부딪히고 다투다가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같은 길을 걷는 장면을 함께 하다 보면 어느새 지화자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분명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불쑥 찾아와 돌아가지 않는 탓에 아들을 찾아주게 생긴 일인데도, 그가 만들어 내는 작은 변화에 적응하게 된 박복녀처럼, 지화자의 소란함에 적응하게 된다.


‘스며든다’는 표현이 딱 알맞다. 지화자는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박복녀에게 점점 스며든다. 밥을 함께 해먹고, 동물들과 날을 보내는, 분명 그 전과 같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다른 일상이 그곳에 새롭게 생겨난다.


지화자와 박복녀의 새로운 일상은 순조롭게 이어진다. 박복녀가 보관하던 딸의 유품을 지화자가 멋대로 꺼내 펼쳐 놓기 전까지 말이다. 물론 지화자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박복녀도 그것을 알고 있다. 애초에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라고 툭 터놓고 얘기하지 않은 박복녀의 잘못도 조금 있다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일로 인해 크게 화를 내던 박복녀는 결국 지화자에게 ‘이만 떠나주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 만다. 깊은 곳에 자리한 상처를 내보이기에는 지화자가 아직도 낯선 친구였던 탓이다. 심상치 않은 박복녀의 반응에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하고 지화자는 떠난다. 그러나 지화자는 갈 곳이 없다. 그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

 

 

뮤지컬식구를찾아서_사진제공더줌아트센터 (4).JPG

 

 

우연한 기회에 지화자가 자신의 집을 찾아온 계기와 돌아갈 곳 없는 그의 처지를 알게 된 박복녀는 비 오는 길거리를 처량하게 배회할 지화자를 찾아 나선다.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앉아있는 지화자에게 박복녀가 시장에서 사온 사탕을 건네 준 뒤, ‘여기서 청승 떨지 말고 집 가서 밥 먹자’ 비슷한 대사를 했던 것 같다. 남겨온 도토리묵에 된장찌개에, 맛있는 밥을 먹자고 말이다.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해 모두들 다른 정의를 내리겠지만, ‘식구를 찾아서’가 말하는 가족은 아주 단순하다. 밥을 나누는 것이다. 서로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니라도, 그저 그 사람에게 따뜻한 밥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식구가 될 수 있다. 박복녀가 지화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밥을 나누어 먹고, 잠자리를 내어주고, 비로 젖어 든 어깨 위로 우산을 씌워준다면, 그 사이에 누구나 식구가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낯선 이를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2020년의 우리에게 박복녀와 지화자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를 가질까? 무언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게 분명한 이방인이 집 마당까지 쳐들어왔을 때 그를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쫓는 대신, 일단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일까? 조금 더 서로에게 따스해지자는 메시지 역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이겠지만, 내 생각에 ‘식구를 찾아서’가 전하는 메시지는 조금 다르다.

 

피로 이어졌거나, 법이 이어준 관계만이 가족으로 인정받는 사회에서 그 구분선 밖에 존재하는 관계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일 뿐이다. 법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은 분명한 이런 관계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식구를 찾아서’는 그것이 ‘식구’라고 말한다. 꼭 부모자식일 필요도 없고, 등본에 이름을 올린 사람일 필요도 없다. 아무 공통점이 없어도 진심으로 밥을 나누고 서로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사이라면, ‘식구’라고 부를 만하다. 가족이나 핏줄이라는 단어보다도 훨씬 포용력 있게 느껴지는 ‘식구’라는 단어는 존재만으로 위로가 된다. 지화자와 박복녀가 서로에게 그렇듯이 말이다.

 

 

 

이다은.jpg

 

 

[이다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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