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공연예술]

글 입력 2020.10.21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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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유희’로 인식되는 행위 이면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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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를 온라인 생중계로 관람했다.

 

공연에 담긴 내용을 짚어보니 어릴적 그저 깔깔대며 즐겨했던 놀이의 행위에 감춰진 경쟁과 존재의 삭제를 어렴풋이 더듬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했던 놀이, 혹은 장난의 대부분은 누군가를 ‘이기는’ 규칙이 있었으며, 실수는 곧 패배, 패배자는 곧 잊혀지는 자 또는 누군가로 대체되는 자였다. 장난이 진심이 될 때, 이로 인해 집단에서 배제되거나 도태될 때, 나는 창피와 수치와 분노를 느꼈고, 내가 아닐 수 있다면 한 순간 뒤돌아 누군가를 외면할 수 있었다.

 

이겨야 한다고 정한 이는 누군가.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강요한 이는 누군가. 우리는 언제부터 이 숨막히는 경쟁을 유희라는 껍질 속에도 우겨넣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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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에는 몇 가지 유희의 행위가 등장하고, 매 행위마다 위계나 대치, 모방과 일탈 같은 것들이 몸의 움직임으로 전달되었다. 행위 말미엔 즐거움과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다는 긴장감 사이를 넘나들던 이들 중 몇몇이 사라진 뒤 그들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어떤 단어가 화면에 잠시 등장한다.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소중히 여겼던 것? 그들의 꿈? 지키고 싶은 것? 혹은 자랑? 여러 생각을 흘려보내던 중,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한 사람이, 전혀 즐거워보이지 않은 얼굴과 고통스러운 몸짓으로 삭제된 이들의 부산물 위를 오가다 화면에 비친 나무 한 그루 옆에 서는 것으로 작품은 끝났다.

 

 

 

생존을 위한 존재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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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행에서 비자림을 걸었다. 그곳엔 천년 가까이 된 비자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있는데, 그 나무가 비자림 관광의 핵심지점인 듯 했다. 나무의 덩치에 감탄할 무렵, 친구가 “이 나무 때문에 주변 식물은 다 죽었네”라고 무심히 말을 건넸다. 그 말마따나 울창한 숲 속에서 천년을 견딘 나무 주변에만 잡초 외에 이렇다할 식물이 없었다.

 

이 나무의 뿌리가 모든 양분을 가져가기 시작하며 주변에 식물이 자랄 수 없었던 건지, 이 나무를 이렇게 부풀리기 위해 사람들이 주변 식물을 다 걷어낸건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그루의 나무가 천년을 견디려면 최대한 뿌리를 넓고 깊게 뻗어야 함은 사실이겠다. 그럼 당연히 주변 식물들은 견디지 못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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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에서의 대화가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고, 마주한 영상과 하나로 연결된다. 친구였던 누군가가 나의 경쟁상대가 되고, 각자에겐 문제가 없었으나 ‘함께’라는 비교가 적대감을 형성한다. 종국에는 남이 되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겠으나 그것이 비교경쟁에서 살아남은 이와 그렇지 않은 이에게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테다.

 

사라진 이들과 남은 이 중 온전하다 할 수 있는 쪽이 있을까? 주변의 양분을 독식한 나무의 형태에 경탄하는 모습과 경쟁사회의 위쪽 꼭지점에 서있는 누군가를 동경하고 칭송하는 이들의 모습은 묘하게 겹쳐 보이고, 한 그루의 나무가 우뚝 서 있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 점차 선명히 다가온다.


작품을 관람하며 자연스레 떠오른 기억과 작품 포스터 속 숲이 닮아서 놀랐다. 나만의 착각인건가? 아니면 내 의식이 작품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착실히 전진한건가?


아무튼,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걸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국립극단(페스트)과 국립발레단(지젤)에 이어 국립현대무용단의 작품을 고화질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달가운 부분이었다. 코로나가 가져왔고 또 가져올 변화가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을 어떤 모습으로 바꿀 지 궁금해진다.

 

일단 나부터 잠옷을 입고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채 공연을 관람하는데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며, 한정된 공간 내에서 조명과 음향, 대형 스크린을 활용한 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을 실제 화면으로 관람해보니 무대와 한없이 동떨어져 있는 듯 하면서도 무용수들의 표정 하나까지 선명히 볼 수 있는 묘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방식의 다양한 공연이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이어지길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김현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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