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비가 곧 생존인 세상에서,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도서]

글 입력 2020.09.1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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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의 원제 ‘To Have or To Be’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유명한 대사 ‘to be or not to be’를 연상시킨다. 작가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인지 1부 제 1장에서 ‘존재의 철학적 개념’과 ‘소유와 소비’라는 파트를 통해 존재와 소비에 대해 설명한다.

 

작가에 따르면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자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형태’이다. 현대 소비자들은 자신이 소비하는 것과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는 빠르게 그 기능을 잃고 더 많은 소비를 요구하게 된다. 결국 현대 사회의 소비주의에 내재된 것은 ‘온 세계를 삼키려는 태도’인 것이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에리시크톤(Erysichthon)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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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를 넘어 존재로



2020년의 우리는 최대한의 생산과 소비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낳은 문제들을 겪고 있다. 장밋빛 전망을 가져다 줄 것만 같았던 세계화는 코로나 19라는 빠르고 광범위한 감염병 확산을 불러왔으며, 각종 산업의 부작용으로 환경오염과 자연재해가 심각해지고 있다. 세상이 에리시크톤이 자기 살을 뜯어먹듯이 일종의 파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


작가가 지적한 소유 양식의 단점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이 책을 저술한 당시 가졌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의미이다. 존재와 비존재가 아니라 소유와 존재의 대립이 바로 작가가 이 시대의 고민이라 할 수 있다. 소유의 폐해가 드러나고 있지만 이를 지각하지 못한 채 소유 양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에 ‘존재’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의견은 공감할 만하다.

 

안타까운 것은 적어도 현대 한국 사회에서 ‘소유’의 방식이 유용해보인다는 점이다. 지식을 ‘암송’하고 자신을 ‘상품’처럼 포장하고 전시하면서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인정은 뛰어나는 평가가 아니다. 1인분의 개인으로서 사회에 녹아들 수 있다는 인증이다. 소유 양식이 ‘효율적’이고 ‘실용적’이다.

 

여러 문제로 불안한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는 세상이라면 개인이 택하게 되는 것은 구체적이고 확실한 안정감일 것이다. ‘소확행’, ‘욜로’, ‘플렉스’ 등 작금의 유행이 희망 없는 미래에 대한 반향으로 발생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이 비판했던 ‘미래의 막연한 공포’ 대신 ‘현재의 구체적인 안락함’을 택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유형이다. 하지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 소비 외에는 매우 한정적인 상황에서 소비에 집중하는 것은 일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존재 기반의 연대하는 세상으로


  

그러나 에리히 프롬이 지적하듯 소유 양식의 삶은 기본적으로 배타적이다. 나의 소유물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으며 더 많이 갖기 위해서는 더 많이 뺏어 와야 한다. 그리고 소유로 얻는 기쁨은 한정적이다. 자원의 한계로 어느 순간 더 가질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생활에 필수적인 영역에서는 소유 양식이 당연하다고 하지만 인간이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존재 양식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회경제적 구조의 주어진 조건 아래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일체화와 연대를 육성하고, 또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일체화와 연대를 ‘추진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관계 지향적인 존재 양식과 관련하여 흥미로웠던 개념은 바로 ‘평등’에 관한 것이었다. 작가는 이 책에서 ‘평등은 물건의 한 조각에 이르기까지의 양적 평등을 의미해서는 안 되며, 소득이 각각의 다른 집단에게 서로 다른 생활 경험을 창조할 정도로 분화되어서도 안 된다는 의미의 평등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와 언어를 짝 짓고, 존재와 경험을 짝 짓는다. 존재는 기술될 수 없는 총체적인 본질이며, 경험으로 채워진다. 따라서 에리히 프롬이 평등에서 서로 다른 생활 경험을 창조하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는 존재를 구성하는 경험에서 큰 차이가 발생하면 안 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누구나 생존 욕구를 충족하고 난 다음, 단단한 자아를 형성하고 세상과 연대하는 ‘나’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인 실현 양상은 다르겠지만 모두가 진정한 본질적 자아를 탐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평등’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존재에 바탕을 둔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그들의 경제적 기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따라서 생존의 소유양식으로부터의 해방은 산업적·정치적 참여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렇게 평등의 뿌리를 마련한 다음 이를 유지하는 단서 역시 ‘존재’ 방식에 있다. 물론 소유는 안정감을 준다. 소유적 태도에서는 소유한 대상이 소유자의 정체성을 형성하므로 영원불멸한 것을 가진 자는 영원한 자가 된다. 안타깝게도 소유는 유한한 기쁨을 주는 것이며, 소유의 대상은 소멸하며, 타인과 뺏고 뺏기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다시 두려움을 낳는다.

 

나의 중심은 내 속에 있다는 존재 양식은 소유 방식의 불안함이 없다. 잃어버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무엇인가 생산하는 과정이며, 무엇인가를 생산하며 그 생산물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에 기초한다. 자기 자신을 감각할 수 있는 조건은 자본주의 의미와는 다소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필요로 한다. 유무형의 재화가 아니라 사색, 탐구가 그 결과물일 수도 있다. 온 자신을 다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할 때 개인은 존재 방식으로 나아간다.

 

또한 존재양식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같은 대상을 함께 즐길 수 있다.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셈이다. 경험의 양과 질에서의 평등을 강조하는 에리히 프롬의 시각으로 본다면 유사한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은 경험의 평등에 유익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공정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진 사회에서 “‘평등’은 어떤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이때 에리히 프롬의 견해를 참고한다면 더 ‘생산’적인, 더 ‘존재’적인 방향으로 평등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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