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은 이 노인 여성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69세'

글 입력 2020.08.2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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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는 예로부터 어르신들이 유독 많았다. 지금도 마을버스를 타면 반절이 노인분들이다. 그런데도 내가 자고 나란 이 동네는 단 한 번도 저상 버스를 운행한 적이 없다.

 

가끔 다리를 절뚝거리시며 높은 버스 계단을 오르내리시는 모습을 마주하곤 하는데, 그 지체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서 한숨을 푹푹 내쉬거나 완전히 하차하시기도 전에 버스 뒷문을 닫아버리려는 상황들을 자주 목격해 왔다. 누군가는 몸도 쇠약하신 분이 버스는 왜 타고 다니냐는 말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한 적도 있었다. 집에 계시지, 왜 난폭 운전을 일삼는 이 동네 버스를 타고 계시는지 이해가 안 간 적이 많았다.

 

생각해 보니, 지탄의 대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다리를 절뚝이는 노인들에게 '몸도 안 좋은데 왜 나오셨냐'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노인 거주 비율이 현저히 높은 동네에서 어째서 한 번도 저상 버스를 운행한 적이 없는지를 따져봐야 함을 알게 되었다. 공익을 위한 대중교통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모두를 위한 일에 누군가는 배제당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는 젊기에 배제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 노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피해를 보는 이야기를 접하면 화나긴 해도, 내가 저런 일을 겪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으면 어느 정도 사회가 나아지지 않을까, 하며 흘려보냈던 날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다시 반문했다. 지금 그들도 젊었을 적엔 똑같은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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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69세>는 성폭력 사각지대에 놓임과 동시에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 노인 효정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9세의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치욕적인 일을 당하는 효정은 고민 끝에 동거 중인 동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신고한다.

 

그러나 경찰과 주변 사람 모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효정을 치매 환자로 매도하고, 법원 역시 나이 차이를 근거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효정은 일갈을 준비한다. 그 과정이 마냥 순탄하진 않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약자인 효정은 보호받지 못한다. 일상에서 젊은 여성의 성폭력 기사는 수없이도 전해진다. 이조차도 억울하고 분하다. 그러나 노인 여성의 성폭력 피해라니. 단어만 들어도 숨이 턱 막힌다.

 

임선애 감독은 CBS 라디오 프로그램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노인여성 성폭력 피해 사례를 인용한 칼럼을 우연히 보았다고 했다. 노인 여성을 무성적 존재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편견이 되레 가해자들이 노인 여성을 타깃으로 삼게 되는 이유가 되며, 그것이 피해 여성들이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서 오히려 재범을 삼는 사례가 존재한다고. 어디에서도 노인 여성의 성폭력 사실을 다룬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누군가는 운을 띄워야 한다고 생각해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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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 좀 하지 그랬어요.'

'어떻게 조심을 해요.'

 

 

피해자를 향한 부정적인 말마따나 시선에 효정은 수그리지 않는다. 멋스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효정에게 '아가씨 같다', '누가 60대 노인으로 보냐' 라는 말을 일삼는 현실에도 효정은 자신의 특별함을 의심하지 않고 자신을 평가하는 말들을 되받아친다. 어두컴컴한 그늘에서 벗어나 봄볕으로 향하려는 발걸음은 효정이라는 캐릭터가 이 영화를 관람하는 자들에게 희망으로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효정의 이야기만을 다루지 않는다. 효정과 동거 중인 연세 지긋한 시인 동인의 이야기도 영화 속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다. 효정을 도우려 힘쓰는 동인도 결국 가부장적 사회의 수혜로 편히 살아가는 남성으로 조명되며, 그로 인해 찾아오는 쓸쓸한 무력감과 성찰을 조명하기도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효정과 동인이 노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연출한다. 픽션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69세>는 성폭력 피해를 본 노인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관객 스스로 생각하게끔 하는 문제들이 적지 않기에 전달하는 메시지가 한마디로 정리되지는 않는다. 많은 이야기를 담다 보니 효정의 이야기가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빠지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으나, 결국 용기를 내는 효정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우리가 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29세가 69세를 성폭행하였다는 간략한 줄거리를 듣고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다시 돌아보게 된다.

 

하나 분명한 건, 노인을 무성적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편견이 이 영화를 해치고 있다는 것. 영화를 두고 평점 테러 사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 의견에 힘이 실릴 것이다. '개연성이 없는 영화다, 젊은 남성을 비난하려는 목적을 가진 영화다'라며 평점 테러 소동이 일어난 후 영화를 응원하기 위해 평점을 높이려는 움직임이 지속하면서, 현재는 10점 만점에 8.67점을 기록하고 있다.

 

약자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공권력이 오히려 약자를 옥죄고 있다는 사실을 <69세>는 보여준다. 더불어 이 영화가 약자를 지키기 위해 제작된 영화라는 점도 보여준다. 폭력적인 장면을 제거하고 최소한의 불빛과 목소리만으로도 피해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임선애 감독의 윤리적인 미학을 영화 중간중간에서 캐치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을, 왜 다른 영화들은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지 못해 안달이었던 걸까? '하는 생각도 자연히 떠올랐다.

 

노인이라는 이유로 성폭력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도 안일하다. 피해의 사각지대의 놓여있는 노인 여성은, '노인'이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출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 29세의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에 '어째서 69세 할머니를 성폭행하지?'라는 시선이 아니라, '어째서 성폭행을 하지?'라는 시선으로 봐야 한다는 것. 아쉬움도, 궁금증도 많이 남았던 영화지만 이 한 가지는 깊숙이 새기게 될 것 같다. 어딜 가도 소외당하여 할 사람은 없고, 외면당할 사람도 없다는 것을.

 

 

<69세>

 

감독 : 임선애

출연: 예수정, 기주봉, 김준경, 김중기, 김태훈

장르: 드라마

제작: (주) 기린제작사

배급: (주) 엣나인필름

러닝타임:100분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0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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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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