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덕질도 바라보기 나름이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08.1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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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직도 좀 망설여진다. 덕질을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건 나에게 상당한 모험이기 때문이다.

 

내 덕질의 역사는 너무나 길고 복잡하고, 또 누구나 그렇듯이 창피해서 숨기고 싶은 부분이 많다. 떠올리자마자 이불을 걷어차고 싶어지는 그런 흑역사들도 대부분 덕질 때문에 탄생한 것들이다.

 

늘 꼭꼭 숨겨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오랜 옛날부터 나와 덕질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부터 나는 항상 무언가에 푹 빠져 있었다. 내 주위를 둘러싼 현실을 벗어나서 낯선 세계에 에너지를 쏟는 것. 오늘날 ‘과몰입’으로 명쾌하게 정의되기도 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 대상에는 게임도 있었고, 연예인도 있었고, 책도 있었으며, 어느 순간에는 현실의 짝사랑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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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 누구든 간에 나는 일생의 여러 순간에 나 아닌 다른 존재에 푹 빠져 있고는 했다. 언뜻 듣기에는 참 기묘한 일이다. 나 아닌 다른 것에 몰입한다는 건 곧 나 자신을 부정한다는 말로 들린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들어 고민했다. 내 몰입력은 많은 경우 나의 장점이 되었지만,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단점이 되기도 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어딘가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고 그저 얕게 스치고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들과 ‘머글’들을 분리하는 밈까지 등장했을까. 정말 덕후와 머글은 태생부터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만 보면 덕후와 완전 분리된 듯 보이는 머글들 역시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몽땅 투입하고 있는 어떤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 그건 때로는 본인의 커리어가 되고, 때로는 타인과 경쟁하기 위한 치열한 공부나 스펙쌓기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연애가 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치장이 되기도 한다. 단지 그 분야가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가치, 그러니까 현실적인 것으로 인정받느냐 여부가 덕후와 머글을 가르는 기준점이 되는 게 아닐까. 뭐, 이건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다.

 

덕질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신세계를 접하게 된다. 그 대상이 어떤 연예인이라고 치자. 덕후는 일단 그 사람의 무대나 디스코그래피, 혹은 필모그래피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때로는 그걸 편집해 소장하기도 하고 저작권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일부를 편집해 팬들과 공유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헤엄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경우 어떤 ‘벽’에 부딪히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언어의 장벽이 있다. 그 사람이 외국인이거나 외국에서 활동이 잦은 경우 강제적으로 해당 언어를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걸핏하면 ‘eng sub please’를 앵무새처럼 외치는 해외 팬들의 심정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험난하게 덕질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그 언어에 어느 정도는 귀가 트이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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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아일보-잡코리아

 

 

새로운 작품을 발견하고, 새로운 언어에 귀가 트이면서 부수적으로 배우게 되는 일도 있지만 때로는 삶과 덕질이 아예 분리되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취미로 좋아했던 것들이 직업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이 그렇다. 취미는 일로 삼으면 안 된다는 의견에도 물론 동의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고 푹 빠질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걸로 업을 삼는다는 건 꽤 멋있는 자아찾기의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생업 이상으로 일에 의미를 두는 나 같은 사람에게 덕질은 때로 현실에 의외로 쓸모있는 도움을 주기도 한다.

 

광고업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에도 나의 잡식적(?)인 덕질 패턴이 많은 기여를 했다. 닥치는 대로 콘텐츠를 접하고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며 덕질해왔던 내 역사는 얼핏 시간낭비로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해 후회를 하느냐, 자양분으로 삼느냐는 본인의 선택이지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 좋아하는 것에 미친 듯 몰입하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적이 있다면, 그걸 어떤 식으로든 ‘나의 진짜 현실’에 써먹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새는 덕질이 단순 현실도피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줄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딴짓으로 대부분을 보낸 자의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한민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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