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거푸 넘어지는 의문 속에서, 곰브로비치 [문학]

불가해한 존재들의 외침, 낯짝, 조소
글 입력 2020.08.11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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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헐겁고도 조밀한 빗방울들, 우리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비가 쏟아졌다,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바람이 휘몰아쳤다, 공황 상태, 각자 가까운 나무 밑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소나무 가지에서 물이 새어 나오고, 물방울이 떨어진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물, 물, 물, 어둠, 떨어지는 물방울이 만들어 낸 수직의 벽면, 절망에 허덕이는 손전등의 불빛이 그 벽을 휘젓고 있다, (…)

- 『코스모스』

 

 

빗소리가 돌연 무섭게 느껴질 때. 뾰족한 펜촉이 유난히 날카로워 보이고, 벽에 박힌 못이 날 해칠 것만 같을 때. 그리고 책의 얇은 종이가 날카롭게 손가락을 베어버리는 일처럼. 일상적인 세상이 한순간 낯설어질 때가 있다. “헐겁고도 조밀한 빗방울” 소리가 오늘도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불규칙하고 묵직한 그 소리는 나라는 존재를 감싸는 세상인 것만 같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근원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하지만, 그 존재들은 자신을 찾으려 자꾸만 헤매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해석하고 정의하려 힘쓴다. 하지만 불가해한 것들의 부단한 노력은 자주 위협받고 부서진다. 그래서 어느 날, 세상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가 부끄러워 가리고 있는 얼굴이 온전한 ‘나의 얼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자꾸만 세계 모든 것에 의문이 생긴다면 여기, 곰브로비치의 소설들이 있다.

 

비톨트 곰브로비치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작가로, 동유럽 문학에 대한 관심이 적은 사람에게 그 이름부터 이미 낯선 작가다. 그런데 작품을 읽으면 ‘낯섦’이 더 강해진다. 그의 작품은 기상천외한 흐름을 가지면서 모호하고 저 혼자 이야기하는 듯 보이며 애매하게 유지된다. 독자는 소설을 읽는 내내 어딘가에서 걸려 넘어진다. 잦은 쉼표, 뜬금없이 튀어 오르는 집착, 소설과 전혀 상관없이 끼어드는 이야기 등에 보기 좋게 걸려 넘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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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아마도 다른 모든 예술 장르를 통틀어 가장 열려 있고, 가장 자유로운 장르일 것이다. 문학 속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 비톨트 곰브로비치

 

 

곰브로비치는 첫 장편 소설 『페르디두르케』를 발표 이후 24년 뒤에 세 번째 장편 소설 『포르노그라피아』를 발표하고, 네 번째 장편 소설 『코스모스』로 국제 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이 세 개의 소설이 번역되어 있다. 『페르디두르케』는 어린 시절로 납치된 서른의 소설가가 겪는 모험이며, 『포르노그라피아』는 시골로 가게 된 두 지식인이 겪는 망상과 살인사건이고, 『코스모스』는 외딴곳에 찾아든 두 지식인에게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다.

 

『페르디두르케』는 곰브로비치가 사랑하는 것들이 집약적으로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포르노그라피아』에서 더 소설적인 방식으로 풀어진다. 그리고 『코스모스』에서, 미스터리한 추리 소설의 형태를 띠며 그만의 질서정연한 세계, 『코스모스』가 구축되고 있다고 보았다.


 

 

부분들


 

 

이 중 어떤 고통을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고통으로 삼을 것인가. 그리고 어떤 부분을 전체로 삼을 것인가. 어떤 것을 잡아 스타일을 모방할 것인가. 이 고통들과 부분들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정말 빌어먹을 부분들이다.


- 『페르디두르케』

 

 

곰브로비치의 이야기는 ‘부분’들을 잡아내기에 집요하다. 자꾸 세상의 것들을 분해하고 전체에서 떼어내 낯설게 만든다. 너무 많은 부분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도록 한다.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길에 장애물을 세워둔다. 독자에게 발을 거는 갈라지는 단어들의 향연이지만, 특유의 표현력은 소설을 끝까지 읽도록 만드는 힘을 가진다.

 

『페르디두르케』는 낯짝과 장딴지와 궁뎅이에 관한 이야기다. 신체의 어느 부분이 돌연 튀어나와 소설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코스모스』에서도 등장한다. 『코스모스』는 입술과 손에 유난히 주목한다. 카타시아의 입술과, 레나의 손은 계속해서 소환된다. 『포르노그라피아』는 지렁이와 같이 아주 사소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두 젊은이를 엮으려 한다.

 

점점 ‘아주 사소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코스모스』의 세계 속 사물들은 그 제목처럼 질서정연해진다. 주인공 비톨트는 이것과 저것이 모두 관계가 있는 듯이 집착하고 엮어버린다. ‘매달림’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참새와, 막대기와, 고양이와 루드빅을 그리고 레나까지 비톨트의 집착이 이어진다.

 

그가 어째서 이렇게 전말을 알고 싶어 하는지, 그래서 진짜 전말은 무엇인지는 비톨트 자신도 알지 못한다. 바르샤바를 떠나 도착한 자코파네는 그에게 새로운 세계였다는 것, 그리고 그는 결국 다시 바르샤바로 돌아와 다시 궤도에 올랐으며 그의 집착이 무색하게 그 후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그뿐이다.

 

『페르디두르케』 속 주인공이 궁뎅이를 피하지 못한 것처럼, 『포르노그라피아』 속 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른 후 즐거우면서 허탈하게 웃었던 것처럼, 세계의 낯짝은 두꺼워서 우리의 의문을 쉽게 없애버릴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세부 항목들과 하찮은 사안들이 모여야 숲이 완성되는 걸까, 우리는 ‘숲’이라고 말하지만, 그 단어는 분명치 않고, 익숙하지 않으며, 정립되지 않은 것들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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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숙


 

곰브로비치는 미성숙과 젊음을 사랑한다. 형식을 벗어난 불완전함, 애매모호한 미완성을 내놓는다. 『페르디두르케』 속 주인공은 미성숙의 세계로 납치를 당했고, 『포르노그라피아』 속 두 지식인은 미성숙을 갈망하며, 『코스모스』 속의 주인공 비톨트는 지식인이라는 자신의 지위에 맞지 않게 미성숙한 행동을 반복한다.

 

『페르디두르케』에서 주인공이 납치당한 세계 속의 학교는 학생들에게 ‘순진’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하인이 ‘감히’ 주인의 뺨을 때리는 상황을 만들며, 견고했던 것을 뒤집어 불완전해지길 기도한다. 그리고 ‘궁뎅이’를 피해 도망치는 그들에게 안식처란 없다. 손으로 낯짝을 가리고 달리는 독자들에게 일침을 날리며 소설이 끝난다.

 

『포르노그라피아』와 『코스모스』는 서로 이어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모두 지식인 비톨트와 그의 동료가 함께 겪은 모험 이야기이며, 바르샤바를 떠나 외딴곳으로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들이 도착한 ‘외딴곳’에는 미성숙이 존재한다. 시골의 젊은, 미성숙한 두 남녀를 연결 짓거나 그 스스로가 끝없이 미성숙해지며 지나치는 모든 것들에 집착한다.

 

 

내가 알게 된 것은, 혹은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던 것은 단지 카롤이라는 미성년, 그의 미성숙이 성년인 나, 나의 성숙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나는 알았다. 그가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라는 것을, 그가 자신의 허기, 즉 욕망으로 인해 타인에게 쉽사리 자신을 열어놓곤 한다는 것 역시…….


- 『포르노그라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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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걸 한 게 정말 나였을까?


- 『페르디두르케』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긴 (나는 생각했다.) 거의 언제나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혹은 존재의 요건을 미처 다 충족시키지 못하곤 했다, 그건 우리가 주변의 모든 사물들과 무관심하고, 혼란스럽고, 단정치 못하고, 초라하고, 비열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 『코스모스』

 

 

나의 낯짝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잘 짜여있는 세상 속에서 나의 젊음과 미성숙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을까. 어디 한번 생각해보라며 곰브로비치의 소설은 나에게 발을 건다. 나와 세상 사이의 불균형이 존재를 휘청거리게 만들고, 그 속에서 중심을 잡으려 고군분투하지만 실패하는 우리들이 있다.

 

하지만 어디 넘어지면 어떤가. 10번 넘어지면, 10번 일어서면 된다. 반복되는 기립에서 우리는 견고해진다. 장애물을 인식할 때, 그것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 때의 쾌감도 있다. 수전 손택의 『페르디두르케』 해설 마지막 문장이 의문과, 문학과 고군분투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욕망을 정상의 틀에 맞추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장엄한 조소가 영원하기를……. 그리고 위대한 문학의 영역도 그러하기를."

 

- 수전 손택(Susan sontag)

 

 



[진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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