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비혼, 여성, 장녀의 돌봄노동에 대하여, '장녀들' [도서]

글 입력 2020.06.2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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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라는 건, 아름다운 사랑의 약속이라고 굳게 믿던 시절이 있었다. 가부장제가 ‘정상’으로 이야기되는 곳에서, ‘가족의 사랑’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은 내가 가부장제 가족 구성원 역할을 요구받는 매 순간 확신하게 되었고, 곳곳에 숨어있는 폭력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나만의 사랑 표현 방식이야’라는 말보다 폭력적인 방식이 또 있을까. 결혼은 자신을 지우고, 재조립해서 새로운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과정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로 그랬다. 명절 때마다 큰아빠 집에서는 제사를 지냈는데, 그 시간만 되면 아빠의 얼굴이 무서운 표정을 짓고, 내 걸음 하나에도 눈알을 부라리면서 주먹을 날릴 것 같던, 그 공기가 지독하게 싫었다.

 

우리 집에는 절대 없을 거라 믿었던 가부장제가 발동함과 동시에 공포를 느꼈다. 분주하게 음식을 하고 나르는 엄마와 큰엄마, 그리고 그동안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검은 옷으로 갈아입던 아빠와 큰아빠를,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울고, 머리를 죄다 뽑아버리는 상상으로 화를 삭일 뿐이었다. 특히 나는 큰아빠를 싫어했는데, 할머니에게 매번 ‘할망구’라고 부르는 것도 싫었고,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명령하듯 소리 지르는 걸걸한 목소리도 싫었다. 똑같은 몇 년이 지나고, 할머니는 치매 판정을 받으셨다. 달라진 건 없었다. 아빠와 큰아빠는 정갈하게 깎아둔 배와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댔고, 엄마와 큰엄마는 할머니 입가를 연신 닦았다.

 

사람들은 ‘딸이 없어서 어떡하냐’, ‘나중에 남는 건 딸뿐이야’, ‘아들보다는 애교 많은 딸이 최고지’ 등의 이야기를 뱉어댔다.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딸이고, 여성이었다. 딸바보는 있으면서 아들바보는 없었다. 엄마는 나에게 여느 딸처럼 애교도 부려보라고 했지만, 남동생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족 안에서 딸이라는 나의 역할은 이해심 많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집안을 밝히며, ‘어머니’의 역할을 가슴에 새기면서 자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느 누구의 욕구도 채워줄 수 없으며, 내 욕구 또한 어느 누구도 채워줄 수 없다고 되뇌면서도, ‘딸이라는 도리를 다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딸이고 장녀니까 모부를 더 살뜰하게 챙겨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지독하게 사회화되어 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나 <집 지키는 딸>의 나오미는 비혼 여성, 장녀다. 이 두 가지 수식어는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나오미 자신의 모습에게 죄책감이라는 화살로 날아온다. ‘장녀니까 솔선수범해야지’, ‘비혼이니까 너는 돌볼 가정이 없잖아’라는 이유로. 거기에는 다른 사람이 아닌 딸에게 의지하고픈 어머니의 욕구와, 자신은 돌볼 다른 가정이 있으니 언니가 오랜 추억이 깃든 집을 지키고 어머니를 보살피기를 바라는 동생 마유코의 욕구가 있다. 그곳에 나오미의 욕구는 없다. 한쪽의 욕구가 무시된 관계는 슬프다. ‘사랑’이나 ‘효’로 이야기되는 관계 속에 얼마나 많은 욕구들이 묵살되었던가.

 

“그다음부터는 본격적인 설교였다. (…) 지금의 마유코에게 사회적 지위나 직업적 성공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 집안에서 맡은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신 있게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타이른다.”

 

그럼에도 장녀로서의 도리를 져버릴 수 없는 것은 나 또한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침묵했고, 당연시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가 바친 시간에서 자라왔던 나는,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대안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지금의 가부장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가부장제로 인해 여성, 남성 모두가 고통받는다. 가부장제를 따르는 이들은 연결을 끊어내고, 억누르고, 묵살함으로써 ‘남자다운’ 힘을 얻었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난도질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가부장제의 대안을 찾고자 하는 모든 인간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장녀들>에서 출발하는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결국에는 인간 모두에 대한 존중과, 서로를 향한 연결의 목소리로 이어질 수 있음을 생각해본다.

 

“여자의 인생에서 남자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지만, 밥벌이 수단은 필요하다. 한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20년의 계약 기간이 지난 뒤 이 토지에서 계속 수익이 발생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기 손으로 생활비를 벌 수 있다면, 최소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다가올 ‘독신 여성의 객사’라는 시나리오는 사라진다.”


 


 

 

장녀들
- 네가 시집가면 난 어쩌냐 -


지은이 : 시노다 세츠코
 
옮긴이 : 안지나

출판사 : 이음

분야
일본 단편소설

규격
135*200

쪽 수 : 340쪽

발행일
2020년 05월 29일

정가 : 14,800원

ISBN
978-89-93166-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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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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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Y2eon
    • 첫 번째 인용구가 인상 깊었어요. 며느리다운 것, 엄마다운 것, 여자다운 것. 사회가 마유코에게 요구했던, 마유코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의무적으로 갖추길 요구했던 덕목들. 그런 강제적인 것들이 미유코의 정체성에 개입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의 잔재 아래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특정 성별의 역할로 한정되는 양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짚어주신 대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폭력들을 묘사한 대목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네요.

      성별을 테마로 다루신 다른 글에서도 비슷한 관점을 유지하셨던  것 같은데요. 장소현 님은 참 다정하고 사려 깊은 시선을 가지신 것 같아요. 남성이건 여성이건 말씀하신 대로 그런 차별과 편견들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여성인 내가 아닌, 남성인 어떤 타인들의 입장까지 헤아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았거든요.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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