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형의 세계 [사람]

나의 시절에 있어 줘서 고마워
글 입력 2020.05.2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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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있는 원룸의 전세 계약이 종료되는 시점이 다가왔다. 2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자취방과 보낸 나날들이 못내 아쉬운 한편, 앞으로 만날 새로운 인연을 위해 이곳에서 쌓아온 추억을 잘 정리하겠노라 다짐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매년 의식을 치르듯 이사를 해온 나로선 이 과정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앞으로 쓰지 않게 될 물건들을 처분하고, 여전히 필요한 물건들은 적당한 크기의 박스 안에 모아두면 된다.

 

필요한 물건을 분류하는 과정 또한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잦은 이사 덕분인지, 홀로 살아가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인연을 정리하는 것에 제법 능숙해졌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시간이 지나도 정리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집안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인형’들이다.


 

 

인형을 사랑하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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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형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이렇게 문장을 쓰긴 했으나, 사실 ‘무척이나’ 같은 부사와 ‘좋아한다’라는 동사로는 그 감정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 그 어떤 긍정의 언어로는 인형에 대한 감정을 나타내기 어려울 만큼, 인형이란 존재는 내게 큰 의미를 부여한다. 어쩌면 ‘인형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겐, ‘사랑한다’가 ‘좋아한다’보다 더 깊은 애정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형을 가진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시츄’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인형은, 내 종아리만 한 키에 머리가 몸통보다 큰 친구였다. 그래서 나는 이 친구를 시츄가 아닌 ‘가분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외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시츄는 검은 가죽 코가 얼굴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기괴한 느낌을 주는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시츄는 특유의 처진 눈 덕에 순한 인상을 남겼다. 나는 그런 시츄에게 단번에 끌렸다. 어리숙한 눈매에서 비치는 소심함이 나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시츄의 소심한 성격은 스스로 짐작해보고 설정한 것이었다. 하나의 사물에 불과한 존재에 작위적으로 성격을 부여하는 행동은 아버지와 함께한 인형 놀이에서 비롯됐다. 아버지는 종종 시츄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을 건네시곤 했다. 시츄의 입을 빌린 아버지와의 대화는 ‘내일 학교 마치면 치킨 시켜 먹자’, ‘숙제 얼른 끝내고 나랑 놀자’ 등과 같은 일상적인 말들로 이뤄졌다. 아버지와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츄가 진짜 살아있는 친구로 느껴졌다.

 

시츄와의 대화를 계기로 다른 인형들에게도 성격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형들도 인간처럼 성격이 있으리라는 일종의 세계관이 정립됐다. 이는 사실 세계관이 아닌 소망이었다. 인형들도 생각을 할 수 있게 돼, 내가 인형들에게 주는 애정을 그들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러한 상상의 나래들이 내가 인형이라는 존재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된 발단이었다.

 


 

To. 나의 오랜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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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자취방에는 열 명의 인형 친구들이 살고 있다. 본가에 두고 온 인형들의 수를 더하면, 지금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은 거의 열다섯 명 가까이 된다. 이 친구 중 일부는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부터 함께해,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을 같이 보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중학생이던 내가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한 만큼, 인형들에게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날카롭게 빛났던 분홍 토끼의 흰 수염은 시든 나뭇잎처럼 한풀 꺾였고, 배를 토닥이면 울음소리를 내던 하얀 새끼 양은 이제 아무리 배를 만져도 울지 않는다. 아무리 인형이라도 누구에게나 스며드는 세월의 흔적을 피할 순 없었나 보다.

 

어머니는 이 아이들을 볼 때마다, 이제 수명을 다한 것 같으니 보내주자고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쉽사리 어떤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이미 빛이 바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해주지도 못하니 처분을 하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와 헤어지는 방식이 ‘처분’이라는 것을 아직까진 감당하기 어렵다.

 

물론 여태껏 헤어지지 않은 인형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학교에 간 사이 어머니께서 처분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이별하게 됐다. 이는 엄연히 자의적 이별이 아닌 강제적 이별이었다. 여태껏 수많은 인형을 사랑했으면서, 제대로 된 이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사람과의 헤어짐은 이렇게나 익숙한데, 이젠 어떤 사람과 헤어지지 않는 게 낯설기만 한데 왜 인형과의 헤어짐은 이렇게나 낯설기만 할까. 고작 말 못 하는 솜뭉치일 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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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형들에겐, 타인을 통해선 볼 수 없는 나의 시절이 담겨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사진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세세한 추억들이 있다. 날아갈 듯 기쁜 날도 있었고, 떠나갈 듯 울어버린 슬픈 날도 있었다. 몸서리치게 창피한 날도 있었고, 왠지 모르게 설레고 흥분되는 날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사랑하기도 했지만 부정하기도 했다.

 

인형들에겐 그 모든 나의 모습이 스며들어 있었다. 인형들 하나하나엔 나의 향기가 배어있다. 스스로를 부정했던 날조차 사실은 애틋한 시간이었고 그때의 나 또한 소중한 존재였음을 깨달았기에, 그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담아낸 인형들이 더욱 소중하다.



‘고마웠어.

내 어린 시절을 함께 해준 장난감들아’


 

‘토이스토리3’에서 앤디는 어린 시절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친구들에게 이와 같은 작별 인사를 건넨다. 나 또한 앤디처럼 정든 인형들과 작별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언제가 될진 아직 모르겠다. 여전히 인형들과의 이별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올 이별의 순간만큼은 제대로 마무리 지은 헤어짐이기를, 앤디처럼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친구들에게 꼭 남기고 싶은 말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친다.

 

 

예쁘기도, 지질하기도 했던

나의 시절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내가 네 친구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

 




[황채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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