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 세 가지의 숨결을 불어 넣다 [전시]

글 입력 2020.05.2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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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관람객의 상상


 

‘도슨트 없음’


난 미술관에 가면 열이면 열 무조건 해설을 듣는다. 그런데, 도슨트 없는 특별전이라니, 머리가 멍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작품을 이해하란 말인가?

 

인사동에서 개최되고 있는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은 도슨트가 없다. 일반적으로 도슨트는 미술 작품을 보는 보편적인 방식과 올바른 길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한 설명을 들으면 그 대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하기 마련이다. 오히려 설명으로 이야기가 괜히 현학적인 말만 오고가는 허울만 가득한 메아리로 전락하기 쉽다.


또한, 대상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 대상은 더 이상 변하지 않는 다는 가정을 내세우는 것과 같다. 만일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 대한 설명으로 우리가 갖는 프레임 속에 그를 가둬놓고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는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 그 사람의 행동과 말로 판단, 규정, 그리고 설명하는 우리는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이러한 우리의 오만함은 미술을 감상할 때도 나타난다. 우리는 자꾸 작품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마그리트의 <연인>(1928)에서 천으로 머리 전체를 감싸 다소 오싹한 느낌이 드는 장면을 보면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이러한 해석을 한다: ‘유년기 마그리트의 어머니 자살에 대한 기억에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가 강에서 자살 후 건져진 시체는 얼굴이 흰 천으로 덮어있었고 마그리트는 이를 봤다.’


그 외에 <선택적 친화력>(1933)이라는 작품을 통해 새장과 알 사이의 친화력, <골콩드>(1953)라는 작품을 통해 개성 잃은 사람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분석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그리트의 해석이 아니라 우리가 갖는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크기변환]연인.jpg

 


비평하고 분석하려는 노력이 지나치면 우리의 상상이 제한된다. 상상하지 않고 특정한 설명에만 머무르게 되면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계속 변해가는 것처럼, 작품 또한 변화가 있어야 살아있는 것이다. 도슨트가 없는 전시, 설명이 최소화된 패널 덕분에 우리로 하여금 마음껏 상상하게 도와준다. 관람객은 서로 다르게 작품을 만나 상상하며 작품에 숨을 불어 넣는다.

 

 

 

두 번째: 예술가의 창조


 

모든 예술가는 창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만일 화가가 그림으로 창조하고자 한다면, 불가피하게 2차원 화폭에 담아내게 되어 창조는커녕 역설적으로 그 대상을 박제시키고 만다. 그래서 마그리트는 그림에서 대상을 살려내려고 발버둥 쳤다.

 

마그리트는 입체파의 그림처럼 한 대상의 형태를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툭 던져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불쾌하지는 않지만 불편한 작품들의 연속이었다.


마그리트를 포함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사고가 마비되어야 무의식에 숨어있는 원초적인 본성이 깨어나 표면으로 떠오를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의 그 본성을 깨우기 위해 마그리트는 온갖 노력을 한 티가 났다. 그리고 마그리트는 우리에게 그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의 사고가 마비되는 구체적인 사례를 보자. <익숙한 대상>(1928)처럼 남자 앞에 떠있는 사물들이나 <빛의 제국>(1954)처럼 낮과 밤이 공존하는 비논리적인 그림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혼란이 오는 까닭은 우리가 어딜 쳐다봐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마그리트는 연관이 부족한 대상들을 하나의 화폭에 담았는데, 이들 중 어떤 것을 더 강조하거나 덜 강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의 다양한 사물을 어떤 순서와 흐름으로 보고 어떻게 받아 들어야하는지 혼란스럽다. 익숙한 사물을 익숙한 대로 바라본다면 그 사물을 가둬놓아 생명력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사물을 살아나게 하려면 우리는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봐야하고, 그렇게 하도록 마그리트는 강제했다.


 

[크기변환]익숙한 대상.jpg

 


마그리트는 이와 같이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1928)를 보면 한 남자가 여인을 그리는데 마치 그림이 완성되면 여인이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기억>(1948)이라는 그림에서 하얀 여인 조각상에 쨍한 빨간 색이 묻혀 있다. 마치 피를 연상케 한다. 딱딱한 조각상에 생명과 직결된 피를 채색해서 마치 그 여인이 어떠한 과거를 갖고 이에 대한 기억을 머금고 있는 듯하다.


 

[크기변환]기억.jpg

 

 

 

세 번째: 전시관에서의 재탄생


 

이 전시는 ‘특별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그리트의 작품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여러 대표작을 증강현실(AR)기법으로 그림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다. <빛의 제국>(1954) 연작을 영상 기법으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작품 속에 빠져들 수 있다. 그 유명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1928-1929)는 실물이 떡하니 있어 포토존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마련되어 있다.


재미있는 공간 ‘미스터리 룸(Mystery Room)’에서는 <금지된 재현>(1937)속에 한 남자가 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작품 속 이 남자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거울의 반사적 성질을 부정하고 남자의 얼굴이 아닌 뒤통수가 거울에 비춰진다. 우리도 이 거울의 특성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 마치 그림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며 마치 <금지된 재현>의 그 남자가 거울을 바라봤을 때 나타났을 충격을 내가 새롭게 되살리는 듯했다.


이러한 실감형 미디어 콘텐츠로 마그리트의 작품을 심장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생명체로 재탄생되었다.


 

[크기변환]금지된 재현.jpg[크기변환]진짜금지된재혀.jpg

 

[크기변환]빛의 제국속에서 나.jpg
빛의 제국을 체험하다

 


나는 초현실주의가 ‘기존 체제를 뒤집는 저항’이라기보다 말 그대로 ‘현실 그 자체보다 더 현실적인 어떤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 특별전은 예술가가 현실을 창조하는 것에 더불어 관람객의 창조와 전시 구성 자체에서 또 창조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우스갯소리로, 2시간의 관람을 마치고 나서 엄청난 현실, 즉 ‘슈퍼’ 초현실주의를 경험하고 나온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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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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