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쓸모 없음의 쓸모 - 그림책 에세이 '가끔은 내게도 토끼가 와 주었으면' [도서]

어른을 위한 그림책 입문서
글 입력 2020.05.1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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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다시 좋아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학창시절 '소설동화창작실습'이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짧은 어린이, 청소년 동화책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은 경험을 한 후부터였다.


그래서 사실 그림책이 좋다고만 말하고 다녔지 제대로 읽어 본 기억도 별로 없었다. 어렸을 때 몇십 번이고 다시 읽었던 동화책들은 내 품을 벗어난 지 오래고, 그렇다고 따로 어린이 책 코너에 기웃거릴 만큼 열정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림책 에세이 '가끔은 내게도 토끼가 와 주었으면'을 읽으면서 그림책은 우리 일상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다른 책이 아닌 딱 그림책에 관한 에세이를 쓴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저자의 말처럼 "그림책은 대부분 50쪽 내외다. 글도 많지 않고 복잡하지 않다. 바로 그 점이 어려운 이유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히기 때문(269-270p)"에 그 어떤 책보다도 그림책은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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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앞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 일, 휴지통을 비우러 나갔다가 그대로 서서 나무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헤아리는 것처럼 '아무 쓸모 없는 일'에 시간을 써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되게 하는 힘도 그림책에서 온다.(9-10p)"

 

편안한 마음으로 온전히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일은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다. 해야 할 일과 더 중요해 보이는 것들이 우리 머릿속을 꽉 잡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취미조차 효율적이고 도움 되는 것을 찾으려고 하게 된다. 그림책은 복잡한 생각 속에서 "이유 없이 좋은 것"을 즐기는 방법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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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내게도 토끼가 와 주었으면'이 다루고 있는 그림책들이 어린이를 위해 쓰인 그림책이라는 점이 좋았다. 책 속에는 24권의 그림책이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주인공은 어린아이이다. 이 책의 테마 그림책이기도 한 '가만히 들어주었어'에는 아이의 옆에서 가만히 들어주는 토끼가 등장한다.

 

"친구들은 가버리고 우울한 테일러에게 토끼가 찾아온다. 토끼 앞에서 테일러가 한 일련의 행동들은 앞의 친구들이 이렇게 해보자고 얘기한 것들과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그건 테일러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줬느냐의 문제였다.(42p)" 아이 옆에 말없이 딱 붙어 앉아있는 토끼 그림은 조용한 울림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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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로 살고 있는 저자의 정체성도 많이 녹아있다. 남편이 은퇴하고 좀 더 자유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조금 달랐다. "이제 나는 그때가 좋았던 걸 안다. '그때', 식구들이 집에서 나간 후 혼자 있는 시간에 그렇게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던 이유는 바로 '나'에게 있었다.(73p)"


그림책 '날 좀 그냥 내버려 둬'에서 저자는 그 어떤 바쁜 상황에서도 존재하는 나 혼자만의 시간의 소중함을 색다르게 깨닫는다. 결국 여유와 나를 위한 시간은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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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직접 구매해 보고 싶은 그림책은 '도서관'이다. 여기에는 책을 아주 좋아하는 엘리자베스가 등장한다. "'책을 그렇게 읽어서 뭐 하느냐고?' 엘리자베스에게 그런 건 필요 없는 질문이다. 뭔가 쓸모 있는 일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완벽히 즐겁기만 할 리가 없지 않은가.(84-85p)"

 

이 대목에서 머리가 띵 울렸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쓸모"까지 완벽해야 더없이 즐거운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엘리자베스의 마음가짐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냥 즐기는 법을 잊고 살고 있을까.

 

편지로 된 글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저자는 편지로 엮어 만들어진 책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사정과 마음을 짐작하는 일에는 이른바 은밀한 탐색의 즐거움이 끼어드는 것이다.(151p)"

 

문학의 최대 즐거움 중 하나는 '생략'인 것 같다.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넘겨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간의 경험으로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개연성을 지키면서 최대의 상상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 글 짓는 것의 관건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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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그림책이 어른들에게도 와닿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겪는 감정들은 모두 어릴 때 처음 형성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림책 '수영장 가는 날'의 수영을 두려워하는 주인공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취업에 앞서 큰 벽을 느끼고 첫 출근 전 날 걱정에 휩싸일 때, 또는 중요한 발표에 앞서 긴장될 때, 모든 부담감과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수영장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가 된다. "경계를 넘어서는 보다 쉬운 방법은 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걸 아는 것, 그래서 시도해 보는 것이다." 잘하지 못해도 된다면 생각보다 잘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림책 에세이를 읽은 후, 이제는 그림책에 대해 뭐 좀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림책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쓸모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알았다. 어린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라면 어른의 마음도 보듬을 수 있다.


감히 이 책을 어른을 위한 그림책 입문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에게 허용되는 책의 범위가 이 그림책 에세이를 통해 한 층 넓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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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내게도 토끼가 와 주었으면
- 왜 항상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


지은이 : 라문숙

출판사 : 혜다

분야
에세이
 
규격
130*188 / 올 컬러

쪽 수 : 276쪽

발행일
2020년 03월 10일

정가 : 14,800원
 
ISBN
979-11-967194-5-6





저자 소개

  
라문숙(필명: 단어벌레)
 
읽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단어벌레'라는 필명으로 네이버 블로그와 카카오 브런치에 글을 쓴다. 갑옷처럼 걸친 표정과 감정을 걷어내고 몸에 새겨진 것들을 글로 풀어놓으며 삶이 명징해지는 걸 경험하는 중이다. 읽고 마음에 새긴 것들이 어느 순간 자신을 드러내 삶을 환하게 비추듯, 자신의 글 또한 누군가의 마음에 빛으로 가닿기를 바란다. 일기처럼 써 내려간 글을 모아 『안녕하세요』, 『전업주부입니다만』, 『깊이에 눈뜨는 시간』을 냈다. 오래 읽으며 매일 쓰고 많이 웃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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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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