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도서]

글 입력 2020.05.1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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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서를 편식한다. 자기계발서 혹은 여행기를 좋아한 나는 외국작가의 에세이를 본 것은 성인이 되고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다. 글은 술술 읽혔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에세이는 긴 호흡, 생각의 흐름, 다양하고 눈으로 읽으면 금방 상상이 되는 묘사, 그에서 유발되는 웃음이 가득한 글들의 연속이었다.


사람에 대한 정보, 타인의 행동 묘사, 그들과 행사 등에 관한 정보, 소나 말 등 동물에 관한 묘사 등이 참 재미있었다. 그중 몇 개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구름이 없고 건조하지만, 이마가 당길 정도로 뜨겁다. 정오가 되면 불가마가 될 것이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무더워지던 날을 묘사하는 것 같아 웃음이 번졌다. 태국 여행을 했던 때도 기억난다. 콘크리트 위로 아지랑이가 올라오고, 볕에 눈을 뜰 수 없었고, 땅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만 같았었다. 지금 당장 땅바닥에 주저앉아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태였었다. 불가마 그 자체였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고 끔찍하다.


곧 다가올 한국의 무더운 여름에, 한국인들의 이마는 모두 불가마가 되리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을 신기해하며 그저 시원한 오아시스 같은 곳을 찾아가는 수밖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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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장의 동물 중에 콧구멍이 큰 동물은 언제나 돼지라고 생각해왔는데 소의 콧구멍은 정말 만만치 않게 크고 축축하며 분홍색 혹은 검은색이다.



소와 돼지의 모습은 위 문장보다 더 긴 문단으로 표현되어있다.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재미있게 표현했다. 작가의 생각을 뒤따라가 보자면, 나는 콧구멍이 큰 동물을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하마 정도면 어떤가? 돼지 콧구멍만큼 큰, 소의 콧구멍이라니.


생각을 따라 들어 가보니, 동물원에 가본 적은 초등학생 이후로 가보지 못한 것 같다. 동물의 콧구멍을 보려면 동물원이나 시골을 가야 할 텐데, 지금 성인이 된 내 인생에서 앞으로 갈 일은 없지 않겠나 싶다. 조카를 데리고라면 갈 일이나 있으려나. 흔히 볼 수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의 콧구멍은 많이 보았다. 큰 동물들, 그의 콧구멍이 궁금하다.



토박이 친구의 아버지는 돼지 냄새에 대해 “죽음의 신이 똥을 싸는” 냄새라고 말했다고 한다.



죽음의 신이 싸는 똥냄새는 어떨까. 무지막지하다는 건지 뭔지 감이 잡히질 않지만, 그만큼 강렬한 것을 이리 재밌게 표현한 것이 웃기기만 하다. 어느 날, 시골 쪽을 드라이브하면서 맡았던 비료 냄새는 내겐 그저 ‘억, 똥 냄새’에 불과했다. 나는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운전 능력을 증진해주는 냄새? 그곳을 벗어나려면 살려고 라도 열심히 운전해 나갈 수 있으니까.



바다코끼리 같은 수염과 야구 모자, 굵은 팔목과 올챙이배가 특징이지만 극히 활기차고 지적이며 주의 깊은 눈빛을 갖고 있다. (중략) 아무렇게나 묶어 올린 풍성하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은 가끔 삐져나와 흘러내리기 때문에 눈 앞을 가리지 않도록 자꾸만 치우거나 반지를 끼지 않은 손등으로 쓸어 넘겨야 한다.



나는 어떤 사물을 보고 이토록 길게 보면서 여러 가지 묘사를 한 적이 드물다. 어느 책에서 그랬다. 무언가를 느끼고 감사함을 느끼며, 허튼 생각을 집어넣고 심미안을 위해선 오래 보고,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며 묘사를 하라고 말이다.


내가 앉은 2층, 카페 통유리 밖에는 초록 은행나무가 있다. 지금은 은행나무가 내 모델이다. 초록색 잎이 무성하다. 바람 따라 힘차게 흔들거리는 것도, 대충 흔들리는 것도 있다. 부채꼴 모양의 잎들은 박수치고 있다. 이들이 노랗게, 빨갛게 염색되어 바닥에 떨어지고, 한 줌의 재가 되어 없어진다. 지금 보고 있는 잎들을 나는 내년엔 볼 수 없다.


사람의 인생도 그런 거겠지. 나무에 매달려 이렇게 저렇게 인연을 맺고 서로 마주치고 만난다. 바람이 불면 모두가 흔들거리고, 잎이 모두 익으면 하나둘 떨어진다. 누가 먼저 물들고, 누가 먼저 떨어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런대로 모두 이번 생에 만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잎들이리라.



벤 턴불이 불행하다는 사실은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명백하다. 그러나 그가 불행한 이유는 그가 개자식이기 때문이라는 사실, 그는 이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 <시간의 종말을 향하여>에 대한 서평에서 남긴 그의 문구이다. 쪽 수는 몇 쪽 되지 않지만 신랄하고 거침없는 비판에 보면서 조금 당황했었다. 이렇게까지 비판할 수 있다고 느꼈고, X자식이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깜짝 놀랐다. 사실적이라 어쩌면 솔직하고 뻔뻔한 그의 말을 보며, 그런대로 그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X자식이라는 단어가 어울릴만한 사람이 내게도 있지만, 모두가 듣게 당당하고 거침없이 표현하리란 쉽지 않다. 모두의 개자식이 되기엔 내 머리와 입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한편으로 작가가 대단하게 보이기도.


이 외에도 <로스트 하이웨이> 촬영장을 방문한 뒤 쓴 기사, 소설 서평, 에세이에 대한 생각 등을 자신의 색깔로 녹여낸 그의 글은, 솔직담백한 묘사의 매력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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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휘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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