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 [영화]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주는 메시지
글 입력 2020.05.0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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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일상, 드라마, 스릴러, 공포, 코미디, 액션, 스포츠, 판타지 등등. 영화 타이틀을 검색하면 꼭 붙어 나오는 분류 방식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직관적이지 못하다. 중심 소재나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 밑에 나열된 줄거리까지 읽어야 약간 감이 잡힌다. 때로는 줄거리마저 명확하지 못하다.


물론 영화를 보기 전에 꼭 스토리라인이나 분위기를 알 필요는 없다. 다만 영화의 어떤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만든 카테고리라면 그 몫은 다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장르 구분을 새롭게 하고자, 지난 3월에 '부수는/자립하는/심판하는/갈망하는' 네 가지 장르를 만들었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 <매드맥스>는 사실 네 장르의 종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독재를 부수고 심판하며, 희망을 갈망하고 자립하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줄거리를 조금 더 자세히 보자.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세상, 척박하고 메마른 사막 가운데 그나마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시타델'. 그러나 물과 농작물은 '임모탄'이라고 불리는 독재자의 손아귀에 있다. 임모탄을 끌어내리기 위해 바닥부터 착실히 올라온 사령관 '퓨리오사'는 임모탄이 자신의 계승자를 만들기 위해 묶어 둔 다섯 명의 여성과 떠난다. 생명과 삶이 숨 쉬는 곳, 그린랜드로. 얼마 가지 못해 퓨리오사의 배반이 발각되고, 임모탄과 그를 추종하는 워보이들은 퓨리오사의 전투 트럭을 쫓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맥스, 맹목적으로 임모탄을 추앙하는 한 명의 워보이와 맞닥뜨린다. 그들은 무사히 그린랜드로 갈 수 있을까?

 

 

*

스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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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함'의 재정의


 

매드맥스를 인생 영화 내지는 수작이라고 칭하는 이들이 많다. 아마 퍼석한 사막 위에서 펼쳐지는 격렬한 전투 장면, 말보다는 행동이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인지라 눈빛으로 연기하는 배우들의 디테일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매드맥스>가 주는 메시지에 감명받은 사람들도 많으리라.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이다. 영화의 결론 격인 메시지를 정리하기 위해 우선 캐릭터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가장 충격을 받았던 장면이 있다. 맥스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 퓨리오사와 다섯 여성이 합심하여 그와 싸우던 씬. 여성들은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몸에 둘렀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엉성한 차림새였다. 너무 약해 보였다. 심지어 두 명은 임신 중이었다. 보는 내가 암담했다. 승산 있는 다툼일까? 생각이 무색할 만큼 그들은 영리했다. 자연스럽게 맥스의 주의를 끌어서 퓨리오사가 기습할 틈을 만들었다. 이 말은 곧, 맥스가 자신의 움직임을 상당히 제한하는 족쇄를 풀지 못한 채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힘과 체력을 지닌 맥스를 그나마 저지할 수 있던 셈이다.


싸워본 적도, 싸우는 법도 모르는 여성들은 퓨리오사와 맥스의 몸싸움에 쉬이 끼어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멀찍이 서서 구경하거나 도망칠 궁리를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정신을 차린 워보이 하나가 퓨리오사에게 달려들 때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압한다던가 퓨리오사에게 무기를 던져준다던가. 그들도 퓨리오사만큼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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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강함'을 단순한 하나의 형태로 정의했다고 느꼈다. 레슬링 경기처럼 타인을 짓누르고 완벽한 K.O 패를 받아내야 인정받는 것이 아니었다. 물리적 힘이 절대 강자를 가르는 기준도 아니고, 기술이나 전략을 이용하는 것이 얍삽한 행동인 것도 아니다. 모두 다른 사람인 만큼 다양한 방식과 수단이 존재할 뿐이다.


오히려 힘으로 압도하는 맥스보다 다섯 여성이 더 강인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턱도 없이 약한 자신을 쉽게 죽일 수 있는 존재를 대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사람이 죽음을 무릅쓸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은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때다. 맥스에게는 없고, 퓨리오사를 비롯한 여섯 명의 여성들에겐 있던 것이기도 하다. 바로 희망.


퓨리오사와 한편이 되기 전, 다섯 여성의 처지는 어떠했는가. 물과 음식이 있는 절벽 위에 살았지만, 절벽 아래에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던 사람들만큼 궁핍했다. 그들은 브리더였다. 먹고, 자고,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인간을 만들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그들의 능력으로 보았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거다. 임모탄은 그들을 수단으로 삼았다. 자신을 계승할 사내아이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용도로.


이런 상황을 몇십 년간 겪었을 그들에게 그린랜드는 꿈 같았을 거다. 꼭 이루고 싶은, 살기 위해 이루어야 하는 꿈. 스플렌디드가 다리에 총을 맞고서 그린랜드를 읊조리며 아픔을 달랜 장면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절벽 위에서 고통스러웠을 때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버텨냈는지. 희망은 열망이고, 열망은 순수하다. 순수함의 다른 이름은 '맹목적'이다.


다섯 여성 못지않게 맹목적인 이들이 있다. 임모탄에 대한 믿음으로 목숨도 기꺼이 버리던 워보이들. 그러나 겉으로 특성을 드러낸 그들과 달리 홀로, 아주 깊은 곳에 쌓은 순수함으로 변화의 도화선을 지핀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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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납치되어 시타델에 오게 된 후,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 퓨리오사. 그러나 항상 제자리였다. 도망칠 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맛보았다면, 자신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면, 보통 포기했을 것이다. 어쩌면 워보이처럼 임모탄에게 충성하며 그나마 편한 삶을 영위할지도 모른다. 힘을 기르고 같은 뜻을 이룰 사람들을 포섭하는 길고 힘든 싸움을 택한 이유는 퓨리오사가 순수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파편처럼 남은 자신의 고향, 풍요가 흐르던 땅, 그린랜드에 돌아갈 날만을 꿈꾸며 버텼을 퓨리오사. 순수함에 강인함이 덧씌워지고, 임모탄은 이 교묘함에 완벽히 속아 그에게 사령관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때가 왔다. 꿈을 현실로 만들 최고의 타이밍.


모든 괴로움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그가 희망을 송두리째 잃었을 때, 그 상실감은 얼마나 컸을까. 사막에서 절규하던 그, 그가 깔고 앉은 모래가 아래 방향으로 빠르게 흐르던 모습은 꼭 그의 눈물 같았다. 순수함은 올곧고도 강하다. 퓨리오사는 그린랜드 대신 또 다른 희망을 좇고자 했다. 희망의 허황을 알고서도 앞을 보고 질주하는 방법밖에 모르던 퓨리오사. 그런데 사실, 희망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퓨리오사, 그리고 다섯 여성이 뛰쳐나온 시타델. 그곳이 시작점이자 도착지였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


 

수험생 무렵, 유명한 인터넷 강사분의 강연을 들으러 갔다. 마인드 컨트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공부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하시다가 잠깐 쓴소리를 하겠다며 꺼내신 말이었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 당장 닥친 상황이 힘들어서 회피성으로 다른 길을 모색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의미였다. 회피는 늘 이렇다. 최악을 피한답시고 또 다른 최악일지도 모를 악을 선택하게 한다. 근거나 생각 없이 막연한 긍정이 만든 결과가 성공적이라면 모두가 현실을 벗어나 유토피아에 살고 있지 않을까.


현실이 괴로운 나머지 퓨리오사와 다섯 여성은 이 사실을 잊었다. 시타델을 벗어나려는 애씀도 일종의 회피처럼 작용할 수 있음을. 그들이 가려던 소금 사막은 어땠을까? 말 그대로 소금만 있는 텅 빈 장소였을 것이다. 어쩌면 소금마저 사라진 똑같은 사막일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나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미지의 세계와 목숨을 교환하기엔 지금까지 버텨온 삶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들은 그들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의 삶도 바꿀 힘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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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독재의 상징이었던 리프트에 절벽 아래 사람들이 올라타고, 절벽 위로 향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까? 평화와 안정을 누리는 삶을. 사실 그렇지 않으리라고 본다. 언젠가 탐욕스러운 자가 또 시타델을 흔들고 싸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을 잃고, 자산을 잃고, 평화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이지 않다.


다툼과 싸움은 인간 사회에 필요한 요소이다. 현실에서 모든 사람의 이해를 아우르는 제도를 만들 수 없으므로 소외당하는 무리는 언제나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특정 무리에게 불합리하게 작용한 제도나 사회 관념도 많다. 그 무리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세상에 반향을 가져오고, 혼란을 야기한다. 그들을 일방적으로 억누른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외침을 듣고, 받아들이고, 고쳐나가야 비로소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


충돌은 피곤하다.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아도 피곤한데 반대를 외치며 사는 것은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충분히 피곤하다'는 합리화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이들도 많다. 나와 타인 사이에 선을 그어 나누고, 무시하고, 회피할 때 이 말이 한 번이라도 떠오르기를 바란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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