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퍼포먼스를 눈앞에 두고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거지이자 광대인 이들이 가진 삶의 태도였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는 몽룡은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과거시험에서도 떨어져 ‘암행어사’가 아니라 ‘암행거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몽룡은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른 거지 광대들과 함께 밥 빌어먹으면서 신명 나게 놀아보겠다는 모습이다.
먼 옛날이야기 속 인물이 어딘가 현실적인 문제에 발을 디디고 있는데, 인생을 사는 태도는 탈놀음을 하는 광대의 것이다. 다른 거지 광대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치여 해탈해버린, 밥 한 번 얻어먹자고 소리꾼의 판에까지 난입한 이들은 말 그대로의 ‘거지 광대’로 보이다가도 언뜻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철학자적 면모가 비치기도 하고, 또 다 함께 탈놀음을 즐길 때에는 진정 예인(藝人)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거지 광대들은 지금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존재들이기에, 또 아무것에도 얽매여 있지 않은 사람들이기에 옛이야기에 담긴 관습적 가치들을 무시하고 거부한다. 그렇게 광대들은 소리꾼의 판에 들어와 판소리 다섯 마당의 이야기를 모두 바꾸어놓는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 결말과 교훈을 피해서 이야기가 전혀 다른 맥락으로 접어드는 순간 본격적인 탈놀음이 시작된다.
그들에게 사랑이나 효도, 충성 같은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그럴 여유도 없을뿐더러 이 무대는 애초에 이런 것들을 위해 짜인 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이야기를 깨고 전복시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 역할을 아주 잘, 유쾌하게 수행해낸다.
기존의 이야기들이 뒤집히는 지점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곳곳에 사용된 언어유희와 상황을 비꼬는 말들은 재미를 더한다. 춘향은 수절을 지키는 대신 몽룡과 의절을 하기에 이르고, 자신의 소원을 이뤄주기를 바라는 흥보에게 소원을 이루어주지는 못해도 잘 ‘들어줄’ 수는 있다며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흥보의 바람을 실현하려 한다. 그리고 그 모든 말에는 현시대의 관점이 담겨 있다.
광대들은 각자도생의 대가들이기도 하다. 적벽가에 등장해 조조의 군사가 된 광대들은 곧 있을 전투를 두려워하다가 한 가지 결의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의 목숨은 스스로 지키자는 약속이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의미가 담긴 구호는 우스꽝스러운 그들의 상황을 그리면서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과 겹쳐진다.
판소리 다섯 마당이 모두 다뤄진다는 독특한 구성은 판소리와 탈놀음, 두 전통 연희의 만남으로 무리없이 전달되었다. 판소리가 가진 유연성은 모든 이야기가 연달아 벌어지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만들었고, 광대들이 벌이는 탈놀음은 이야기 전환의 한 가지 장치가 되어주었다. 또 중간중간 들려왔던 각 지방의 사투리는 소리꾼의 판이 전혀 다른 시공간을 소환해내고 있음을 알려준다.
무대의 왼편에는 커다란 달이, 오른편에는 거꾸로 심어진 나무가 매달려 있다. 판소리 다섯 마당이 이어지는 동안 달은 그 자리에 계속 떠 있다. 어두컴컴한 무대에 달이 뜬 모습은 한밤중의 무대 공간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시점이 낮인지 밤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낮과 밤의 구분이 없고, 소리꾼의 판과 탈놀음의 판이 한데 뒤섞인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거지 광대들은 오히려 더 거침없이 현실의 문제들을 꼬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