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 쓴다는 것,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집 "끝과 시작" [도서]

글 입력 2019.10.26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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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것은 대상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시는 시대나 국경을 초월하고 어떤 질문과 성찰, 공감을 준다. 우리의 시선과 감정은 같을 수도 있다. 시인은 보편적이고 개인적인 것들에 대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한다. 대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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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바와 쉼보르스카는 대상을 증오하는 듯 사랑한다. 1923년 폴란드 중서부의 작은 마을 쿠르니크에서 태어난 시인은 1945년 『폴란드일보』에 시 「단어를 찾아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으며, 노벨 문학상을 비롯한 굵직한 문학상을 수상했다.

 

쉼보르스카는 역사와 예술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찰부터 현대 문명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 그리고 인간의 본질과 숙명을 집요하게 탐구해 폭넓은 시 세계를 펼쳐 보였다.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표현, 적절한 우화와 패러독스 등을 동원한 완성도 높은 시로 '시단의 모차르트'라 불리며 전 세계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끝과 시작』은 1945년 등단작부터 2005년까지 60여 년에 걸친 시인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시선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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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꿈이 사라지듯

느닷없이 푸드덕 날아가버리지는 않는다.

술렁대는 바람의 기운도, 초인종 소리도

감히 흩어지게 할 수 없고,

날카로운 비명 소리도, 요란한 경적도

감히 멈출 순 없다.


꿈속에 나타난 영상은

아련하고 모호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현실이란 말 그대로 현실일 뿐,

풀기 힘든 난해한 수수꼐끼이다.


꿈에는 열쇠가 있지만

현실은 스스로 문을 열고는

도무지 잠글 줄 모른다.

그 안에서 학교에서 받은 성적표와 상장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나비 떼와 오래된 다리미들,

윗부분이 닳아 없어진 모자들과

구름의 파편들.

그것들이 모두 어우러져 절대로 풀 수 없는

정교한 퍼즐을 만들어낸다.


인간이 없으면 꿈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무엇이 없으면 현실이 존재할 수 없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만성적인 불면증이 만들어낸 산물은

잠에서 깨어나는 모두에게 유용하게 배분된다.


꿈은 미치지 않았다.

미친 것은 현실이다.

비록 사건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완강히 저항하고는 있지만.


꿈속에서는 얼마 전에 죽은 우리의 친지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건강한 모습으로, 아니 더 나아가

청춘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되찾은 채로.


현실은 우리의 눈앞에

죽은 이의 시체를 내려놓는다.

현실은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다.


꿈이란 덧없는 연기 같아서,

기억은 그 꿈을 손쉽게 털어버린다.

현실은 망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현실이란 만만치 않은 상대다.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우리의 심장을 무겁게 만들고,

때로는 우리의 발아래서 산산이 부서지기도 한다.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매 순간 가는 곳마다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기에.

끊임없이 도망치는 우리의 피난길에서

현실은 매 정거장마다 먼저 와서 우리를 맞이한다.


-현실, pp.334-336

 


한 편의 시를 쓰기도 어려운데, 시작과 끝을 가진 한 권의 시집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고뇌를 수반할까. 「현실」 이라는 시가 있다. ‘현실은 우리의 눈앞에 죽은 이의 시체를 내려놓는다’, ‘현실은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다’라는 구절에서는 우리가 직시하고 있는 것과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제목 그대로 ‘현실’에 대한 진실만을 직관적으로 표출한다. 아름답게 꾸며낸 것이 아닌 잔혹하고 슬픈 현실의 얼굴을 말이다.


네루다의 시가 한 구절 한 구절에 질문을 던지게 한다면 쉼보르스카의 시는 한 구절 한 구절에 깊은 성찰을 하게 한다. 문장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매끄러운 문장 자체의 결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 문장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또 다른 시 「하늘」에서는 ‘가장 높다란 산봉우리라고 해서 가장 깊숙한 골짜기 보다 하늘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하다고 ~한 것은 아니다’와 같은 구조를 떠오르게 한다. 번역자의 역량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부분에서 더욱 시가 매끄럽게 느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시에서 문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 하늘, 여기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창턱도, 창틀도, 유리도 없는 드넓은 창.

오로지 구멍 외엔 아무것도 없는,

그러나 광범위하게 활짝 열린 하늘.


하늘을 쳐다보기 위해

일부러 목을 길게 빼거나

화창한 밤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나는 등 뒤에, 손안에, 눈꺼풀 위에 하늘을 가지고 있다.

하늘은 나를 단단히 감아서

아래로부터 번쩍 들어올린다.


가장 높다란 산봉우리라고 해서

가장 깊숙한 골짜기보다

하늘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니다.

그 어떤 곳에 있어도 다른 곳보다

하늘을 더 많이 가지진 못한다.

떠도는 구름은 하늘에 의해 무참히 짓이겨져

공동묘지의 무덤들처럼 공평하게 조각나고,

두더지는 날개를 퍼덕이는 부엉이처럼

가장 높은 천상에서 부지런히 굴을 파고 있다.

심연으로 떨어지는 모든 것들은

결국 하늘에서 하늘로 떨어지는 것.


부서지기 쉽고, 유동적이며, 바위처럼 단단한,

휘발성으로 변했다가, 또 가볍게 날아오르기도 하는

하늘의 조각들, 하늘의 얼룩들,

하늘의 파편과 그 부스러기들.

하늘은 어디에나 현존한다.

심지어 어둠의 살갗 아래도.


나는 하늘을 먹고, 한르을 배출한다.

덫에 갇힌 함정이다.

인질을 가둔 포로다.

포획 당한 포옹이다.

질문에 관한 대답 속에 존재하는 질문이다.


하늘과 땅을 분명하게 구분 짓는 건

이 완전무결한 통일체를 인식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누군가 나를 찾고자 할 떄

좀더 빨리 발견할 수 있도록

편의상 보다 확실한 주소지를

허락했을 따름이다.

내가 가진 특이한 인적 사항,

그것은 다름 아닌 감탄과 절망이다.

 

-「하늘, pp.317-319

 


단순히 ‘~은 ~이다’라고 쓰기 이전에 문장이 주는 느낌을 고려해야겠다. ‘하늘을 쳐다보기 위해 일부러 목을 길게 빼거나 화창한 밤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나는 등 뒤에, 손안에, 눈꺼풀 위에 하늘을 가지고 있다’는 구절은 이 시「하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하늘은 멀리 찾으러 가지 않아도 우리에게 있다. 가장 가까워 보이는 곳보다 오히려 가장 멀리 있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더욱더 가까울 수도 있는 것이다. 멀리에서 위대한 것을 찾으려 하지 말고 내가 가진 것에서 먼저 발견해보자는 의미로 느껴진다. ‘내가 가진 특이한 인적 사항 그것은 다름 아닌 감탄과 절망이다’라는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나 자신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먼저 해보는 것이 시 쓰기의 첫걸음일 것이다.


시집을 읽다 보면, 결국 시의 모든 것은 우리 자신에게 귀결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늘’은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에게 있으며 ‘제목이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다. 또한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특별한 사람인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도 그렇다.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도 결국 의미 있는 것은 나 자신이고, 인간 그 자체다.


감정의 과잉은 자칫하면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상으로 빠져버리거나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쉼보르스카는 이를 배제하고 어떤 대상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시를 써내려갔다. 따라서 시를 읽으면서 누군가의 철학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도 받기도 했다. 사실 시라는 것은 개인이 철학이 담긴 것이다. 쉼보르스카는 진정한 시인이 되려면 ‘나는 모르겠어’를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그에 대한 답을 작품으로써 찾아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 오만하지 않는 것, 감정 과잉에 빠지지 않는 것, 모든 것은 사색할 만한 대상이라는 것, 그것이 아마 시 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대상이다.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갖는 시어(詩語)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습니다’라고 쉼보르스카는 이야기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많은 시와 시인들의 지침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쉼보르스카는 ‘이것이야 말로 시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할 일이 많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는지요’라는 말을 통해 시인이야 말로 얼마나 위대하며 의미있는 일인지를 되새기게 한다. 시집을 덮고 나니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라는 생경한 이름까지도 시적으로 느껴졌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이 시집은 시인의 철학처럼 느껴졌다. 시를 읽을 때마다 인생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나의 인생, 친구의 인생,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 인류의 인생이 이 한 권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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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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