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사는 사람들] 샐러리맨 부부의 작은 아파트 속 비밀

#11 허버트와 도로시 보겔 부부
글 입력 2019.09.2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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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아닌 사람도 미술품을 컬렉팅할 수 있을까?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아시아프(ASYAAF)’와 같이 저렴한 가격에 미술품을 구입할 수 있는 페어나 <샐러리맨 아트컬렉터>(김정환 저, 2018) 등의 책이 인기를 끌면서 예술품을 사는 것에 대한 마음의 장벽이 많이 누그러진 것 같지만, 예술품을 사모으는 것은 ‘매우 삶에 여유가 많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것처럼 느끼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세상에 미술품보다도 비싼 수집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꼭 부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모으는 신발이나 피규어 등은 왠만한 미술 작품의 가격을 뛰어넘는 것들도 많다. 일본어 ‘오타쿠’에서 파생된 ‘덕후’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지고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0년도 더 된 일인데, 유독 미술품에 대해서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억울하다.

 

그렇다면 으리으리한 저택에 사는 부자가 아니라도, 미술품을 다시 되팔아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도 없이 그저 미술품 자체가 좋아 그것을 수집한 ‘미술 덕후’가 과연 실제로 있을까? 그렇다. 뉴욕 미술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방 한 칸짜리 임대 아파트에 미술품을 무려 4천점이나 소장하고 있었던 허버트와 도로시 보겔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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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사진, 다큐멘터리 "Herb & Dorothy" 스틸 이미지. (from herbanddorothy.com/press)

 



평범하지만 비범했던 부부의 시작


 

두 부부는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평범했다. 허버트 보겔(Herbert Vogel, 1922-2012)은 평생을 뉴욕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분리하는 일을 하였고, 도로시 보겔(Dorothy Vogel, 1935-)은 브루클린 도서관 사서였다. 둘 다 예술에 어느 정도 관심은 있었지만, 신혼여행을 국립미술관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떠났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결혼의 시작이었다. 도로시보다 조금 더 미술에 조예가 있었던 허버트가 그 미술관에서 도로시에게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도로시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자신이 평생에 걸쳐 허버트에게 받은 미술교육의 시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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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월 14일 도로시와 허버트 보겔 부부의 결혼식.

Photograph by Milton Hitter (from vogel5050.org)



아무튼 미술에 대한 부부의 관심은 처음에는 그림 그리기에서 시작해 점차 컬렉팅으로 옮겨갔는데, 결혼 후 처음으로 구매한 작품은 바로 미국 조각가 존 체임벌린의 작은 작품 <무제>(Untitled, 1962)였다. 이 미미한 시작이 후에 어마어마한 컬렉션으로 이어질 거라곤 아마 본인들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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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체임벌린, 무제, 1962. Photograph by Lee Ewing.

© 2008 Board of Trustees,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from vogel5050.org)



보겔 부부는 평생 월급으로 생활했으며 뉴욕의 방 한 칸짜리 임대 주택에서 자녀 없이 금붕어, 고양이, 그리고 거북이들과 함께 살았다. 그들의 열정은 한 군데로만 모여서 부부는 남는 시간이면 뉴욕 곳곳의 전시를 보러 다니고 예술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들은 마음에 드는 예술가가 생기면 그의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했다. 그의 지난 작품과 그가 전시를 계속하면서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말이다. 부부는 하도 여기저기 전시를 보러 다녀서 자연스럽게 예술계에서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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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사진, 다큐멘터리 "Herb & Dorothy" 스틸 이미지. (from herbanddorothy.com/press)



그들이 미술품을 구입할 때는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첫째, 월급 내에서 살 수 있어야 할 것. 둘째, 그들이 사는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할 것. 그리고 지하철이나 택시를 타고 작품을 옮길 수 있어야 할 것. 그러나 특정 스타일이나 화가에 대한 제약은 없었고 그저 작품이 마음에 들고 위의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구입했다고 한다.

 


 

개념미술가들과의 인연, 귀중한 컬렉션이 되다


 

여유로운 주머니 사정으로 컬렉팅을 했던 다른 거물급 컬렉터들에 비해 보겔 부부에게는 이와 같은 매우 현실적인 컬렉팅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 부부의 컬렉션이 특별해질 수 있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보겔 부부의 개념미술 컬렉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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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아트에서 개념미술까지: 보겔 부부 컬렉션" 전시 오프닝에서의 보겔 부부. 1994년 5월 25일.

Photograph by John Tsantes ©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Gallery Archives

(from vogel5050.org)

 


1960년대는 현대미술사의 주요한 두 갈래가 뻗어 나오기 시작한 시기이다. 앤디 워홀 등을 선두로 한 팝아트가 대중과 점점 멀어지고 있던 예술을 다시 대중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이들과 다른 방식으로 예술을 탈예술화, 탈범주화, 일상화시키는 ‘개념미술’이라는 것이 태동하고 있었다.

 

개념미술은 예술이 물질적인 매체를 거의 완전히 벗어나 오직 예술가의 ‘개념’으로 표현되는 양식이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개념미술가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의 <벽면 드로잉> 작업 시리즈는 그가 만든 드로잉 설계도에 따라 누구나 따라 그릴 수 있고, 그것이 작품으로 인정된다. 즉 예술가는 직접 그림을 그린 결과물이 아닌 제시한 아이디어만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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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르윗, 벽면 드로잉, 2006. 설치 전경. ⓒLisson Gallery

 


팝아트 작품은 당시에 이미 너무나 큰 유명세를 얻어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보겔 부부는 자연스레 개념미술, 미니멀리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작가들을 직접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던 그들의 컬렉팅 방식과도 잘 맞아떨어진 면도 있다. 그 당시에는 그런 미술을 위한 제대로 된 시장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젊고 무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사려면 그들을 직접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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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르윗, 열린 기하학 구조물 3, 1990 ⓒLisson Gallery



보겔 부부는 1965년에 솔 르윗의 <Floor Structure Black>(1965) 작품을 구입했다. 몇 달 전 그의 전시를 보고 작품 구매를 결심했는데, 그의 작품을 다루던 갤러리가 망해버려 솔 르윗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 구입하게 된 것이다. 그 작품은 솔 르윗의 첫 판매 작품이 되었다. 자신의 작품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에, 누군가가 월급을 쪼개 건넨 작품 구입비는 솔 르윗에게 얼마나 귀중한 돈이었을까!

 

그래서인지 그 이후로도 솔 르윗과 보겔 부부는 계속해서 친분을 유지하여,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전화로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유명한 ‘월 드로잉’도 보겔 부부의 아파트 화장실 벽에 설치해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보겔 부부가 무명의 작가들에게 힘을 실어준 만큼, 작가들도 부부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의 사정을 고려해 작품을 저렴하게 판매하거나 선물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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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코수스, 로버트 맨골드, 요셉 보이스, 비토 아콘치 등의 작품이 있는 보겔 부부의 침실.

c. 1975. Photographer unknown. (from vogel5050.org)



그렇게 모인 보겔 부부의 컬렉션은 구입할 당시에는 보겔 부부의 월급을 넘어서지 않는 가격이었지만, 지금의 가치는 물론 그의 몇 백배, 몇 천배 이상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그 이후의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술가들의 작업 중에서, 매우 신중하게 선택되었으면서도 굉장히 많은 양의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컬렉션은 지금은 돈으로 환원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바로 보겔 부부의 50x50 프로젝트 때문이다.

 

 


50x50 프로젝트, 열정의 씨앗을 미국 전역에 퍼뜨리다


 

보겔 컬렉션이 유명해지면서 많은 이들이 그들 컬렉션의 가치를 환산하고 그들에게 판매를 권유했지만, 부부의 결정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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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사진, 다큐멘터리 "Herb & Dorothy" 스틸 이미지. (from herbanddorothy.com/press)

 


그들이 한 점, 두 점 모은 미술품들은 세월이 흐르며 최소한의 통로만을 남겨둔 채 그 조그마한 아파트를 가득 채웠다. 벽은 물론이고 침대 밑까지 작품을 놓을 곳이 없을 정도였다. 평범한 부부였던 이들은 1976년에 자신들의 컬렉션으로 전시까지 열게 되었다. 그들의 컬렉션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러나 보겔 부부는 작품을 되팔지는 않았다. 작품을 되파는 것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되팔 목적으로 작품을 샀다기보다 오직 그것을 ‘좋아해서’ 구입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1992년에 그들의 아파트에는 작품이 무려 4,782점이나 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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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보겔 부부의 컬렉션으로 가득 찼던 벽면, 다큐멘터리 "Herb & Dorothy" 스틸 이미지.

(from herbanddorothy.com/press)

 


그들은 그렇게 모은 작품들을 부부의 신혼 여행지였던 워싱턴의 국립미술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총 2400점을 기증했는데, 그 당시 부부는 마치 ‘아이들을 대학에 떠나보낸 것처럼’ 큰 허전함을 느끼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컬렉션을 기증한 데에 대한 답례로 미술관 측에서는 그들 부부에게 연금을 지급했는데, 이 연금과 은퇴 보조금을 가지고 이들 부부는 멈추지 않고 작품을 사모아 또 2500점에 달하는 작품을 기증하려 했다. 그러나 한 미술관에서 이렇게나 많은 작품을 보관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미술관은 ‘50x50’이라는 프로젝트를 생각해냈는데, 바로 2500점의 작품을 각각 50점씩 미국 전역의 50개 미술관에 나누어 기증하는 것이었다. 보겔 부부는 이에 동의했고, 그렇게 그들은 또 한 번의 대단한 신화를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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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사진, 다큐멘터리 "Herb & Dorothy" 스틸 이미지. (from herbanddorothy.com/press)



컬렉팅을 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심지어 한 사람 내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 것인데, 보겔 부부의 컬렉팅은 마치 순도 100% 열정 그 자체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 같이 느껴져 보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 삶이 여유로운 자들의 유희도 아닌, 그렇다고 미술품으로써 어떤 이득을 보려는 것 또한 아닌 그들 컬렉팅의 이유는, “컬렉팅으로서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부부의 답변으로 게임 끝, 일축된다.

 


“컬렉팅을 통해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순수한 열정은 사람을 매혹시킨다. ‘누구나 할 수 있었지만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해낸 보겔 부부의 컬렉션이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다.

 

 

참고자료

다큐멘터리 Herb & Dorothy (2008) directed by Megumi Sasaki

더네이버(The Neighbor) - The Vogel Collection, Herbert & Dorothy 2015.04.15

경향신문 - [진중권의 현대미술 이야기](6) 개념미술 201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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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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