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스러져가는 것들의 아름다움 -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책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리뷰
글 입력 2019.08.27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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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나이를 넘기면 우리는 모두 각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사람들은 많은 일을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말하고, '이 또한 지나간다'라는 말은 틀린 적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꼭 시간이 문제를 원상복귀시켜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안다. 시간은 구덩이에 빠진 우리를 꺼내주는 해결사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며 우리가 구덩이에 익숙해지는 것일 뿐이다. 살면서 우리는 넘어지고 상처입고 누군가를 잃는다. 놀랍게도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삶은 대부분 계속된다. 죽지 않는 한 어떻게든 살아진다.

딸이 세상에 태어나던 날 아내를 잃어야 했던 사제 시미언 피즈 체니도 그러했을 것이다. 아내를 향한 그의 사랑은 한없이 컸지만, 아내의 수명은 그 커다란 사랑을 받아내기에 너무 짧았다. 아내가 죽은 후에도 사그라들지 못한 시미언의 사랑은 아내가 사랑하던 정원으로 옮겨간다. 그때부터 시미언만의 '견디는 삶'이 시작된다.


그녀의 정원에서 내가 정말로 행복해지는 
이유는 심지어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아내가 사랑했던 정원에 있으면 나 자신이
그녀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살아 있는
그녀의 내면에 
살아 있는 나.

- 30쪽


아내가 남긴 커다란 구멍을 메꾸는 것은 딸도, 다른 사랑도 아니다. 시미언은 구멍을 안은 채 그저 조용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떤 꼼수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길 택한다. 시간이 갈수록 정원에 탐닉하는 그는 정원을 비롯해 자신의 주변에서 나는 모든 소리를 악보에 기록하기에 이른다. 새소리,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물론이고 문이 삐그덕거리는 소리 같이 소음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까지.


얘야, 내 생에서 영영 너는 완전히 태어난
존재가 아닐 듯싶다. 네 말이 맞을 거야.
사실 나를 깊은 혐오와 긴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린 것은 이런 것들이었단다.
친족의 불쾌하기 짝이 없는 동정, 친구들의
우정 과시, 교구 신도들의 호의, 여신도들의
성가신 도움이며 만사에 관여하려는 태도, 주교의 축복, 이 모든 걸 내가 너무 피하기만 했는지 몰라.
난 한 걸음 뒤로 물러났어.
하느님을 소홀히 했고, 정원으로 숨어들었지.
온통 경이로운 자연이 가득한 정원으로 말이야.
지금은 소리로 가득한 정원이 되었지.
이 책에 대해 말하는 거다. 비록 아무도 원치 않고, 모두가 퇴짜 놓는 이상한 악보 말이다.

- 147-148쪽


구멍을 안고 살아가는 건 시미언 뿐만이 아니다. 시미언의 딸인 로즈먼드는 자신이 태어나는 날 어머니가 죽었다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태어나지 못한 존재'로 취급받는다. 네가 탄생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너를 깊이 사랑하지 못했노라고, 지나치게 솔직한 아버지의 고백을 들어야 하는 딸의 심정은 어떠할까. 딸은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집을 떠나 보기도 하지만 결국 원인을 알 수 없는 청각 장애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피아노를 가르치던 사람이 피아노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된 것은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딸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함께 살며 아버지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모아 악보로 만든 원고를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애쓴다.


우산들, 양복 재킷들, 외투들,
봄철용 연한색의 개버딘 레인코트들,
담비 털이나 검은담비 털 칼라가 달린
큼직한 겨울 외투들,
여우 털 칼라가 달린 케이프들,
중절모자들, 챙 달린 모피 모자들,
가죽 장갑들,
끈기 있게 뜨개질한 널찍한 숄들,
그것들 모두가 제각기 나름의 노래를
지니고 있답니다.

- 22쪽


침묵 속에 이어지는 삶에서 목소리를 제외한 소리들은 더욱 뚜렷하게 들린다. 아버지는 세상 모든 것을 음악으로 만들었고, 딸은 아버지가 만든 것을 세상에 소개했다. 시미언에게 아내의 부재는 끝내 메꿔지지 않는 결핍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그 결핍은 시미언이 세상을 살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아내를 잃은 그를 노인이 될 때까지 살게 한 것은 정원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로즈먼드에게는 아버지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으나 얻을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아버지의 삶의 기록과도 같은 악보를 출판하려 남은 생을 다 바친다. 이렇듯 침묵은 음악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고, 삶에 난 커다란 구멍은 오히려 우리를 삶의 한가운데로 끌고 간다.

*

이 책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평을 읽어 보았다. 많은 사람의 평에서 공통적으로 '아름답다'는 말이 나왔다. 시미언과 로즈먼드의 삶은 말 그대로 구멍을 끌어안고 한걸음씩 나아가는 '견디는 삶'에 더 가까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름답다는 말이 무언가 기묘했다. 하지만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어디선가 아름다움을 느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름다움은 상당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물론 미학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아름다움에 이름을 붙이고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 가능하겠지만 미학을 공부한 적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아름다움은 그냥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묘한 것은 스러져가거나 썩어가는 것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이다. 다 지는 꽃을 바라볼 때나 물들어 떨어지는 낙엽을 볼 때 다가오는 아름다움처럼.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는 시미언과 로즈먼드의 삶 역시 그런 모습이었고, 그들의 삶 구석구석에 자리했던 음악을 작가는 포착해냈다. 스러져가는 게 아름답다는 얘기는 어쩌면 침묵에서 진정한 음악이 시작된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이 이야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이야기의 독특한 형식에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희곡도, 소설도, 시도 아니다. 세 가지 장르의 중간 쯤에 위치한 이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느 정원의 풍경이 아닌 무대 공간을 상상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시미언과 로즈먼드의 아주 극적인 단면을 독자 앞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정통 소설이었다면 좀 거북했을지도 모른다. 30여년 전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딸을 사랑하지 못한 채 늙어가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 시들어가는 딸이라니. 그러나 절제된 형태로 충분한 여백을 두고 이야기가 이어졌기에 우리는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이 부녀의 독특한 삶을 지켜볼 수 있다.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특권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우리는 실제 시미언을 모른다. 물론 그는 실존 인물로, 아내와 일찍 사별했고, 자연의 소리를 악보에 음악으로 기록하며 그 결과물을 출판하기 위해 애썼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딸이 아닌 아들이 있었고, 실제로 그를 인터뷰하거나 자세히 기록한 바는 없기에 정원에서 그의 삶이 어떠했을지 알 길은 없다. 그는 과연 자신의 삶을 아름답다고 말할 것인가. 모를 일이다.

어쨌든 100여년 전 프랑스의 알지도 못했을 어느 사제의 조용한 삶이 이제 70살이 된 작가에게 울림을 줬고, 그렇게 탄생한 시도, 소설도, 희곡도 아닌 이야기가 2019년의 나에게 왔다. 시미언의 실제 삶이 어땠는가를 말하기 이전에 이 이야기가 나에게 온 것만으로 나는 감히 이 이야기를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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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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