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진득하게 파고들기. '제임스 진: 끝없는여정'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8.1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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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는 아니지만, 절에 가는 걸 좋아한다. 향의 내음, 희미하게 들리는 반야심경이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모래 밟는 소리가 무거워질 즈음 고개를 들면 고즈넉하게 서 있는 절이 보인다. 고요할 것만 같은 절에도 강렬한 요소가 있다. 탱화다. 9살 때 탱화를 처음 봤는데, 인물의 표정이나 입고 있던 옷의 표현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비 오는 날 무서운 이야기를 찾아보는 마음처럼, 절에 가면 탱화를 찾아본다.

 

지난 6월 제임스 진의 전시회를 보러 갔다. 제임스 진은 대만계 미국인으로 DC 코믹스의 커버 아티스트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프라다, 필립 림, 그리고 ESPN과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아티스트로서 입지를 넓혔다. 그의 작품을 접한 적이 없어 궁금했다. 오리엔탈 풍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까? DC 코믹스에서 일했으면 선이 굵을 것 같은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전시장에 들어갔다.

 

그의 작품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선이 고왔고, 파스텔 톤의 색채를 주로 사용했다. 물 빠진 색감인데도 강렬함이 느껴졌다. 오묘하고 신비한 그림의 분위기에 압도됐다. 대만계 미국인으로 대만이나 미국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는데. 제임스 진에게 그림은 자신의 뿌리를 찾는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시 중 기억에 남은 작품은 Tiger-White Metal, Descendents-Blue Wood, 그리고 Passage-Blue Wood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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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age-Blue Wood


제임스 진의 그림은 등장인물마다 서사가 있다. 부분만 보면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하나의 서사를 담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시선은 서양 고전 회화처럼 제각기다. 있는 힘을 다해 노 젓는 사람,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사람. 눈길을 끈 것은 기도하고 있는 소녀다. 운명을 알고 있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방법으로 맞서는 것처럼 보인다.


제임스 진은 동양의 감성에 팝적인 색채를 더해 작품을 만든다. 각각의 색은 조화를 이루며 작품의 비극적 정서를 강화한다. 사진으로 보면 캔버스의 크기가 작을 것 같은데, 실제로 보면 굉장히 길다. 관람객은 앞으로 갔다 뒤로 가기를 반복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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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ger-White Metal


수묵화 같다. 호랑이가 밟고 있는 세계는 분열되어 보인다. 어미 호랑이의 몸도 면으로 해체되면서 꽃과 풀 사이로 퍼진다. 그림의 왼쪽 아래 화분을 보면 마치 중력이 사라져 모든 것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기 호랑이의 몸은 그대로다. 어미 호랑이가 해체되어가면서도 아기 호랑이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한다.

 

해야 하는 일과 의무 속에서 자아는 헤지고 분절된다. 예민한 성정은 미덕이 될 수 없기에, 모난 부분을 구부러트린다. 조금씩 둔감해진다. 딜레마에 빠진다. 예민하면 안 되지만, 날 선 감각은 갖고 있어야 한다. 마치 19년 동안 학원-집을 오가던 학생에게 이제 넌 20살이 되었으니 네 맘대로 해라! 창의적으로 생각해봐! 라고 말하는 꼴이다. 예민하기 때문에 세상을 본다. 줄 서 있는데 뒤에 여유 공간 없이 딱 붙은 사람이 있을 때, 동물을 한데 모아놓고 그곳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인간에게 살갑게 굴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면 왜 그럴까 생각하게 된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시각은 깊어진다. 제임스 진의 ‘Tiger’는 사회적 자아는 외부의 의견에 맞춰 해체되지만(어미 호랑이), 마음속으로는 본질(아기 호랑이)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림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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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endent-Blue Wood


Descendent는 하강, 후손을 뜻한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은 대게 실패나 지금 상태보다 안 좋은 상태가 됨을 뜻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디센던트(후손)들이 떨어진 곳은 땅이 아니라 구름이나 꽃 위다. 떨어지는데 상승하는 느낌이 났다. 나중에 찾아보니 작가가 롯데타워가 이 작품의 시작점이라고 한 인터뷰를 봤다. 세계에서 5번째로 높은 건물을 보고 <잭과 콩나물>을 떠올렸다고.

 

디센던트의 주변에는 붉은 실이 있다. 중국의 월하노인 이야기나 우리나라의 청실홍실 설화가 떠오른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유일무이한 존재로 세상에 나와 사람, 그리고 직업과 관계를 맺는다. 영원할 것 같은 관계는 한순간 끊어진다. 추락하는 기분이 든다.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Why do we fall. Bruce? So we can learn to pick ourselves up.(우리는 왜 추락할까. 덕분에 일어서는 법을 배울 수 있거든.)” 끊어졌다고 끝난 게 아니다. 더 좋은 관계를 맺을 기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제임스 진의 개인 작품 외에도 그가 컬래버레이션한 작품들, 그가 그렸던 만화 표지도 전시회에서 볼 수 있다. 제임스 진의 개인 작품을 보며 탱화가 계속 떠올랐다. 탱화는 거칠고 강렬하다. 색도 굉장히 뚜렷하다. 몇 세기가 지났는데도 인물들의 기백이 살아있다. 교회의 스테인드글래스는 곱다. 빛을 투과해 성스러움을 자아낸다. 인물의 선은 고우며 불결한 마음은 범접할 수 없는, 정제되고 정화된 느낌이다. 탱화와 스테인드글라스는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작품을 만들어가면서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파고든다. 그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내면으로 자아에 깊이 파고들어 가는 행위다. 그는 자신을 관찰함으로써 열반에 도달할 것이다.

 

전시장에 가거나, 영화제 수상작을 보러 가거나, 책을 읽는 건 어떤 걸 얻기 위함이다. 영감일 수도, 깨달음일 수도 있다. 해석 콘텐츠가 인기 있는 요즘, 혼자 생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떠먹여주는 콘텐츠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가 있어야 서로의 가치를 알게 된다. 직접 깨닫는 경험도 해야 한다. 생각을 숙성하는 과정은 어렵다. 카피라이터로 일할 땐 ‘끌을 판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하나의 아이디어를 붙잡고 끝까지 가보는 거다. 어렵다. 포기하고 싶고, 이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다.

 

한 분야에 깊이 있게 들어가는 건 어렵다. 멀티태스킹이 축복받는 지금은 더욱. 끊임없이 메일을 보내고, 카톡 답장을 하고 검색하는 시대. 한자리에서 진득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림을 자세히 보기도, 멀리서 보기도 하면서 생각하는 거다. 내 생각이 나의 온전한 생각인지 의심될 때. <제임스 진: 끝없는 여정>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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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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