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다섯 가지의 뜨거운 수수께끼 - 수수께끼 변주곡 [도서]

봄날의 열병 그리고 자기합리화
글 입력 2019.08.09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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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가족과 함께 남부 이탈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열두 살 소년 폴. 어느 날 별장을 찾아온 목공 조반니(난니)를 만난다. 어머니가 앤티크 책상과 액자 두 개를 복원하기 위해 부른 터였다. 그 후 가족의 눈을 피해 그의 작업식을 드나들며 동경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수수께끼 변주곡>은 <그해, 여름 손님(Call me by your name)>으로 국내 독자에게 이름을 알린 안드레 애치먼이 201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수수께끼 같은 사랑 이야기 다섯 편으로 구성했는데, 각 장마다 독특한 언어를 구사해 감각적이고 진솔한 목소리로 독자의 마음을 흔든다.


우선 첫 번째 이야기 <첫사랑>의 폴(파올로)은 <그해, 여름 손님>의 엘리오와 닮았다. 작가가 가장 자신있는 소재로 소설을 시작한 셈이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짝사랑을 향한 소년의 목소리는, 특히 가슴속에 품은 솔직한 성적 욕망이 화자와 독자를 순식간에 하나로 만든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제목은 <수수께끼 변주곡>일까? 변주곡이란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선율, 리듬, 화성 따위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연주하는 곡을 뜻한다. 이 책은 다섯 가지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독립된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화자로 연결된다. 즉 수수께끼 같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각도, 분위기, 문체 등을 변형하여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이한 제목이지만 이 책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첫사랑>으로 시작해 <애빙던 광장>에서 끝이 난다. 풋풋한 사춘기 시절, 첫사랑의 불안정함을 투명하게 보여주던 폴은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아주 담담해진다. 까슬까슬한 민낯을 다 내비칠 수 있을 만큼 솔직했던 폴은, 네 장에 걸쳐 거센 파도와 여러 번 마주하면서 담담해진다. 뾰족했던 네모가 닳아져 원이 되는 것처럼, 둥글둥글한 자갈이 된다.


어린 시절 솔직한 첫사랑을 담은 <첫사랑>, 조금은 비겁한 이별을 담은 <봄날의 열병>, 본능적이고 뜨거운 사랑 이야기 <만프레드>, <별의 사랑>, 그리고 어둡고 무심해진 사랑 <애빙던광장>. 이 모든 이야기는 각각 독립된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관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났다.


사랑이라는 큰 틀은 같지만 각각 다른 주제를 담은 만큼 한순간에 책 속의 분위기를 바꾸어 버리는 필력 또한 놀라웠다. 오늘은 이 매력적인 이야기들 가운데 나를 가장 오랜 시간 생각에 잠기게 했던 <봄날의 열병>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별 후 찾아올 봄날의 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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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열병>의 줄거리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폴은 모드를 사랑하고 있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모드가 다른 남자와 있는 장면을 목격한 후 이 관계를 잃을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사실 폴은 모드가 아니라 만프레드를 사랑하고 있었고, 모드와 폴 모두 이 사실을 깨달으며 이 장은 끝이 난다.


사람은 항상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을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속이고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회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어쩔 수 없이 담배를 필 수밖에 없겠네, 밖에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집중이 잘 안 되네 하는 것들. 자기합리화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아주 교활한 수단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이 장치를 너무나 교활하게 설정해 놓아서 폴 스스로뿐만이 아니라 독자까지도 여기에 넘어가 버린다.


폴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책을 읽으면서, 그의 자기합리화에 깜빡 속은 나는 모드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읽을수록 물음표가 생겼다. 이 장면은 사실 모두 폴의 상상 아닌가? 사실 폴이 본 것은 아주 단편적인 장면일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거지? 바람, 불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폴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폴은 모드와 사귀는 중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고 모드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는 폴에게 도덕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폴은 자꾸만 그녀의 바람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녀가 바람을 피우면 죄책감 없이 관계를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자신의 잘못을 숨기고 죄책감을 덜기 위한 자기합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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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정교하게 설정된 타인의 자기합리화에 넘어갔다 돌아온 후, 책의 내용이 머릿속을 쉽게 떠나지 않았다. 이 책은 물론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장에서만큼은 사랑보다 자기합리화가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인조차 속을 정도로 교활한데, 어쩌면 나도 눈치 채지 못한 나의 자기합리화 또한 셀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서 폴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불쌍했다. 자의식은 강하지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나는 어떠한 사람일까, 나는 지금 무엇에 또 속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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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변주곡
- Enigma Variations -


지은이
안드레 애치먼(André Aciman)

옮긴이
정지현

출판사
도서출판 잔

분야
소설 / 외국소설 / 영미소설

규격
130×195(mm) / 페이퍼백

쪽 수
336쪽

발행일
2019년 07월 17일

정가
13,800원

ISBN
979-11-965176-9-4 (03840)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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