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혐오스러운 시간 여행자의 일생 [영화]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
글 입력 2019.07.2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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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 패러독스(원제: Predestination)>의 스포일러는 치명적이며, 이 리뷰는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관람하신 후 리뷰를 읽길 권합니다.



그러니까, 외로웠다.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타임 패러독스>를 처음 만났다. 당시 나는 사춘기와 고된 입시의 연타로 뒤늦은 '중2병'과 조우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4살이나 더 먹었다고 과도한 일탈이니 반항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나는 도피를 택했다. 현실의 문제를 뛰쳐나와 영화와 책으로 둘러싸인 섬에 나를 가두고 누구에게도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무의식은 사랑받고 싶은 욕망으로 꿈틀댔지만 나는 나 자신을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와 깊이의 사랑이 존재한다. 당시 나는 부모님에게도 사랑받고 있었고, 친구들에게도 사랑받고 있었으며,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몇몇 선생님들에게도 사랑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살의 사랑은 평면적이다. 나는 뽀뽀와 애교, '좋아해'라는 고백만이 사랑의 전부라고 믿었다. 못생기고 뚱뚱한 나는 외모가 최우선인 짝짓기 세계에서, 말하자면 영영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혈혈단신인 제인은 우연히 만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지만, 남자는 말도 없이 사라지고 아이는 납치당한다. 양성구유였던 제인은 출산 후 여성 생식기가 완전히 망가져 존이라는 이름의 남자로 살게 된다. 시간 여행자인 바텐더의 도움을 받아 사라진 남자를 찾으러 과거로 돌아간 존은 그 남자가 사실은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되고, 그 사이 바텐더는 제인의 딸을 납치해 고아원에 놓아둔다.


그러나 바텐더 또한 피즐 폭파범을 쫓다 발생한 사고로 안면 이식 수술을 받은 미래의 존이었음이 밝혀지고, 존은 시간 요원으로서 새 삶을 시작한다. 바텐더는 은퇴 후 피즐 폭파범을 잡기 위한 마지막 시간 도약을 하지만, 피즐 폭파범 또한 노인이 된 자기 자신임을 깨닫고 그를 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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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설명을 위해 첨부한 줄거리 요약도



제인은 이 모든 일을 겪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그녀는 강인하고, 그녀는 똑똑하다. 그래서 그녀는 늘 스스로를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센 '척'들은 고독의 바다에 익사하기 직전 외치는 단말마의 비명에 불과하다.


겉으로 아무리 큰소리를 치고 강한 척해도, 제인의 두꺼운 가면 안에는 작고 연약한 고독이 숨 쉬고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울음을 삼키던 나는, 그녀가 얼마나 타인의 사랑을-그것이 부모에게서 건, 친구에게서 건- 갈망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제인은 마침내 그토록 원하는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처음 보는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내맡긴 결과는 처참했으니, 그녀는 또다시 혼자가 되어 또 다른 종류의 고독과 마주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물리적인 고독과는 다른 것으로, 실존적 고독을 의미한다. 설령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고독하다. 모든 인간은 주체적 의지를 가진 실존적 존재인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온전한 사랑이라는 말은 얼마나 무의미한가? 가장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적어도 그렇다고 믿어지는) 부모 자식 사이에서 조차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심지어는 관계가 일정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하고 둘 중 한 명만 마음을 놓아버리면,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휘청인다. 연인관계 조언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노력'이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잉꼬부부도,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살아있기에 고독하고, 고독하기에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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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한다. 모든 예술 매체가 사랑에 대해 떠들어대지 못해 안달인 것은, 한 번이라도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그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임을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조금씩 바래지고 옅어지다 종국에는 어둠이 되어 사라질지라도, 그때의 추억이 평생을 살게 할 원동력이 될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마치 불빛을 쫓는 날파리처럼, 우리는 사랑을 향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그 끝이 뻔히 보이는 게임이라 해도.


사랑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난 존은 바텐더를 만나 자신은 사랑이 아닌 삶의 목적을 원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텐더는 존에게 피즐 폭파범이라는 삶의 목적을 부여한다. 그러나 피즐 폭파범 또한 노인이 된 바텐더(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평생 자기 자신의 꼬리를 쫓아왔음을 깨닫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향하는 존재는 공허하다. 그리고 공허한 인간은, 끊을 수 없는 고독의 굴레에서 자기 자신에게 살해당하는 미완의 존재다. 우리는 바로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한다. 어쩌면 사회가 결혼에 과도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사랑을 향해 달리는 시시포스다.



[김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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