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봐, 우린 이것만 있으면 돼. 담배 몇 개피, 커피한 잔, 그리고 약간의 대화”

이 영화의 명대사로 꼽을 수 있는 대사가 나온다. 이는 청춘의 면과 트로이가 가진 이상을 다 보여준다. 저 세 가지만 있어도 행복하다면 청춘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많아진다. 내 행복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행복, 남편 혹은 아내의 행복, 자녀의 행복을 책임져야 한다. 행복을 위해 지불해야 할 돈은 5달러가 아니라 25달러가 되고 나이가 들수록, 건강을 잃으면 잃을수록 이는 배가 된다.

삶은 청춘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청춘은 짧고 인생은 길다. 행복의 대가가 작은 이 시기는 마치 일년에 한 달 남짓 되는 봄과 같아서 푸를 청자에 봄 춘자를 쓰는 지도 모른다.

리레이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트로이와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한 리레이나는 자살 소동을 벌이는 엄마 대신, 중학생이 되기도 전에 술독에 빠져버린동생 대신 쓰레기를 버리고 성적표에 사인을 하고 우유를 사왔다.

친구들과 공과금 문제를 얘기하던 차에 트로이가 집에 들어오자

 

한껏 비꼬는 리레이나

 

 

 

 

 

20년 동안 회사를 위해 일하고 전립선암에 걸린 아버지를 본 트로이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들은 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상주의자에게 비수를 꽂는 리레이나. 그럼 너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해! 트로이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는다.

나를 비롯해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많아 실천이 어렵다. 처음부터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 리레이나와 같은 경우 이상도 있지만, 어느 정도 현실에 수긍하며 끊임없이 현실에 이상을 녹여내려 노력한다. 이 영화에서 자주 명대사로 꼽히는 "5달러, 한 잔의 커피, 담배, 그리고 너와 나"보다 "지금 해, 세상은 널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이 대사가 더 와닿았다. 세상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느긋느긋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을 도와주지 않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물을 부어야 밥이 된다.

 

 

리레이나는 마이클로부터 다큐멘터리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듣게 된다.

다큐멘터리 발표회에 가는 리레이나는 자신의 스타일이 아닌 옷을 입고 그런 리레이나를 보며 트로이는 너의 진짜 모습도 두고 가라고 한다.

그리고 마이클의 뒤에다 대고 말한다.

다큐멘터리 발표회에 간 리레이나와 마이클

 

 

 

그러나 발표된 다큐멘터리는 리레이나가 만든 의도를 완전히 왜곡했다.

리레이나는 화가 나서 뛰쳐나가 버린다.

 

 

 

리레이나를 뒤따라 온 마이클은 열심히 해명한다. 현실주의자인 마이클, 그의 말마따나 그도 한때는 이상으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두 손을 들었다.

 

 

리레이나는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상업화 된 것을 보고 속상해 한다. 다큐멘터리는 리레이나에게 중요했다. 세계의 빈곤을 없애고 지구를 구할 수는 없지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의미있는 것이었다.

"23살 때는 정말 뭔가가 돼있고 싶었어"

어렸을 때 자주 했던 생각이다. 25살 때는 천만 원 쯤 모으고, 유럽여행도 갔다 오고, 엄마 아빠에게 백만  원씩 턱턱 주겠노라 약속까지 했었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나보다 멀리 갔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로 돈을 벌고, 길을 헤매는 아이들을 기꺼이 도울 수 있는 어른스러운 어른이 되기를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않았다.

내가 조금 더 어린 티를 벗고 웬만한 일에는 상처받지 않고 외려 우는 친구를 위로해 줄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나 친절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사람과 세상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어른스러운 어른이 되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나의 배움의 속도는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에 비해 현저히 느리고 나는 당장 나에게 닥친 일도 버거워 그것을 헉헉거리며 뒤따라가느라 그냥 25살이 되었다.

 

그리고 이상주의자만이 할 수 있는 위로에 최고의 위안을 얻었다. 25살의 나는 이제 어느 정도 나를 그릴 수 있으니까, 밑그림은 어쨌든 작품을 만드니까 그것에 위안을 삼았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사랑은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원나잇에 익숙한 트로이는 리레이나와 사랑을 나눈 다음날 아침. 서둘러 나가버린다.

잔뜩 화가 나 따지기 위해 온 리레이나를 보고 노래하는 트로이. 리레이나는 뛰쳐나가 버린다.

리레이나를 붙잡으러 온 둘

 

 

그는 이상주의자인 트로이를 비아냥거리지만

트로이는 사람은 다 혼자서 죽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트로이는 리레이나를 찾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트로이는 집을 비우게 되고

리레이나는 트로이를 찾아가기 위해 짐을 챙긴다.

 

집 앞에 와있는 트로이

 

 

 

"후회가 행성의 무게로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이 영화가 좋은 점 중 하나는 철학적인 말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들려오는 것이다.

 

 

리레이나와 트로이가 이어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

영화의 원제는 'Reality bites' 즉 현실은 아프다, 녹록지 않다 이런 뜻인데 왜 제목을 바꿨지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졸업 후에 따라다니는 학자금 대출이나, 집세, 공과금에 허덕이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은 청춘들을 잘 그려냈기 때문에 이해가 갔다.

영화 속 청춘들은 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난 즐거운 순간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난 말 그대로 순간적인 쾌락에는 한껏 경계해왔다. 절대 술에 잔뜩 취해 잠들지 않고, 담배에 의존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하룻밤을 보내지 않고. 그러나 기분이 땅끝까지 가라앉을 때 그것들만큼 위로되는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결국엔 나를 좀먹고 말 것들에 내 삶의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한다. 책, 영화, 음악, 한 캔의 맥주 나를 망치지 않으면서도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것들이 나에게 즐거운 순간이다. 친구와 돗자리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나태하게 누워있는 일을 사랑한다.

감독이 극 중 마이클 역할을 했던 벤 스틸러인데, 아무래도 너무 좋아서 조만간 그가 찍은 영화의 필모그래피를 다 볼 것 같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현실에 이상을 녹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난 벤 스틸러 감독이 약 20년 뒤에 만든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그 메시지를 찾으려 한다. 상상은 결국 현실이 됨을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