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잃어버린 자연과, 잃어져가는 인간관계성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7.06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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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Amazon and Dear You,


[크기변환]디어 아마존 포스터.jpg


전시의 제목은 'Dear'로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낼 때, 정중한 마음을 담아 쓰는 표현이다. 전시의 주제 명은 관람객에게 이 전시가 무엇을 말하는지 함축적으로 표현된 문구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 있는 열대우림 'Dear Amazon(아마존에게)'로 시작하는 전시 주제는 그 옆에 바로 붙어 있는 '인류세(Anthropocene)'라는 말로 끝맺는다. '아마존'과 '인류세' 두 개념 모두 현대미술관에서 접하기에는 생소한 사회과학적 개념 용어다. 그리고 글의 포문을 여는 듯한 이 전시명은 관람객에게 직접 주제가 무엇인지 나름의 답을 찾아보도록 여지를 남기는 초대를 건넨다.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란 지구상에 사는 인류가 지구 환경을 급격하게 변화시킨 시대를 구분하기 위한 지질학적 명칭이다.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이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생긴 기후변화를 중점으로 하여 2000년 '인류세'를 주장했다. 이는 1950년대 이후에 이뤄진 인류의 여러 시도들로 인한 자연 파괴의 결과 직면을 의미한다. 핵실험, 플라스틱 인공물의 무분별한 폐기 처리, 이산화탄소의 급증으로 인한 지구온난화와 기후의 변화가 이에 해당한다. 인간의 탐욕적이고 무분별한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생태계 생물종의 개체수 변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류가 자초한 자연환경의 인위적 변화를 새로운 지질학적 용어를 빗대어 표현한 현 시기가 '인류세'시대다. '인류세'라는 개념은 현재 다방면의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개념이며, 정식 학술 용어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즉, 일반 대중들에게 '기후환경 변화'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연 구분점으로서 '인류세'개념 은 익숙지 않은 실정이다. 이미 자연환경은 인류에 의해 파괴되었고 변형되었다. 그 결과를 직면하는 새로운 시대의 구분을 명명하는 '인류세', 이 개념을 '디어 아마존, 인류세' 에서 미학적으로 풀어냈다.

전시는 총 3부로 구성된다. 그중, 이 전시가 인류가 파괴한 자연의 모습에만 집중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까지 미치는 결과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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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마르셀 다린조,
제 3차 세계대전 중 당신의 삶
: 집단적 트라우마, 2019설치, 연속적 퍼포먼스


1부 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안쪽에 관객과 아티스트가 상호 소통하여 일련의 작업들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나온다. 흰 전시 벽면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스프레이 칠한 문구가 적혀 있다. "The we is a murderer, Who the fuck is The you?" 우리는 바로 살인자이며, 그 우리를 구성하는 당신은 바로 누구냐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이 전시의 전체 주제로 볼 수 있다. 인류인 우리는 절대 긍정적이지 않다. 파괴하고, 멋대로 행동하며, 결과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 구성원을 이루는 한 명인 누군가를 향해 경각심을 일깨우는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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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조나타스 지 안드라지, <노스탈지아>
2012, 345개의 파이버글라스에 페인트


인류의 책임을 묻는 질문은 위 작품을 통해 이미 그 결과를 직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위의 사진은 브라질 근대화 프로젝트의 실패를 보여주는 헤시피 지역의 한 벽면에서 떨어져 나간 타일을 얼기설기 붙여 시각화한 작품이다. 그에 반해 타일의 본래 형태가 담긴 사진은 전시 벽면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파괴된 형태의 타일 구조에 비해 사진은 상대적으로 크기 면에서 왜소한 느낌을 준다. 이는 사진이 담고 있는 본래 타일의 형태 역시 얼마나 파괴되기 쉬운지, 되돌릴 수 없는 지나간 과거임을 나타낸다.

브라질 도시 근대화 작업의 일종으로 생겨난 결과물인 변형된 타일의 형태는 인류가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두지 못한 시간들을 상징한다. 사진 속 제자리에 있는 타일은 인류의 손에 거쳐 해체되었다가 인위적으로 전시장 벽면에 걸려 있는 셈이다. 인류의 욕심이 담긴 행동이 가져오는 파괴적 결과를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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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조나타스 지 안드라지, <트로피컬 행오버>
2009, 사진 105장, 종이 140장, 가변크기


파괴된 타일의 형태 옆엔 헤시피 지역의 시간을 연대기 순으로 기록한 전시가 놓여있다. 도시의 형성과 폐허가 되기까지, 그리고 그곳에 산 주민들의 개인적 기록들을 함께 전시해 놓았다. 파괴된 타일과 본래 형태가 담긴 사진 속 대비가 인류가 자초한 환경 변화의 결과를 단면적으로 보여주었다면, 이 전시는 그러한 결과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헤시피 지역의 사람들의 너무나 일상적인 기록은 그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도시의 생성, 파괴와 전혀 무관하다. 근대화나 도시형성의 대가로 자연을 잃어버리는 데에는 깊게 관여하지 않은 주민들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전시 벽면 전체를 아우르는 이 시각적 전시는 그러한 패턴이 연속적이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자연을 이용하는 존재, 당연히 있어야 할 존재로 인지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타일의 본래 형태가 담긴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이미 과거의 모습이다. 그리고 현재는 그 앞에 있는 변형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타일이다. 되돌리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고, 그 옆에서 자연스레 지내왔던 우리의 시간들이 뉘우침을 일으킨다. 전환점을 찾기엔 우리의 환경은 이미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단 환경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까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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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귀 퐁데, <게임으로 보는 타자성-서울>
2019, 오디오 7대(1분)


위 두 작품은 고립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어그러진 모습을 말한다. 시각적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인간 내면의 고독하고 왜곡된 정체성을 드러내지만, 그 옆의 청각적 효과인 기계음의 설명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불완전하게 표현했다. 위의 사진은 '자신만의 세상에서 외로운 사람'이며, 아래 사진은 '타인은 위험한 존재'라는 제목이다. 위 사진은 주로 단어의 형태로 '실루엣, 윤곽, 난해한, 이방인'으로 자신을 설명하며, 아래 사진은 '내 신체는 나에게 낯설다, 나는 당신에게 감염되고 싶지 않다, 내 면역체계를 보호해야 하니 나와 거리를 유지해주기를' 등으로 인간관계성이 부재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모두 자연스럽지 않은 상태다. 본래 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성이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스로를 고립으로 이르게 한다. 즉,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실패한 결과가 인간성마저 위협하고 있는 지점에 이른 셈이다.

자연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속에 인간이라는 존재도 상호작용의  한 부분으로서 작용한다. 근대화가 진전되기 이전의 인간들은 자연이 주는 것 하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야 했다. 그 한계점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했다. 그러나 근대화라는 물결 하에 이뤄진 도시화, 기계화, 상업화는 자연과 인간과의 상호작용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는 역기능을 발생시켰다. 한계 속에 있고 싶지 않은 인간의 욕심이 눈을 뜬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무분별한 자연 파괴가 이루어졌다. 계속해서 자연을 파괴해야 하는 구조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새로운 문명을 이룬 인류는 '관계성 부재'라는 결과를 만들어내어, 스스로 인간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해 버렸다.

인간 스스로가 계속해서 주인이라는 의식은 자연과의 관계 단절을 넘어 인간과의 단절을 엿보게 한다.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올바른 방향 없이 무분별한 욕심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너무나 커져버렸다. 자연환경의 변화가 단지 주변 환경의 변화에만 그칠 것이라는 단적인 사고의 예다.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는 순환성을 잃어버린 '인류세'시대의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살인자'라는 명명밖에 없다. '인류세'시대의 인간은 더욱 고립을 추구한다. 자연 위에 군림하는 것이 지나갔으니 이제는 인간 위에 군림하고, 인간을 소모품으로 보는 현상이 심화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칼날을 내미는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레 타자를 배제하며 공격적인 언사와 그로 인한 올바른 정체성의 확립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자연환경의 변화를 맨 처음 촉발시킨 인간이 이제는 인간 정체성에 대한 변화마저 당기고 있다.

'디어 아마존, 인류세'는 이처럼 자연환경의 변화가 그저 물리적인 환경의 변화에만 그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물리적 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내면에까지 잠재적으로 미치는 가능성을 가진다.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용어의 등장은 이러한 변화가 상당히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자연환경에서 중요한 환경적 역할을 담당하는 열대우림 지역 아마존에 'Dear'라는 표현을 써 시작한 'Dear Amazon'은  그간 인류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던 시간에 대한 사과의 인사다. 그리고 이 전시가 우리에게 건네는 'Dear You'라는 인사를 읽을 수 있다. 이 전시를 보는 당신은 얼마나 자연에 무관심했으며, 남용했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어떻게 직면하고 있으며, 현재 '인류세'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의 내면은 어떠한지를 눈여겨보라고 말이다.

현재 인간 내면의 여러 가지 변질되는 모습들의 근원이 인간이 비롯한 자연환경의 변화에서 시작됐다는 담론은 우리에게 더 큰 시각을 요한다. 상호작용이 무엇인지 알아갈 기회조차 잃어버린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상호작용해 나갈 개선을 택할지, 아니면 본성 그대로 상호작용의 불가능을 인지하여 이대로 놓아버릴지의 질문을 던진다. 자연과의 관계가 끝나가는 지금 이 시점에 인류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인간과의 관계마저 놓아버릴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에 진지하게 임할 각오가 되어있는가. 인류가 어떠한 선택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지는 시간만이 답해 줄 것이다.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인류세'
 

[한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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