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림자가 보여주는 미학 [도서]

<점선의 영역>을 읽고
글 입력 2019.04.21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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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날 거다. 소중한 걸 잃게 된다. 힘들 거다. 용기를 잃지 마라. 도망치면 안 돼.


- 점선의 영역, 16p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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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있어야 할 그림자가 어느 시점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떨어져 나간 그림자를 두고 '나'의 여자친구인 '서진'은 그것을 두고 해방이라고 말한다.


나의 할아버지는 주인공에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예언을 건넨다. 주인공은 당신이 예언한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서진이라고 생각한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고 예언이 운명처럼 들어맞을 때까지. 그리고 "예언이라는 확고부동한 점이 있다고 삶이 분명해지지는 않는다"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릴 때까지 말이다.

최민우의 장편소설 『점선의 영역』이 끌고 온 '그림자'의 소멸은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연상하게 만든다. 두 소설에서 그림자는 당사자가 느끼는 불안정한 정서를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의 어두운 내면을 꿰뚫고 그림자는 떨어져 나오거나 스스로 일어선다. 『점선의 영역』은 그림자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에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처럼 해석되는 점에서 접근이 신선하다.


서진의 그림자가 없어지는 사건을 기점으로 크게 두 가지 일이 벌어진다. 다른 이들에게서 서진이 투명해지면서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곳곳에 정전 사고가 벌어지면서 도시 일대가 혼란스러워지는 것. 주인공과 서진은 충분히 개연성 있는 해석이라면서 정전 사고를 그림자의 짓이라고 추측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게 밝게 드러나는 세상에서 어두운 그늘 같은 그림자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러면서 그림자는 서진이 세상에서 느끼고 참은 부조리를 응축하여 품고 있다. 그림자는 혼자 떨어져 나가며 무서운 정전사고를 일으켜 세상을 더욱 어둡게 만든다.

세진은 정전사고 속에서도 자신의 그림자를 되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떨어졌을 때, 오히려 그녀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타인에게 대놓고 멸시당하는 대우를 받던 감정들이 떨어져 나가 사회로부터 자유롭다는 이유에서다. 현실도피적이면서도 나약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서진의 행동은 그림자로 인하여 자기 자신이 소멸해버리는 모습으로 이해된다.



자신이 순간 품었던 끓어오르는 증오가 그녀의 몸에서 그림자를 분리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접착제로 붙여놓았던 이음매를 열을 가해 떼어내듯이.


- 점선의 영역, 97p 中



그림자를 떼어내며 희미해지는 서진으로 인해 두 사람은 갈등을 겪는다. 나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서진을 원하지 않고, 서진은 본인이 행복하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의 대화는 '나'가 몸담고 있는 빅데이터 업체에서 진행하는 '우울증 사전 예측 프로젝트'와도 비슷한 결을 함께한다.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걸쳐 결과를 도출하는지 정확히 이해 못 하는"데도, "적절하게 처리해서 유용한 아웃풋만 산출할 수만 있으면 되는 거"라고 직장 후배에게 말하는 '나'의 대화를 엿보아도 그렇다.

그래서인지 나는 정전 사고가 그림자 탓이 아니라 알고리즘 오류 때문이라는 뉴스 보도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기차역 사건이나 연관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실은 그림자로 인한 사건을 무마하려는 느낌이 짙어도 말이다. 세상에는 이유를 모르지만 결과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이 있다. 그런 생각들은 서진과의 해프닝을 겪고 내가 한 쪽 눈이 실명되면서 조금씩 바뀌어간다.


소설에서 예언이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메시지로 다가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운명론적으로 들리는 할아버지의 예언은 결과적으로 '최악'을 피하는 '차악'으로 당사자들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예언을 건네며 "용기를 잃지 마라. 도망치면 안 돼"라는 마지막 말은 비관적일 수 있는 예언에 의지적인 메시지를 남긴다. 벌어질 일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다가올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상하거든. 내 생각은 그래. 그리고 그걸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사실 그건 이해의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감각의 문제지. (…) 셋 다 똑같이 이상해. 어느 쪽이건 1 더하기 1을 했을 때 답이 2는 아니니까.


- 점선의 영역, 130p 中



그래서 "각자의 불완전함을 껴안고 살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라는 마지막 페이지의 말은 보다 인간적으로 들린다.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불완전함'을 그 자체를 받아들이게 됐으니 말이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점선의 영역'에는 우리가 크게 방점을 두고 살펴보지 않는 나름의 영역이 있다. 우리는 사는 세상에 대한 모든 걸 알지는 못한다. 조금은 이상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들. 그것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이해를 바라는 책으로 읽혔다.



[원종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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