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발튀스(BALTHUS)의 에로틱한 소녀들 [시각예술]

매력적인 혹은 불편한 그림을 만나다.
글 입력 2019.04.14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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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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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스페인 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에서 발튀스 특별 전시회를 보고 왔다. 발튀스라는 프랑스 작가의 전시였다. 기대 없이 둘러본 그의 전시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는 주로 다소 어린 여자들을 그렸고 다수의 그림엔 거울과 고양이가 자주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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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가 그린 소녀들은 모두 야릇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미성년의 어린 여자 아이돌들이 딱 붙는 상의에 짧은 치마를 입고 춤을 추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런 걸까? 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영화 속 은교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성적 대상으로 비춰졌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나만 한 생각이 아니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미성숙한 소녀들을 에로틱하게 그려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반대로 그림은 계속적으로 묘하게 매력이 있었다. 이 묘한 매력이 발튀스를 유명하게 만들었겠지. 이런 비슷한 느낌을 이전에도 강하게 주었던 작가가 있었다. 바로 에곤쉴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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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다. 에곤 쉴레는 어린 아이들을 유혹해서 외설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적이 있다. 발튀스의 그림도 비슷한 이유로 비난을 당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걸려있던 그의 그림 <꿈꾸는 테레사>는 어린 아이를 관능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한 시민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치워달라는 청원을 했었고 약 9000명이 넘는 이들이 서명을 했었던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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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 불편한데 보게 되는 그림들이다. 외설적인 겉 이면에 굳이 우리는 무엇을 봐야하는 것일까?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발튀스는 자신의 작품이 에로틱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성적인 모습이 주는 불편함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 한다.


발튀스가 소아성애자이건 아니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야 그것은 개인의 취향일 뿐이나 동시에 대다수가 느끼는 불편함이기도 하다. 어린 소녀의 모습은 순수와 욕망의 경계에서 우리에게 불편함을 전달하는 하나의 상징인 셈이다.



 

3. 에곤쉴레는 옥중일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에로틱한 스케치나 수채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이다. 나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으며, 그 작품들은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내 견해를 지지해 줄 것이다.


아무리 에로틱한 작품도 그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상 외설이 아니다. 그것은 외설적인 감상자들에 의해 비로소 외설이 된다. 클림트를 포함하여 지극히 많은 대가들의 이름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으로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단,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그와 같은 그림을 고의로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는 것, 내가 아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물론 타락한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타락이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어른들은 그들이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얼마나 타락해 있었는지, 얼마나 성적 충동에 시달렸는지를 잊어버린 것일까. 어른들은 자신들이 아직 어렸을 때 공포스러운 욕정이 급습하여 괴로웠던 기억을 잊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로 인하여 정말 무섭고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성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는 한, 성에 대한 번민으로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의도를 가지고 드러내었고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보는 사람에게 달렸다고 말한다. 야하다고만 느낀다면 그것은 보는 사람이 그런 시선으로 소녀들을 바라봤다는 하나의 반증인 것이다. 사회가 억눌러왔지만 개인적으로 욕망하고 있는 하나인 금욕적인 에로티즘은 오히려 완전하게 드러남으로써 야하지만 야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그의 팬이었다고 한다. 1949년 발튀스의 전시 도록 서문을 이렇게 썼다고 한다.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는 법을 몰랐다. 우리의 아파트,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 우리의 거리들에 숨어 있는 모든 불안하게 하는 것들의 존재를 몰랐다.”



사회의 검열을 무너트리고 누구나 현실 속에서 가지고 있는 불안함, 불편함을 꺼내는 것도 예술의 역할 이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 그러한 의미에서 결국 메트로폴리탄에서 발튀스 그림의 철거를 반대한 이유에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게다가 선정성의 이슈를 떠나서 그들 그림의 독특한 구도, 색감, 그림 속 인물의 시선에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 등을 고려하면 순수한 매력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최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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