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알베르 까뮈의 미학과 '미적 본성' [문화 전반]

알베르 까뮈의 부조리 철학
글 입력 2019.04.0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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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열렸던
'weather : 오늘,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전시회에서 촬영해 온 작품 중 하나.




0. 미(美)의 기준과 창조



현대 사회에서 ‘창조’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때 창조되는 대상은 기존의 세계에 존재하던 것일 수도, 없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어떤 것을 ‘창조’한다고 하면, 에디슨의 전구와 같이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혁신적인 무언가를 발명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이때의 창조에는 개인의 창의성과 상상력이 깊게 관여한다.


창조를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은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감상할 때에도 큰 영향을 준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 당대의 사회적인 메시지나 교훈보다는, 자신만의 영감이 드러난 작품을 내놓고자 한다. 또한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들은 흔히 예술가를 창의적인 존재로 여긴다. 예술가 본인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이전의 것과는 달리 독창적이고 신선한 작품을 내놓길 기대한다. 이렇듯 개인의 독창성과 창의성이 가미된 ‘창조’를 지향하는 현대 사회의 사고방식은 미(美)를 주관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생겨났다. 이는 미의 기준이 객관적이지 않고, 다시 말해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개개인의 취향과 생각에 따라 제각기 달라진다는 뜻이다.




1. ‘상상력’의 미학적 변천과 원인 : 인간의 ‘미적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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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역시도,

동일한 전시회에서 촬영해 온 사진.

꼿꼿한 자세로 그녀, 혹은 그는ㅡ

무엇을 하는 중이었을까.


  

상상력이란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이다. 이때의 이미지는 현실에 없는 가상의 것일 수도, 혹은 현실세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전자에 해당하는 이미지ㅡ즉 개인이 실제로 목도한 것의 이미지를 판타지아(phantasia)로, 후자에 해당하는 이미지ㅡ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이미지를 에이카시아(eikasia)로 명하였다. 고대 사회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판타지아와 에이카시아에 관한 시선은 ‘모방’과 관련이 있었다.


이들에 관한 의견은 구체적으로 따졌을 때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상상과 창조는 연결점이 없다는 것이 르네상스까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소수 예술가들은 예술이 단지 자연을 이상적으로 모방하지 않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분야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오늘날의 우리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창조와 상상력은 연결된다’는 생각이 조금씩 퍼져나갔다. 물론 이 의견은 당시 비주류에 해당했지만, 19세기에 낭만주의적 예술 사조가 도래하면서 창조는 상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허구적인 대상을 만드는 작업이 되었다. 고대에서 상상력이 단순히 이미지를 그릴 능력이었다면 이 시기에서는 현실 세계 너머의 고차원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시기가 비교적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상상력을 구현하기 위해서 개인의 주관적 창조성은 거의 필수적인 요소로 변하였다.


이렇듯 상상력과 창조가 미적 주관성이라는 개념으로 묶이는 이유는 미학사를 살펴보아도 불투명하다. 어렴풋 설명하자면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사물에 내재된 영원불변한, 객관적인 진리와도 같았는데 그것에 대응되는 인간의 능력을 찾다가 ‘우연하게’ 주관화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우리의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아름다움은 사실 바깥보다는 우리의 감각과 조응하는 개념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미의 주관화가 진행되어 상상력과 창조성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화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스러움을 변화의 원인으로 상정할 경우 연이어 떠오르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본성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정해진 틀 안에서 대상을 만드는 것보다 ‘본능적으로’ 틀을 벗어나 자신의 내면이 추구하는 대로, 개개인마다 그 특징이 천차만별인 주관을 따라 이루어지는 예술 활동을 선호해야 한다.


아무런 근거 없이 의식의 흐름에 따른 변모만을 원인으로 내놓지 않고, 이러한 방향의 전제를 성립하여야 미학사에서 주장하는 미 개념의 자연스러운 변화가 설득력 있는 논변이 된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미적 본성이 어떤 연유로 아름다움의 주관화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논증할 것이다.



 

2. '부조리'가 낳은 인간의 독창성 (알베르 카뮈의 철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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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까뮈의 사진.

그의 사진들 중 70%는, 카뮈 특유의

'찡그리는 표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이상이 괴리되는 상황을 끊임없이 경험한다. 사회가 규정하는 보편적인 인간상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성찰하며 절망하고 괴로워한다. 인위적으로 만든 기계가 아니라면 특정한 인간상에 온전하게 부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자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며, 긍정적인 부분에서든 부정적인 부분에서든 현실과 뒤틀리는 면을 하나 이상은 가지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인간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왜곡을 ‘부조리’로 명명하며, 이것이 인간이 세계에 존재하면서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근원 현상이라 보았다. 심리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이유나 죽음에 관해 생각해보기 마련이고, 이를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며 이 세계에 낯설음을 느낀다. 이러한 부조리의 감정은 인간을 세계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현실 세계의 존재들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동시에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느 하나도 완벽하지 않다는 시선을 체득한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개인의 창조성을 이끌어내었다. 예를 들어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수학에 흥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수학 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생은, 자신을 옭아매는 시간표에 염증을 느끼며 그 시간에 이른바 딴 짓을 할 것이다. 흔히 하는 딴 짓이 교과서나 공책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그림 그리기가 어떤 것보다도 즐거워지며 선생님께 핀잔을 듣기 전까지는 그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다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이처럼 인간은 자아와 세계가 대립하면서 발생하는 부조리 안에서, 세계와 상반된 자신의 창작욕을 분출하려는 갈망이 고조됨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했을 때 느끼는 즐거움은 평소에 체험했던 것과 다른 종류의 것임을 깨닫는다. 이것이 현대 예술에서 강조하는 예술가의 ‘독창성’으로 이어진다. 현재 시점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사태를 마음속에 그리며 현실 세계에 표현하려는 욕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저마다의 내면에 이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한 번쯤은 마음속에 품기 마련이며, 이는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당대 사회가 규정하는 아름다움을 반영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며 만족하고,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지켰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았겠지만 결국 이에 반발하는 예술 사조들의 연이은 등장으로 현대의 예술은 그러한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진 상태다. 예술가들은 한 사회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인위적인 입자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을 거부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이 체험한 자아와 세계의 대립, 즉 부조리는 아름다움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위협하였으며 주관적인 독창성을 분출하였다.

 


 

3. 부조리와 미적 본성 : 독창성에 기반을 둔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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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일본 오사카에서 교토로 이동하던 중.

한적한 급행열차가 잠시 정차한 틈을 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만약 예술가들의 입장에서 르네상스까지 존재했던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수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면 기꺼이 그러한 예술을 지금까지 해왔을 것이다. 개인의 자유권이 그 어느 때보다 체계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서, 예술 활동을 사회의 통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억압하는 상황은 존재하기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오늘날 예술가들은 작품을 창작하며 누구보다도 ‘독창성’, ‘창의성’을 내세워 일반적인 통념과는 다른 자신만의 자아를 표출하려고 한다. 이러한 활동에서 그들은 즐거움을 느낀다. 예술을 정의하는 지배적인 내러티브를 거부한 다원주의의 보편화가 이를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가 된다. 사회의 대다수가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자신의 주관이 향하는 대로, 예술가 본인이 원하는 예술 사조에 따라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야 함이 현대 예술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독창성이 근본적으로 카뮈가 주장한 자아와 세계와의 불일치, 즉 부조리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율성에 근거한 미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계몽주의에 이르러 개인의 자유를 실정법으로 규정하였고, 신체를 구속당하지 않고 자유로이 내버려 두라는 요구 역시 받아들여짐에 따라 인간은 원초적으로 구속을 지양하는 존재임이 드러났다. 이 관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부조리에 기반을 둔 ‘독창성’이 강조된 이유는 결국 이전의 왕정(군주정)이 절대적인 권력자로 군림했던 것처럼ㅡ 하나의 미적 기준만이 당대 사회를 구속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화폭에, 혹은 글이나 선율에 예술가 자신의 주관적인 상태와 감정을 기록하려는 행위는, 이 행위로 일련의 예술 작품을 창작하려는 이유는 이처럼 구속과 억압에 ‘반항’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조리와 더불어 살아 숨 쉬는 것이고 그것이 주는 교훈을 알아차리고 그 피와 살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부조리한 즐거움의 전형은 다름 아닌 창조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중에서.

 


카뮈에 따르면 인간은 반복으로 다가오는 부조리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부조리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는 여기에서 부조리의 세계에서 가장 부조리한 인간은 ‘창조하는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창조하는 인간은 부조리함 속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삶을 견뎌내는 것이다. 물론 이 창조는 부조리의 세계를 벗어나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하도록 유도하지는 않는다.


삶이 있는 곳에서 항상 부조리는 동반되고, 인간의 창조는 부조리의 세계로 다시금 침투하여 그 세계의 의미를 또다시 발견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예술의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세계 안에 던져진 예술가는 자신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예술가로서의 이상과 현실의 벽이 충돌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자리에 그 혹은 그녀가 존재하기에 예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가 세계적인 예술 사조의 흐름으로 뿌리 내린 이후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이 심화되었다. 자신의 주관에, 내면에서 들려오는 본능적인 목소리에 집중하며 그 목소리를 가장 잘 표현할 예술 사조를 예술가 자신이 직접 선택하여 사회적인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을 만드는 행동ㅡ이것이 예술 활동이 되었다.


다시 말해, 지향해야만 하는 미가 아니라 지향하고 싶은 미를 추구하는 내면의 미적인 본성이 결국 미학사에서 주장하는 ‘미 기준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낳았다. 그리고 상상력이란 현재의 예술가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느끼며 현재 시점에서 자신의 내면에 떠올리는 개념이 되었다. 지금 존재할 수 없는 사물과 사태에 대하여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이 이미지를 현실 세계에 대상화하는 작업을 예술 활동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현실의 대상을 떠올리는 것도 상상의 일부라 할 수 있지만, 이와 같은 상상에도 전형적인 형태와는 달리 감상자 개인의 주관이 관여하여 개성을 지닌다는 점에서ㅡ즉, 떠올리는 대상과 그것의 전형적인 형태가 불일치한다는 부조리가 발생한다. 미의 주관화는 결과적으로 예술가 개인의 독창성을 강조하는 경향과, 이것이 바탕이 된 상상력을 예술의 전제 조건으로 생각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4. 현대 예술의 미적 기준은 과연ㅡ


   

결론적으로 미의 주관화, 그리고 상상력에 동원되는 창조성을 바라보는 기준의 변화는 인간에게 내재된 ‘미적 본성’에 의하여 변화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겪어야 하는 본인의 자아와 세계가 지향하는 방향의 대립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객관성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으로 이끌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미학사적 흐름에서 현대 예술로 올수록 아름다움의 기준이 우연적으로 주관화되었다고 보는 이유도, 인간임에 따라 지니는 자아ㅡ그리고 그 자아를 통제하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세계의 기준이 지속적으로 갈등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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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동일한 전시회에서 촬영했다.
유독 이 전시회를 감명깊게 관람했나 보다.
그림들이 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느낌이 좋았던 걸까.



이와 같은 갈등이 유발한 예술 사조의 필연적인 변화는, 우리의 눈에는 본성에 의한 자연스러운 결과로 비추어지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부조리의 인간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한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자신이 지향하는 것의 괴리를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으므로 앞으로도 예술가와 세계의 보이지 않는 대립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주관화된 미를 최선의 형태로 볼 것인지는 고심해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움의 절대적인 기준이 무너지고 개인의 주관,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따라 미의 유무가 결정되니 개인의 기호가 자유롭게 보장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의 존속 여부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주관화된 아름다움이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윤리적인 규범이나 제도를 위협할 경우, 혹은 그것을 폐지시키는 정도에 이를 경우 그러한 아름다움도 인정해야 하는가?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을 망가뜨려도 아름다움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는 기준 아래에서, 용인해야 하는가? 주관화된 아름다움의 한도를 어디까지 납득하고 예술로 인정할 것인지가, 향후 우리가 고민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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