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독서일기 - 시크:하다 [도서]

Part 1. 편안함에 대한 새로운 관점
글 입력 2019.03.11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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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이어서 행복한 프랑스 소확행



사람들은 종종 어떤 공통점을 가진 다수의 사람이나 사물의 특성을 한데 묶어 정의하곤 한다. 어떻게 보면 성급한 일반화이고 어떻게 보면 세심한 관찰의 결과인데, 나는 사실 어디까지가 일반화이고 어디까지가 통찰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면, 나는 그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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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의 파리)


조승연 작가의 ‘시크:하다’를 읽기 시작했다. 파리에서의 유학생활을 더듬어가며 쓴 그의 책을 읽다보면, 특히 그가 경험한 프랑스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접할 때마다, 활자 속 이야기들이 내 기억 속의 이야기들과 얽혀 생생하게 떠오른다. 교환학생 신분으로 고작 다섯달을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일들에 그 때의 경험을 비추어보게 되는 걸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때의 경험이 강렬했던가 보다.




새것보다는 편안한 것 - 불편함을 즐긴다




나는 운 좋게 개인용 화장실뿐 아니라 욕조까지 있는 아파트를 얻게 되었는데, 보일러가 1980년대에 설치된 것이었다. 물을 틀면 자동으로 점화되는 장치가 걸핏하면 망가졌다. 그럴 때마다 밸브를 열고 기다란 조리용 라이터를 켜서 거기에 갖다 대면 ‘푹’ 소리가 나면서 불이 붙었다. 하지만 3분 정도 더운 물이 나오다가 다시 불이 꺼지곤 했다. 몇 번 집주인에게 항의해 수리를 했지만, 수리공도 원래 그시대 보일러는 다 그렇다면서 그냥 쓰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그 집에서 2년 정도 살고 나니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보일러가 걸핏하면 중간에 꺼지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사건인지는 어머니께서 프랑스에 오신 다음에 알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찬물이 나오자 비명을 지르고 뛰쳐나오며 이렇게 외치신 것이다.


“너는 샤워하다가 온수가 끊기는데 보일러 안 고치고 어떻게 그냥 살았니? 새걸로 바꿔!”



낡은 가구와 느긋한 수리공, 환경을 내 성질에 맞추기보다 내 성질을 환경에 맞추게 되는 이런 경험담은 프랑스에 살다 온 사람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전공이 불어불문학이다 보니 수업시간에 교수님들께서 들려주시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그분들의 유학시절 경험담이었다. 벽지 도배를 새로 하는데 사흘이 넘게 걸렸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저 웃었다. 언젠가 프랑스에 가면 나도 겪게 될까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면서. 이 때 이미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던 건지 막상 정말로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땐 그다지 답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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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의 생테티엔)



내가 살던 기숙사는 작은 1인실 방에 욕실과 냉장고, 전자레인지가 포함되어 있었고, 주방만 층마다 공용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프랑스 생활 한 달이 넘어가던 무렵, 우리층 공용 주방의 핫플레이트가 고장이 났다. 이틀 내내 플레이트를 뜯어 바닥에 늘어놓고 관찰하던 수리공 아저씨들은 이삼주 정도 걸리겠다며 견적을 내주었고, 자신들의 말을 철썩같이 지켜서 우리는 삼주 후에야 주방을 돌려 받을 수 있었다.


이 때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가 늘었다는 즐거움이, 조리도구와 식재료를 들고 다른 층으로 요리여행을 다니는 번거로움보다 컸기 때문에 그다지 큰 불만이 없었다. 기숙사에 사는 다른 외국인 혹은 프랑스인 학생들도 크게 불평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다들 모이면 웃으며 투덜거릴 재미있는 농담거리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그런 불편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하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살 정도로 불편함에 익숙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맞다. 다들 빨리 해결해달라며 기숙사 직원들을 닦달하는 대신에 조리도구를 들고 오르락 내리락 하며 새로운 주방 메이트들과 수다 떠는 시간을 즐기거나 외식을 했다. 그 불편함이 달리 보면 잠시간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는 소소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시도때도 없이 지하철이 파업해도 아무렇지 않게 출퇴근을 하고 일상을 영위하는 프랑스 사람들은, 어느정도 불편함을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보일러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일이, 찬물이 나올 때마다 라이터로 불을 켜거나, 철물점에서 부품을 사서 갈아 끼우는 것보다 귀찮은 사람들.




예측 가능한 삶




파리에 살면 살수록 나는 무언가 할아버지 시개의 자명시계처럼 구닥다리 톱니바퀴가 고장이 날 듯하면서도 용케도 잘 돌아가는 것 같은 포근함을 느끼고 그에 동화되었다. 그 편안함의 정체는 바로 삶이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프랑스식 편안한 삶의 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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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의 파리)



프랑스의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한 달 업무 계획을 미리 주며, 직원들은 그 계획에 변동이 생기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메일 업무량이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친구들과의 약속을 잡기가 쉽다. 레스토랑을 예약하거나 공연 티켓을 미리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학과와 자매결연을 맺은 프랑스의 학교는 엄밀히 말하자면 어학원이었다. 생테티엔 시에 위치한 장모네 대학교 소속의 어학원. 처음 학교에 가등록을 하고 학생비자를 받을 때, 학교측에서는 안내문고 함께 한 학기 일정표를 보내왔다. 대략적인 학교 소개와 수업일정,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방학 일정이 나와 있었다. 그 안내문을 보고 카니발 기간의 방학과 부활절 방학 동안의 여행 일정을 짜고 교통편을 미리 예매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때 가서 정하자는 마음으로 여유를 부리다가, 비행기가 너무 비싸져서 편도에 14시간이 걸리는 버스를 타고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물론 그것도 내 나름대로는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프랑스에서 고속도로 휴게소도 가봤으니 말이다.


프랑스의 이런 '예측 가능한 삶', 누군가에게는 여유롭고 느긋한 선진 문화로 느껴질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고리타분한 낡은 문화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게 참 재미있는 것 같다. 주어진 계획표에 충실하게 사는 건 내 취향이 절대로 아니지만, 주위 눈치보지 않고 내 삶을 사는 자유는 부럽다. 프랑스 사람들은 오래된 것들에 갇힌 사람들일까,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일까.




편리함은 편안함이 아니다




할머니가 물려준 테이블보를 정성스럽게 손빨래 하는 프랑스인의 모습은 21세기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앞으로 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이 어디인지 실마리를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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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의 파리)


위 구절에서 나는 쌩둥맞게도 영화 <호빗:뜻밖의 여정>의 오프닝 장면이 떠올랐다. 챗바퀴 굴러가듯 단조롭지만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지 않는 평온한 삶을 사는 빌보 배긴스에게 뜻밖에 들이닥친 간달프와 열세 명의 드워프들. 드워프들이 텅텅 비워버린 식료품 창고와 여기저기 진흙발로 더럽혀 놓은 카펫, 함부로 꺼내 쓴 할아버지의 엔틱 의자, 어머니의 혼수 물품들을 보며 속상해하는 빌보에게 간달프는 이렇게 묻는다.

"Tell me, when did doilies and your mother's dishes become so important to you?"
(말해보게, 대체 언제부터 장식천과 어머니의 접시들이 자네에게 그렇게나 중요한 것들이 되었나?)

나는 호빗 시리즈를 정말 좋아해서 여러 번 보고 또 봤다. 볼 때마다 유독 와 닿는 장면 중 하나는, 물려받은 집과 가구에 둘러싸인 안락한 삶을 소중히 여기는 빌보에게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며, 언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모르는 모험을 제안하는 간달프의 대사이다.

"The world is not in your books and maps. It's out there. You'll have a tail or two to tell of your own when you came back."
(세상은 책과 지도 속에 있는 게 아냐. 저 밖에 있는 거지. 돌아오면 자네만의 이야깃거리가 생길 걸세,)

"Can you promise me that I will come back?"
(제가 돌아온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No, and if you do, you'll not be the same."
(아니, 그리고 돌아온다고 해도, 예전과 같지는 않을 걸세.)

빌보가 안온한 삶을 상징한다면 간달프와 드워프들은 모험과 도전을 상징한다. 두 삶은 처음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빌보는 모험을 떠나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들을 통해 가치관의 변화를 겪으며 드워프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마찬가지로 드워프들도 빌보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게 된다. 실제 우리의 삶의 방식도 크게는 이 두 갈래로 나뉜다. 어느 한쪽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빌보와 드워프들이 그랬듯이 서로의 삶을 비추어보며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더불어 도전이 지나쳐 과도한 경쟁이 되었을 땐, 한 발 벗어나 삶을 돌아보는 여유도 가질 수 있었으면.





내가 겪은 프랑스는 전화보다 이메일을 선호하고, 이메일보다 우편을 선호하는 곳이었다. 방세에 포함되어 있는 인터넷을 사용하려고 기숙사에 신청해서 개인 아이디를 받는 데 닷새가 걸렸다.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데는 에이전트와 약속을 잡고, 개설한 통장에서 돈을 실질적으로 꺼내 쓸 수 있는 카드를 수령하는 데까지 열흘이 넘게 걸렸다. 심지어 이 카드는 우편으로 내 기숙사로 배달되었다. 첫달을 제하고 둘째달부터 나오는 주택보조금은 한 달씩 밀려 나왔고, 마지막 두달치는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도 받지 못해 한국 계좌로 이체받았다. 적은 금액에 수수료까지 붙으니 보조금이 반토막나버려 공중분해 되었지만 그것마저도 프랑스답다는 생각에 화도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웃기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어딘지 그립다. 분명 속 터질 정도로 느리고 답답한 그들의 일처리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던 것 같은데, 어느순간 그 삶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모르게 납득했던 것 같다. 그건 느린 게 아니라 여유로운 거라는 걸. 게으름과 여유는 한끗차이고, 나는 그 차이를 결정하는 게 ‘우선순위를 아는가’의 여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알고 있다. 자기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거기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여유로움이 가끔은 정말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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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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