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변화와 성장의 동력, 드라마 '빨간 머리 앤'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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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추천으로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 미국 드라마 '빨간 머리 앤'을 보게 되었다.
"2화까지는 좀 힘들더라도 그 구간만 버티면 무척 재밌을 것"이라는 친구의 아리송한 추천사가 예언이었는지, 마의 2화 구간에서 내 플레이 버튼은 꽤 오래 정체돼 있었다. 워낙 유명해서 어릴적 한번은 읽어봤을 법한 '빨간 머리 앤(혹은 초록 지붕 집의 앤)'이지만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 성인이 된 지금 보자니 앤의 그 넘치는 상상력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표현들이 부담스럽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앤을 처음 봤을 때의 마릴라처럼, 앤이 벌이는 끊임없는 실수들과 그로 인한 사건 사고들이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나머지 회차들을 마저 시청했고, 어느 순간부터 다음화를, 또 다음화를 계속해서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현재 방영된 마지막 방송까지 모두 보고야 말았다. 처음엔 앤을 꺼리다가 점점 그의 매력에 빠져들고 마침내 앤을 일원으로 인정하게 된 애번리의 마을 사람들처럼 나도 빨간 머리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마침내 인정하게 되었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앤은 여러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다. 상대를 피곤하게 만들 만큼 말이 많고,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주 실수를 해서 사고를 만들고, 종종 거짓말도 한다. 사실 앤이 이 드라마에서 벌인 사건사고를 대자면 열 손가락을 다 이용해도 모자를 정도다. 하지만 앤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것이 이 모든 단점을 포용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실수 투성이로서 하는 말인데,
사과가 성공의 비결이야"
앤은 '용기'를 가지고 있다. 여러 사건을 벌이거나 뭔가를 해결하는 방법을 생각해서 이행에 옮기는 용기도 물론 있지만,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우리 모두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순간의 감정으로 뭔가를 벌이고 후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앤도 다른 모두들처럼 종종 주워담지 못할 잘못을 저지른다. 하지만 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수를 사과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뉘우칠 줄 안다. 이런 용감함은 앤 자신을 성장시키고, 앤 주변의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커다란 동력이 된다.
'빨간 머리 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마냥 착한 일만 하는 평면적인 캐릭터들이 아니다. 앤이 존경하는 트레이시 선생님은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갖춘 좋은 분이지만 본의 아니게 콜의 가족에게 그가 학교를 안나온단 말을 폭로해버리는 실수를 하고, 앤의 절친 다이애나는 앤의 곁에서 늘 힘이 돼주는 친구지만 고모할머니가 동성애자란 사실에 편견을 내비친다. 편견없고 다정한 길버트는 친구 세바스찬과의 약속을 가볍게 생각해 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들 외에도 마릴라의 친구이자 동네 소식통인 레이첼, 다이애나의 부모님 등 여러 마을 사람들도 못된 말을 하거나 잘못된 편견을 내보인다. 하지만 이들 모두 나중엔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잘못됐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고,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자신의 잘못된 점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는 성장과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앤을 포함해서, '사과할 수 있는 용감함'을 갖춘 애번리의 사람들의 모습은 쉽게 그 인물들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모두의 성장 드라마
보통 어린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이, 이 드라마 역시 앤이란 인물의 성장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아이들의 괴롭힘을 당하고, 조금 자라서는 남의 집에서 일을 돕고 아이들을 보살피며 학대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던 앤은 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또래 아이들보다 각종 안좋은 것을 보고 듣는 것에 있어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실수들도 잦다. 하지만 긍정적인 삶의 태도와 넘치는 상상력, 착한 마음씨와 똑똑한 머리를 가진 이 꼬마는 마릴라와 매슈의 사랑과 보살핌, 각종 사건사고를 통해 깨달은 삶의 지혜들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변화한다.
이 드라마에서 이런 긍정적인 성장을 하는 것은 비단 앤 뿐이 아니다. 드라마 초반, 앤의 스킨십을 당황해 꺼리고 감정 표현을 잘 못하던 마릴라는 어느새 앤의 포옹에 미소짓고 앤에게 보고싶었다는 말도 하게 될 정도로 변한다. 유독 과묵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던 매슈는 앤의 학예회에서 (본의는 아니었지만) 부엉이로 참여하기도 하고 마을 주민 회의에서는 일어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까지 한다. 중년의 나이에 앤이라는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두 사람의 성장은 앤의 성장 못지 않게 시청자를 기분 좋게 한다.
어느새 나는 빨간 머리에 끝에 'e'가 붙는 말괄량이 앤이 앞으로 벌일 크고 작은 실수들을 기다리게 됐음을 고백한다. 시즌3가 올해 공개를 목표로 열심히 촬영 중이라고 하니, 앤의 이야기가 이어 전개될 그날까지 나 나름대로의 성장과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해나가며 차분히 다음 시즌을 기다려야겠다.
[박찬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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