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대와 함께한 지 곧 일주년이 되어가요 [사람]

읽지 않을 그에게 쓰는 연습 편지
글 입력 2018.10.17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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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오빠? 오빠의 여자친구 지수야. 다음주 10월 23일은 우리가 사귀고 나서 일주년이 된 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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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바빠서 오래 생각을 하지는 못했지만, 몇 주 전부터 오빠가 손목이 허전하다고, 시계끼면 예쁠 것 같지 않냐고 넌지시 말하길래 오늘 아침 8시에 일찍 일어나서 한참 고민해서 시계를 주문했어. 옛날 생각이 조금 났어. 2년 전에 전남친에게도 일주년이 되었을 때 시계를 샀었어.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였어.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지만 10월의 어느 날이란 걸 생각해보면 나는 가을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인가봐. 아니면 늘 외로움을 타면서도, 날씨가 추워지면 그걸 신체적으로도 느끼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웃긴 건, 사실은 내가 시계가 갖고 싶었거든. 그 때는 지독하게도 이기적이어서 커플 시계라는 명목으로 내 것과 그의 것을 샀었어. 비싸보이지만 가격은 저렴한 것으로, 둘이 합쳐서 6만 원 정도 안 들었던 그런 싸구려 시계를 샀는데 막상 열어보니까 시계에 붙여진 스티커가 떼어지려는 지경이더라구. 생각해보면 그때는 늘 선물이라는 핑계로 내 것까지 함께 샀어. 정작 나에게 주고 싶은 거였는데 왜 그 사람에게까지 줬을까? 그 때는 어쩌면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갖고 싶은 물건을 산다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가져왔던 것 같아. 그 때 시계는 지금 어디있는지도 기억이 안 나. 내가 아무리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해도 내 입장에선 꽤나 거금을 들인 것 같은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던 걸까? 어쩌면 전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버렸을 수도 있어. 어쩌면 화장실에 놓고 까먹고 그냥 나와버린 걸지도 모르지. 방수 기능조차 없던 시계였으니까.

오늘 오빠시계를 고르면서 20대 남자가 끼기 좋은 시계는 뭔지 하나하나 다 검색해보고 일일이 읽어봤어. 어떤 점이 좋은지, 예쁜 디자인이 있는 시계는 뭔지. 몰랐는데 시계에도 쿼츠 무브먼트, 오토매틱, 에코드라이브라는 신기한 기술이 있더라? 쿼츠는 아날로그식으로 수은 전지를 넣고 기계식으로 움직이는 거고, 오토매틱은 착용하고 있는 사람의 신체 신호를 읽고 움직이는 거래. 에코드라이브는 빛으로 자동 충전이 되는 방식이었어. 나는 오빠에게 최대한 좋은 걸 사주고 싶어서 에코드라이브와 오토매틱 사이에서 많이 고민했는데, 생각해보니 오빠는 불면증이 심해서 시계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많이 들리면 안 될 것 같고, 오빠가 운동을 하니까 시계를 착용하지 않는 시간이 꽤 길어서 오토매틱을 끼면 오차가 많이 생길 것 같은 거야. 그리고 오빠는 고대 르네상스식의 건축물을 아름답다고 하고, 르네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처럼 아날로그적인 취향이 있으니 쿼츠 시계를 사야겠다고 결정하게 되었어.

오빠가 가죽보다는 메탈이 좋다고 했으니, 재질은 결정됐고, 시계 색깔을 골라야하는데 굉장히 다양했어. 심플한 은색으로만 된 기본적인 것, 끈이라고 부르나? 메탈 부분은 은색이고, 시계 부분은 검정인 것, 시계와 끈 모두 검정색인 것. 아니면 금색인 것 등등. 오빠는 피부가 약간 검고 붉은 편이니까 그냥 은색인 게 훨씬 잘 어울리지 않을까? 검정색도 근사해보이기는 한데, 오빠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들이 거의 톤다운된 색들이니 아마 포인트로 밝은 은색이 반짝이는 게 예쁠거야!

몰랐는데 내가 오빠 만나고 많이 달라졌더라. 예전에는 분명 전남친 줄 시계였는데도 내가 끼기에 가장 예쁜지를 고민했는데 말이야. 완전 배가 고픈데도 선물 생각밖에 나지 않아서, 밥도 안 먹고 시계만 찾아보고 있었네. 그리고 이 기회를 틈타 내 것을 산다거나 그러지도 않았어. 나는 이미 충분한데, 그저 오빠에게 줄 선물이 필요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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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2월에 내 생일에 마크제이콥스 시계를 선물해줬었지? 명품은 잘 모르지만 비싼 시계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 전남친은 나에게 꽃 한송이 사주기 싫어서 초등학교에서 따오던 사람이라서 나는 값비싼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감동해버렸어. 거기다 오빠는 내가 커피나무 카페의 초코쉬폰케익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나를 만나기 전에 포장해서 우리 집 냉장고에 넣어두고 데이트 후에 같이 먹었었지.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홍대의 파스타집을 예약해서 삼겹살 파스타와 샐러드를 사주었어. 그렇게 누군가에게 생일을 하루종일 챙겨받은 적은 처음이라 공주가 된 것 같고, 주인공이 된 것 같았어. 요즘은 그런 특별한 일이 없어도 내 삶의 주인공이 나란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런 것을 몰랐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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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시계를 고르면서 그때 오빠가 나를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했을지 알게 되었어. 나에게 어울리는 색깔은 무엇일지, 내 팔목에 너무 지나치게 크지 않고, 너무 작지도 않은 시계의 지름은 어떤 것인지. 내가 쿼츠 시계를 끼는 것을 좋아할지, 아니면 다른 시계를 갖고 싶어할 지. 과연 어떤 때에 시계를 끼게 될 지. 그 마음이 너무 생생하게 와닿았어.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알게 되는 건가봐. 오빠가 그때 준 시계는 아직도 시계 보관함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 아주 특별한 날만 가끔씩 그 시계를 꺼내어 쓰고, 외출 후면 손을 씻고 바로 시계를 소중하게 보관함에 넣어둬. 오빠는 내가 시계를 잘 안 낀다고 조금 실망한 눈치지만, 이상하게 시계를 자주 쓸 수가 없어. 그건 나에게 너무 특별한 선물이라, 어쩐지 평범한 날에 껴버리면 시계까지 평범해져버리는 건 아닐까 조금 두려워지기도 해. 나의 지극히 평범한 삶을 가끔씩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존재야. 그 시계를 끼는 날이면 정말로 다시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그 때의 기분을 느끼고, 나태해지고 권태로운 내 삶을 환기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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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가 다 떨어져서 시장에 들러 쌈채소와 바나나와 포도, 두부를 사오면서 올리브영에 들렀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과자나 구경할까, 하고 들어갔는데 마침 향수가 눈에 띄는거야. 사실 오빠를 처음 봤을 때부터 향수를 사주고 싶었거든. 늘 돈이 없다는 핑계로 미뤄왔는데 순간 언젠가 살 건데 이렇게 무기한 날짜만 늦춰서 뭐하겠냐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마음에 드는 향수 냄새를 다 맡아봤어. 남자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다는 페라리 블랙, 정말 신선한 향이었어. 여름에 어울리는 냄새였어. 오빠에게도 분명 잘 어울렸을 거야. 그런데 나는 모두가 갖고 있는 것을 오빠에게 특별한 날에 선물해주고 싶진 않았어. 대중적인 것을 꼭 지금 줄 필요는 없으니까. 좀 비싼 브랜드로 몽블랑 오드뜨왈렛 등 냄새를 맡아봤는데 가장 가을의 오빠와 잘 어울리는 향수로 골랐어. 몽블랑 레전드 나이트.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약간 수위가 높아서 걱정은 되지만 사실은 향수의 이름이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고른 점도 있긴 해. 내가 포장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여느 건축학도들 답지 않게 손놀림이 좋지 않아서 점원에게 부탁했어. 오빠도 아마 내가 할 거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할 것 같고 말이야.

평소에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오빠니까 이 향수도 유용하게 사용하겠지? 늘 2개의 향수만 번갈아 가면서 쓰잖아. 내가 새롭게 선물할 향수로 오빠의 매일이 조금 더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시작되었으면 좋겠어. 오빠가 만들고 싶은 하루를 시작할, 새로운 선택지를 내가 하나 준다고 생각하면 마치 내가 신적인 존재가 된 양 인자함을 느끼기도 해.

나는 뭔가 모으는 것에 취미가 없어서 늘 올리브영이나 편의점같은 곳에 가도 적립카드를 새로 만들게 돼. 올리브영 적립카드를 2015년부터 4개나 5개 정도는 만든 것 같아. 전에 만들어 둔 적립카드는 어디갔는지 모르겠어. 분명 물건을 꽤 산 것 같기는 한데 매번 적립을 새로 하게 되니 이익이 전혀 없네. 그에 비하면 오빠는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 않고, 만약 잃어버린다고 해도 필사적으로 찾아. 얼마 전에 오빠가 담배를 잃어버려서 엄청 속상해했을 때도 사실 나라면 그냥 기분나빠하고 끝날 일이었는데 오빠가 진심으로 속상해하는 모습에 놀랐어. 그래서 오빠네 집으로 가면서 담배를 찾아주니 오빠가 "지수 없이 어떻게 살지?"라고 하는 말에 또 마음이 따뜻해졌어. 나는 그저 외출한 길에 오빠 담배를 주워줬을 뿐인데 말이야. 물론 내가 그날 설계 과제 때문에 바쁘기는 했고, 오빠네 집으로 가던 길은 아니었지만 그저 오빠가 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말에 안심을 했던 걸까? 내가 오빠 없이는 살지 못하는 것처럼 오빠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가봐. 이건 모두 욕심이고 어쩌면 집착인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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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종종 "다음 여자친구를 사귀면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을 만날거다. 키도 크고, 다리도 날씬하고, 피부도 하얀 사람으로.", "결혼을 절대 안 할거다"라던가, "또 싸우게 되면 헤어지지 않을까?" 등의 헤어짐을 암시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해. 연애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그 말에 엄청난 상처를 입어서 마치 곧 헤어질 사람처럼 행동하곤 했는데 요즘은 나도 그 농담에 동참하게 돼. 어쩌면 오빠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헤어짐이 두려워서일 수도 있고, 나와 정반대의 사람을 만나려는 것은 나를 떠올리면 가슴 아파질테니 그렇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내가 헤어짐이 두렵다고 울면 오빠는 따라 울어.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이후로 우울증이 생겼다고 울 때도 오빠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함께 울었어. 내가 아파하면 또 오빠도 함께 울어줘. 눈물을 연기하는 사람은 있어도 울음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 연기자들이 작품 속에서 구슬프게 울 수 있는 것은 연기라면 다 티가 나기 마련이야. 그 사람들은 진심으로 울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울 수 있는 거야. 오빠도 분명 헤어짐이 무서운 거야. 나와 함께 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늘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그러는 거잖아. 운동하고 돌아오면, 퇴근하고 돌아오면 내가 있으면 너무 기분이 좋다고 그러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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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에는 오빠가 왜 나를 좋아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때는 얼굴보고 사귄 거지?"라고 말하면 한참을 비웃어버리잖아. 오빠는 나에게 외모에 대한 자신감은 넘쳐서 정말 좋다고 그러는데 나도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오빠를 당당하게 사귈 수 있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내가 오빠를 좋아했기에 오빠도 나를 좋아한다면, 다른 사람이 나타나 오빠에게 좋다고 그러면 그 사람을 좋아할거냐고 묻던 과거의 나는 이제 없어. 친구가 있으면 친구 눈치를 보고 무뚝뚝하게 대답해서 오빠를 속상하게 하던 그 때의 지수는 없어.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할 때 사랑한다고 외치고는 오빠가 안 받아줘서 몇날며칠을 울던 그 때의 내가 아니야. 음식 먹는 것에만 빠져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수를 타고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던 그 괴로운 시절에서도 벗어났어. 내가 생일 코스를 짜고, 한 달 알바한 돈으로 지갑을 사줬다고 마치 갑이 된 양 행동하던 그 사람도 아니야. 오빠가 힘들다고 불평하면 나도 힘들다고 괜히 부정적인 말 하지말라고 했던 그 모든 행동들을 반성하고 있어.

오빠와 한번 헤어졌던 날 이후로 나는 분명히 알게 됐어. 세상에는 정말 놓쳐서는 안되는 가치란 것이 있다는 것. 누군가는 나에게 스스로의 삶은 자신에게서 찾으라고 비난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빠는 나에게 내 삶을 찾게 해 준 소중한 방향성이며,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인 걸.


[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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