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캄보디아와 제주, 그리고 난민 [문화 전반]

혐오를 청원하는 사회
글 입력 2018.06.22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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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14년 12월 겨울이었다. 나의 군 입대를 3개월 앞두고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오자는 아버지의 말에 우리 가족은 캄보디아로 떠났다. 앙코르와트는 신비롭고 웅장했다. 동남아 최대 호수이자 이 곳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라는 톤레삽 호수에서 바라본 일몰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내게 캄보디아의 아름다운 모습은 거기까지였다. 투어를 위해 이동하는 거리는 걸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구걸하는 사람들은 그 모습도 각양각색이었다. 팔이나 다리 한 짝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 몸도 겨누기 힘들만큼 가느다란 팔로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도 있었다. 가이드는 그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에게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이들 저 분들 아이가 아니에요.” “네?” “길에 버려진 아이들이 워낙 많아서 그 아이들 데려다가 저러고 있는 거예요. 애기들 중에 눈이 흐리멍덩하고 머리가 이상하게 큰 애들 있죠? 그 애들은 일부러 약을 먹여서 저렇게 만든 거예요. 동정심을 더 사려고.” 그때서야 초점 없이 흰 자위만 있는 듯한 아이의 눈동자가 보였다. 고개를 들 힘조차 없어 목이 뒤로 꺾인 채 힘겹게 안겨있는 아이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지만 웬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투어는 계속되었다. 시장 구경을 하는데 몇몇 아이들이 내 종아리며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이드를 보았다. 무어라 큰 소리로 외치며 가이드가 아이들을 떼어놓았다. 아이들은 가이드에게 쫓기면서도 “원 달라! 원 달라!”를 외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애처롭게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후에 가이드에게 들으니 이렇게 강제적으로 안마 아닌 안마를 하고는 1달러를 달라고 하는 것이 꽤나 고급(?) 구걸 수법이라고 했다. 모습도 수법도 다양한 거리의 낭인들을 겪으며 우리는 어느 조그마한 사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이곳저곳에 있는 탑들이었다. 탑 안에는 뭔가 가득 쌓여 있었다. 하얗게 쌓여 있는 것은 모두 두개골이었다. 누군가 소원을 빌며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탑같이 유골들은 사원 이곳저곳에 가지런히 쌓여있었다. 눈, 코, 입이 있었을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만이 있었다. 있어야 할 것을 잃은 그 빈자리는 이내 상실의 시선이 되어 나를 응시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함께 가이드 투어를 온 다른 가족 분들도 말을 잇지 못한 채 망연히 그 하얀 탑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폴 포트를 수장으로 한 크메르루즈는 반미, 기회주의자 척결이라는 기치를 앞세워 1975년부터 약 4년간 150만 명이 넘는 자국민을 학살했습니다.” 이번에도 가이드의 설명은 놀랍도록 차분했다. 그 차분한 목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사원을 둘러보았다. 그 곳에서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까불며 놀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거기에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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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캄보디아를 어떻게 기억할까. 인터넷에 캄보디아를 검색하면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곳’, ‘천년의 신비, 캄보디아’ 같은 여행 후기들이 먼저 보인다. 천년의 신비를 품은 아름다운 고대 문명의 나라 캄보디아에서 나는 나와 마주쳤던 눈빛들을 기억한다. 아름다운 자연과 웅장한 유적의 그늘 아래 숨어있는 슬픔과 상실의 시선들을. 낙후된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캄보디아는 정부 주도 하에 적극적인 경제성장정책을 펼치고 있다. 캄보디아는 실제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연평균 11%의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현재 세계 GDP 순위 107위의 가난한 나라인 것은 불과 40년 전에 자행된 역사의 아픔을 아직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국민 학살의 참혹한 역사는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미 군정의 지휘 아래 3만 명의 제주 시민들이 학살되었다. "당시 제주에서 깨어있고 의식있는 사람들은 다 죽었다. 이후 제주가 여러모로 낙후됐다면 이 때문이다."라는 양윤경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 회장의 말에 걸인이 가득한 캄보디아의 거리가 눈에 아른거렸다.

1948년 12월 22일. 부모를 포함한 형제 6명을 한 날 한 시에 잃은 오국만 할아버지는 "오늘 일처럼 생생하다."고 말했다. 유족들에게 학살의 아픔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었다. 우리는 제주도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성산일출봉과 한라산, 올레길 등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우리나라의 보물로.  빼어난 풍광이 가득한 관광 명소로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가. 제주는 빼어난 풍광 뒤에 참혹한 역사의 눈물이 담겨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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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나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역사의 아픔을 조금씩 씻어내고 있는 제주에 국제 난민들이 모이고 있다. 내전을 피해 말레이시아로 떠났던 예멘의 난민들은 체류 기간 연장이 막히자 '무사증 입국(한 달간 비자없이 국내에 체류할 수 있는 제도)'이 가능한 제주도로 온 것이다. 전쟁의 공포를 피해 가족과도 등지고 제주까지 떠내려온 그들을 맞이한 것은 난민 허용을 반대하는 국민청원이었다. "이슬람이 들어와 여러분의 아들을 죽이고 딸과 며느리를 강간할 것"이라는 글도 떠돌고 있다. 혐오를 권하는 사회이다.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만연한 혐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국가, 제도, 사회에 만연한 무책임 구조는 혐오발화의 원천이고, 양자는 서로를 확대 재생산한다. 혐오발화 연구자들의 공통된 주장은 '하더라' 식의 인용도 책임이 따르고 그런 인용이 나올 수 있는 담론 무더기를 만든 사회 구조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점이다." 혐오 담론을 묵인하는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혐오를 청원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우리의 아이들은 과연 행복할 것인가. 제주 난민 문제는 제주도의 문제이니 관심 두지 않을 것인가. 마틴 니묄러 목사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독일에서 나치는 가장 처음으로 공산주의자들에게 들이닥쳤다.
그러나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그들은 유태인들에게 들이닥쳤다.
그러나 나는 유태인이 아니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그들은 노동조합원들에게 들이닥쳤다.
그러나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그들은 카톨릭교도들에게 들이닥쳤다.
그러나 나는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그들은 나에게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 때가 되자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 마틴 니묄러, 목사, 독일 복음주의(루터파) 교회


[백광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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